‘드레스에도 주머니가 있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야.’
갑자기 무거워진 듯한 주머니를 느끼며 나는 서둘러 은행을 나왔다.
‘빨리 움직여야 해.’
은행에서 돈을 찾은 나는 평민 거리에서 수수한 옷과 스카프를 산 뒤 어느 여관에 들러 옷을 갈아입었다.
추운 겨울이라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얼굴을 스카프로 꽁꽁 싸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나는 곧장 거길 나와 다시 더 허름해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한 분이십니까?”
“네. 식사를 하고 하루 묵었으면 하는데요.”
“저녁 식사랑 방 하나 해서 3,500세나입니다.”
나는 여관 주인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내심 긴장했지만,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내게 돈을 받고 나머지를 거슬러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만 이틀 정도를 굶은 데다 고생까지 한 탓에 위가 아플 정도로 배가 고팠다.
마음 같아서는 고기라도 뜯고 싶었지만, 그러다 배탈이라도 크게 나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아서 부드러운 크림 스튜와 빵을 먹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따끈한 스튜 한 그릇을 금방 해치운 나는 허름한 1인실에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근 뒤에야 부서질 듯 아픈 몸을 쉬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탓인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불안과 걱정이 차올랐다.
‘누가 나를 알아보지는 않았을까?’
앞서 들른 여관에서 나올 때는 철저히 얼굴을 가렸지만 나도 모르게 행동이 어색하지 않았는지 자꾸 곱씹게 되었다.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에는 들키면 안 돼.’
아직 죽음을 완전히 피한 게 아니었다. 내 시체를 찾지 못한 클리프가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힌다면, 이번에야말로 원작대로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단계 예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수도 밖으로 도망치려는 이 노력도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예외 조건을 충족했던 것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던 중에 얻어걸린 거라서, 이런 노력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수도 외의 지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아냐, 일단은 푹 자자. 그리고 내일은 지도랑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고…….’
걱정은 끝이 없었지만 기력이 완전히 방전된 건지 그쯤에서 퓨즈 끊기듯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을 자다가 허리가 아파서 눈을 뜨니 방은 이미 환했다.
부은 눈을 살살 비비며 바깥을 내다보니 이미 정오가 다 된 것 같았다.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나니 좀 낫네.’
여전히 삭신이 다 쑤시고 아팠지만 잠이 더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관 심부름꾼 아이에게 동전을 좀 주고 세숫물을 받아다가 대충 씻었다.
하지만 셰인이나 소피아에게 맞아서 생긴 멍과 상처는 여전히 끔찍해서, 나는 실내에서도 스카프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1층에 내려가 하룻밤을 더 묵겠다고 돈을 치르며 지도를 구할 수 있는 곳을 물었다.
“수도 지도요?”
“아니요. 제국 전체 지도요.”
“그건 좀 비쌀 텐데……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다 보면 큰길과 만나는 사거리가 나오는데 거기도 지나서 직진하다 보면, 왼편에 <킨드라 만물상>이라고 있어요. 거기 가면 살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