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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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톰한 숄을 어깨에 덮고 섬세하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같은 여자라도 넋 놓고 바라볼 만큼 예뻤다.

하지만 그 예쁜 모습을 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웬일로 혼자 있지? 리제가 있는 곳에 당연히 남주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어디선가 클리프가 나타났다.

“리제.”

“아, 클리프!”

“아직 바람이 쌀쌀한데, 왜 여기 나와 있어?”

그건 나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밖에서 책 읽는 장면을 연출하기엔 아직 날씨가 춥다고. 나도 춥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너무 답답해서요. 쌀쌀하긴 하지만 공기가 맑아서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클리프가 다정히 말하며 은근슬쩍 리제에게 바싹 붙어 앉는다.

“무슨 책 읽어?”

“황실의 역사에 관한 책이에요. 저는 이런 교육을 잘 받지 못했으니까…… 혹시 몰라서 공작 각하께 누가 될까 봐서요.”

리제는 싱클레어 백작가의 호적에는 올라가 있지만, 사생아라 무시당하며 귀족이 배워야 할 것은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딸처럼 대해주는 공작 부부에게 부채감을 느꼈고, 저 때문에 공작 부부가 어디서 망신을 당할까 봐 늘 책을 끼고 살았다.

‘불쌍해. 사생아로 태어난 게 리제 탓인가? 아랫도리 잘못 놀린 아비 탓이지!’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클리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리제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입 맞췄다.

“네가 누가 될 일은 절대 없어.”

“하지만…….”

“좋아서 읽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단순히 누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보는 거라면 그만둬. 너는 여기서 즐겁게 지내기만 하면 돼, 리제.”

클리프는 다정하게 리제를 달랬지만, 리제의 미소는 어딘지 씁쓸했다.

그리고 난 리제가 지금 느끼는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클리프, 너야 다 아는 거라 괜찮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못 배우고, 못 가진 쪽은 그게 아니라고.’

클리프가 아무리 리제를 감싸준다고 해도 리제 본인이 느낄 콤플렉스를 없애줄 수는 없다.

나는 리제가 스스로 찾아 공부하는 게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리프는 리제에게 집착하고 있는 놈이었기에, 리제가 저 없이 홀로 서는 걸 반기지 않았다. 그러니 저런 말로 은근히 꼬드기고 있는 거겠지.

그 와중에 킬리언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리제가 열심히 공부하겠다는데, 왜 방해해? 리제,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그게 네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클리프와는 결이 다른 위로였지만 내가 리제였다면 킬리언에게 더 고마움을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남주가 해야 할 대사치고는 좀 약했다.

이런 로판에서 남주들이 내뱉을 만한 대사는 ‘모든 걸 다 안겨줄게, 넌 나만 바라봐.’니까.

‘킬리언. 나도 네 말이 맞다고 동의는 하는데, 그래서 넌 클리프를 이길 수 없는 거야. 클리프는 다정하게 돌아버린 놈이거든.’

클리프는 차라리 리제가 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길 바랄 것이다.

리제가 킬리언에게 다정한 꼴은 참아줄 수 있지만, 그녀가 홀로서기를 하는 것에는 큰 불안감을 느끼겠지.

어쨌든 예상했던 바와 같이 리제가 있는 곳에 두 남자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일도 없나? 하루 종일 리제 뒤를 밟는 게 일인가?’

귀족은 일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지만, 저것들은 놀아도 너무 노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리제 주변에서만 빙빙 돌고 있었다.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