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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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가을과 추운 겨울이 지났다.

그동안 루드윅 공작가는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였지만, 우리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 가을과 겨울 내도록 먹먹한 침묵 속에서 지냈다.

건국제에도 불참했고, 온갖 초대장에도 거절의 답을 보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방에서 새싹이 움트고, 막 피어나는 꽃들 근처에서 꿀벌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올 즈음, 루드윅가는 서서히 아픔을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을 지탱해 준 건 에르딘이었다.

“하빠아-.”

“그래, 그래. 내가 네 할아비다. 허허허!”

“꺄하!”

공작이 번쩍 안아 들고 들썩거려 줄 때마다 너무 신나 하다가 침까지 흘리는 에르딘이었지만, 공작은 자신의 고급 크라바트나 재킷이 에르딘의 침에 젖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에르딘! 이것 보렴!”

그 곁에서 공작 부인은 온갖 딸랑이와 인형을 흔들어 댔다.

그럼 에르딘이 그걸 쥐어 보겠다고 손을 허우적대며 눈을 반짝였는데, 공작 내외는 그것도 귀엽다며 껌뻑 죽었다.

그 덕분에 라이젠으로 가져가야 할 에르딘의 짐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사실 공작 내외보다 내가 걱정했던 사람은 클리프였다.

“리제의 목숨을 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리제를 태운 죄수 호송용 마차가 떠나는 걸 보면서 지독히도 쓸쓸한 얼굴로 내게 인사하던 클리프의 얼굴이, 두 계절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그동안 사이가 틀어졌다고는 해도 리제에 대한 감정을 쉽게 털어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가을과 겨울, 그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 방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랬던 클리프도 봄이 되자 마음의 결정을 한 듯했다.

“형이 티 타임에 초대했어.”

“클리프 님이요? 이젠 좀 괜찮으신 것 같아요?”

“겉으로 보기엔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속은 어떻게 문드러졌을지 모르지만.”

킬리언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 그가 초대한 티 타임 장소는 그와 킬리언과 리제가 종종 차를 마시곤 했던 대회랑의 발코니였다.

따뜻한 볕이 드는 그때 그 자리에서, 클리프는 고급 다과를 준비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향기가 좋네요. 티 타임에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클리프 님.”

“어서 오십시오. 뭐 대단한 것도 없는 자린데 감사 인사라니, 받기가 민망하군요. 하하!”

킬리언의 말대로 그는 예전처럼 자신만만하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야윈 뺨과 거친 피부, 전보다 조금 줄어든 것 같은 체격을 보며 그가 심하게 마음고생 했다는 걸 눈치챘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잠이라고 제대로 잤겠는가.

그리고 사방이 고요한 겨울밤 내내, 잠도 이루지 못한 그의 머릿속을 잠식한 생각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자책, 후회, 슬픔…… 그런 감정 안에서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대충 짐작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밝게 웃었다. 그가 그러고 있듯이.

“에르딘의 세례는 언제지?”

“3월 20일, 성 루펠로의 날에 할 거야.”

“이제 금방이구나. 세례가 끝나면 곧바로 돌아갈 셈이냐?”

“그럴까 했는데 아직 어머니, 아버지 곁에 에르딘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한 달만 더 머무르려고.”

“잘 생각했다. 고맙다, 킬리언. 고맙습니다, 제수씨.”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