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충분히 이해해요. 킬리언 님은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하신 거고, 아마 불쾌하시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킬리언 님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예요. 어쨌든 제 남편이 되신 분이잖아요.”
이제 곧 킬리언을 만나 내 얘기를 할 리제에게 나름대로 무해함을 어필했다. 제대로 먹혔는지 리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에디트 양은 정말 어른스럽고 다정하시군요!”
“어머, 리제 양이야말로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신걸요. 오늘 드레스도 너무 잘 어울려요. 아니, 드레스가 리제 양 덕분에 예뻐 보이는 것도 같고.”
그건 진심이었다.
와, 진짜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저 말랑거릴 것 같은 뺨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해 봤으면 좋겠다.
리제야, 클리프는 관두고 언니랑 살자. 언니가 잘해줄게!
“피,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쉬고 계시면 이따가 킬리언이…… 올 거예요.”
뺨이 발그레해지는 게 귀여웠다.
5년이나 남매처럼 지내왔던 킬리언의 첫날밤을 상상하는 게 부끄럽고 민망하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리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돌아가는 리제에게 고맙다고 손을 흔들어주고 드디어 나는 적막 속에 혼자 남을 수 있었다.
“후아, 드디어 결혼식 에피소드는 끝난 건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 돌린 나는 하녀가 애써 입혀준 침의를 훌훌 벗어던지고 방 저쪽, 가리개 뒤에 마련된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하으으…… 뜨끈하니 좋네.”
정사를 마친 부부가 몸을 씻으라고 마련해 둔 욕조였다.
정사를 나눌 시간을 생각해서 조금 뜨거운 물을 담아둔 모양이었지만, 전생에도 사우나 가는 걸 즐기던 나로서는 몸을 지지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여기저기 쑤시던 몸도 느른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공작가 며느리로 살면 욕조에 물 받는 것조차 하녀한테 시킬 수 있다는 거잖아? 대박이다.”
리겔호프 백작가가 짜증 나고, 킬리언한테서는 칼바람이 분다고 해도 이 빙의는 행운인 게 맞았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고 불편한 세상이라지만 최수나로 살 때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사치를 누리고 있으니까.
인터넷 좀 못 하면 어떤가. 이 세계에도 책과 연극, 오페라가 존재하고, 사냥 대회와 온갖 피크닉, 파티와 무도회가 줄줄이 이어진다.
회사도 안 가도 되고, 집안일에서도 해방이며, 통장 잔고를 걱정하거나 오빠가 내 이름으로 사채를 빌리겠다고 윽박지르는 일도 없다.
“이제 저놈의 친정하고만 연을 끊으면…….”
루드윅 공작가에서 남주, 여주, 심지어 서브 남주인 남편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호강만 하며 살 자신은 있는데, 아무래도 리겔호프 백작가가 문제였다.
내가 얌전히 살아도 리겔호프 백작이 원작대로 움직인다면 나 역시도 친정의 첩자로 몰려 모가지가 날아갈지 모르는 일이니까.
‘안 그래도 의심스러운 결혼일 거 아냐. 실제로 음모가 깔려 있기도 하고.’
루드윅 공작은 리겔호프 백작가가 황제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랭스턴 대공 쪽에 붙었다고 의심했고, 리겔호프 백작가는 자신의 결백함을 보여주기 위해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
리겔호프 백작이 딸 에디트를 아낀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니, 일종의 인질인 셈이다.
혼담의 상대자가 된 킬리언은 당연히 거부했지만 당분간 리겔호프 백작가의 목줄을 쥐고 있어야 했던 루드윅 공작은 킬리언을 설득했다.
리제에게 빠진 킬리언의 가슴 찢어지는 서사가 나오는 부분도 바로 거기였다.
“사랑해, 리제. 고작 종이 한 장 때문에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만, 내 영혼은 언제나 너만을 갈구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