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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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킬리언을 위해서 그 제안들을 다 거절했다는 말이야?’

앞뒤 상황을 따져보자면 그런 결론밖에 낼 수 없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K는 에디트가 2단계 예외 조건을 충족할 수 있게 도와준 셈이 된다.

리제를 통해 킬리언을 부추긴 게 K였으니까.

차라리 그냥 놔두었다면 킬리언도 10번이나 연달아 제안을 했을 리 없고, 그랬다면 중간에 긴장이 풀린 에디트가 한 번쯤은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원작의 흐름을 강화하기 위해 킬리언을 부추긴 게 역날의 검이 되고 말았다.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제기랄! 2단계까지 무너졌다면, 이제 킬리언은 내 말을 듣지 않게 된다는 거잖아!’

여태 한 번도 충족된 적 없던 2단계였다.

K의 지배력이 30% 정도로 낮아진 킬리언은 앞으로 통제하기가 더더욱 힘들어질 테고, 킬리언 이외의 캐릭터들에 대한 지배력 역시 70% 정도로 낮아진다.

하지만 K는 그게 어떤 상황인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

‘3단계 예외 조건까지 충족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해 본 적 없던 공포가 몰려왔다.

K가 알고 있는 바로는, 3단계 조건까지 깨어지면 자신은 이 세계의 그 무엇에도 개입할 수 없게 되고, 이 세계는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개연성으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그게 어떤 세계일지, K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세계의 신이라고 여겨왔지만, 이 상황에 몰리자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 세계를 창조했잖아!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더 큰 문제는, 원작 추종의 법칙이 사라지게 되면 시간이 계속 흐르게 된다는 점이었다.

리제가 공작 부인이 되고, 싱클레어 가문 사람들이 절절한 후회를 맛보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이 되면 모든 게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다시 이야기의 처음 부분으로 돌아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시간이 그 이후로도 계속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K는 반복되는 삶이 지겨운 것과는 별개로, 원작 이후의 일은 궁금하지 않았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알고 싶지 않아! 리제의 늙어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K는 행복의 절정에서 이야기가 멈췄으면 했다. 고운 리제의 얼굴에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는 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리제는 완벽해야 한다.

젊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그 순간에 박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에디트는 반드시 악녀로 죽어야 해.’

K는 이를 바득 갈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K는 에디트를 직접 죽일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되고 나서야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되었지만, K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지배할 수 있을 뿐,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원작의 거대한 흐름 안에 갇힌 존재였다.

그리고 원작의 흐름은 에디트를 죽일 인물로서 킬리언 단 한 명만을 설정해 두었다.

‘물론 2단계 예외 조건이 충족됐으니 원작 추종의 법칙은 약해졌지. 그렇다면 개연성을 이용해 에디트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내게 주어지는 페널티도 만만치 않을 거야.’

킬리언이 리제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일이 쉬워질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K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예외 조건’이었다.

마지막 예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하든 결국 원작의 흐름에 의해 킬리언이 에디트를 죽이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3단계 예외 조건은 절대로 에디트가 충족시키지 못할 일로 정해야 해. 될 수 있는 한 에디트도 죽이려고 해봐야 하고.’

K는 더 이상 유희를 즐기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간신히 3단계 예외 조건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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