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님이 뭔가 단단히 작정하신 모양이네?”내 말에 안나가 살짝 웃다가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건국제 드레스를 준비하지 않으시나요?”
“아, 나는 있는 거 입으려고.”
과거의 에디트는 한 번 입은 드레스는 다시 입지 않는다고 유명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런 사치 용납 못 한다.
게다가 지금 내 옷방에 들어찬 드레스들은 과거의 에디트가 입었을 뿐, 최수나가 빙의된 지금의 에디트는 입은 적 없으니까.
‘나로서는 아직 못 입어본 드레스가 많다고.’
그중에서 적당히 눈에 안 띄는 걸로 골라서 입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가한 생각은 나만 한 것이었는지, 점심때가 지나자마자 킬리언이 들이닥쳤다.
“나랑 같이 나갑시다.”
“네? 어딜요?”
“의상실.”
“건국제에 입고 갈 옷 맞추시게요?”
킬리언이 옷 맞추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건가 싶어 기대에 찼는데 그가 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내 옷을 맞추는 김에 당신 것도 맞출 겁니다.”
“저는 있는 거 입으면 되는데요.”
“우리가 부부가 된 이래 처음 함께 나가는 행사입니다. 우리의 불화설도 잠재울 겸, 옷을 서로 맞춰서 입고 나갔으면 하는데요.”
불화설이라고 하니까 내가 셀럽이라도 된 것 같고 그러네.
솔직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긴 하지만, 이곳의 귀족들이 평판에 죽고 사는 걸 보면, 뭐, 킬리언의 의견을 따라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좋아요. 가요. 그런데 예약도 안 하고 가도 돼요?”
“공작가의 위세란 게 그렇습니다.”
“아아, 예, 그러시겠죠.”
나와 킬리언은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간단히 외출 준비를 하고 나섰다.
방 밖으로 나와보니 리제의 방 근처에서 뭔가 호들갑스러운 분위기가 폴폴 풍겼다.
‘갑자기 의상실에 가자고 한 거 보면…… 리제와 클리프가 둘이서 저러고 있는 꼴을 보는 게 여전히 괴로운가 보지?’
킬리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킬리언이 좀 짠해졌다.
물론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고, 최근 나에 대한 그의 태도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오랜 짝사랑을 금방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킬리언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캘리포니아 선샤인 버전의 에디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안 그래도 오늘 날씨까지 우중충해서 킬리언의 기분이 더 가라앉을 수 있으니까.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루아얄 의상실인가요?”
“루아얄 부인의 솜씨는 나무랄 데 없지만, 오늘은 다른 곳을 가려고 합니다.”
“오, 기대되는데요?”
우릴 태운 마차가 공작 저를 벗어나자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슬그머니 킬리언 옆으로 바싹 붙었다.
뭐 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곧장 날아왔지만 캘리포니아 선샤인은 이 정도에 기죽지 않는다.
“추워서요. 안 돼요?”
“……안 될 건, 없습니다만.”
원래 사람이 추우면 더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다.
나는 킬리언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는 애초의 노선대로, 킬리언의 몸에 찰싹 붙어 그를 따뜻하게 해주었다.
왠지 내 사심을 채우는 행동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내 의도 자체는 순수했다. 정말로!
다행히 내 진심이 통했는지, 킬리언도 나를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건국제에 가면…… 조금 기분이 상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