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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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국의 연회는 다른 어느 나라의 연회보다도 화려했다.
기름 냄새가 지독하게도 풍겼다. 풍악 소리에 귀가 다 아팠고, 햇빛 아래 빛나는 사람들의 장신구에 눈 이 멀 것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 은 내 옷차림이었다.
질 좋은 붉은 비단에 빼곡히 수놓 은 모란.
겹겹이 입혀 부풀린 치맛자락. 가체를 써 틀어 올린 머리, 내 코 에 분 향이 날 만큼 짙은 화장.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치장 에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한숨이었는데, 그마저도 알아챈 시비가 내게 눈을 부라렸다.
“산아 아가씨. 이제 오늘이면 황제
폐하의 후궁이 되실 분께서 경박스 럽게 한숨이라니요.” 그러게.
나는 오늘부터 황제의 후궁인데 너 는 어쩌면 이렇게 내게 건방질까.
그리고 경박한 한숨이라니.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 리를 하는구나.
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여전히 내게 닥친 현실이 어색한 탓이다.
산아 여란.
여란 가의 막내딸. 이제 여덟이 되 있으며, 황제의 후궁으로 팔려 가듯 시집가는 아이.
그리고 역하렘 소설 속의 조연.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그 아이에 겐, '비참하게 살해당할'이라는 수식 어가 붙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나지.
'인생•••
세 번째 한숨이 내 입에서 튀어나 왔다.
한 역하램 소설이 있다.
내용은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황제인 여주와 그녀의 부군인 남주
남주들의 치정 싸움과 감정 변화가 없는 무심한 여주가 부각되었던 소 설.
다만 그 소설에는 중간에 몇 번 등장하는 조연이 하나 있었다.
산아.
황실의 성도 받지 못한 그 아이는 몇 안 되는 황제의 여자 후궁이었 다.
아이는 어렸고 영악했지만 애정에 목말랐다.
산야는 제게 처음으로 상냥하게 대 해 준 황제에게 매달렸다.
황제의 관심을 얻기 위해 아이는 불쌍해졌고, 똑똑해졌고, 가끔 패악 을 부렸다.
다만 문제는 그런 아이의 행동이 남주들에게서 여주를 과도하게 빼앗 아 갔다는 것이고, 이 소설의 남주 들은 고작 여덟인 아이보다 훨씬 똑 똑했다는 것이다.
결국 산아는 열두 살의 나이에 반 역죄를 쓰고 처형당한다.
그 소설을 읽던 독자들은 산야에게 그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기도 했 고,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지는 산아 의 패악에 질린 탓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랬다.
•••이 소설에 산아로 빙의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왜 하필이면 이 에일까. 나는 상당 히 작잡했다.
「참 유감입니다.」
산아가 죽었을 때 남주들 중 하나 인 귀비 미리내가 한 대사가 새삼스 레 떠올랐다.
4년 후이기는 하지만, 원작 그대로 진행된다면 나는 4년 후에 죽겠지. 괜스레 섬뜩해진 탓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들라.” 그때, 위엄 있게 가라앉은 목소리 가 연회장을 울렸다.
그 순간 회장을 흐르던 음악 소리 와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들었고, 서늘 한 회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장 높은 단상에 놓인 옥좌.
그곳에 앉아 있는 흑발의 여인.
금빛 예복과 면류관이 찬란했다.
예화 아륜.
이 나라의 황제.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
그 눈동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커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0갔 다.
이제 저대로 일어나서,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겠지.
내 예상은 한 치도 들리지 않았다.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제 는 높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왔다. 그녀의 곁에 있었던 후궁-그러니 까 남주들-들이 황제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단번에 내 앞으로 다가온 황제가 무릎을 꿇었다.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행동이었 지만, 무려 황제가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 단번에 소란이 일었다. “폐, 폐하!”
“네 나이가 몇이나?” 그녀는 깜짝 놀란 수족의 물음도 무시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 다.
“지난달에 여덟 살 생일이 지났습
니다.” 사실은 스무 살도 훨씬 넘었지만. “대체•••
0 드 하고 己가는 소리가 들렸
다.
나는 그녀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이 해했다.
그래. 너도 여자 후궁이 온다는 건 알았지만 그 애가 고작 여덟 살일
줄은 몰랐겠지.
산아의 가문, 여란 가는 서라국을 세운 일곱의 개국 가문 중 하나였 다.
용들의 축복을 받아 혈연으로 강한 이능이 내려오는 그 일곱 가문은 권 력의 정점에 섰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누렸지만 당연하게도 의무 또 한 짊어져야 했다.
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그 황제에게 후궁을 바쳐야 하는 것도 그중 하나 였다.
황후면 모를까, 십이 될지 백이 될 지 모르는 후궁이었다.
그러한 자리에 후계를 엇거나 결혼 장사로 다른 귀족가에 팔 수 있는 자식을 내놓는 것은 그들에게 꽤나 속이 쓰린 일이었다.
물론 빼어난 외모로 황제의 눈에 들어 황태자의 아비가 되거나, 자식 을 첩자로 집어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의 가능성은 보통 0에 수렴했 다. 어찌 보면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
다.
남주에게 대들었던 조연인 '산아' 가 죽었듯이, 여주인 황제가 모두에 게 사랑받는 일 같은 것은.
정보를 빼 오라고 밀어 넣었더니, 도리어 백이면 백 후궁이 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황제에게 반해 간도 쓸 개도 다 내줄 듯이 굴고 있으니 각 가문에서는 후궁을 넣는 것을 싫어 할 수밖에.
이번 대 여란 가의 가주, 기윤 여 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여 그는 가장 힘이 약한 아이를 들여보내려 했지만, 축복인지 저주 인지 하필 이번 대의 여란 가에 이 능이 약한 아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 였다.
쓸모가 있어 자마 황궁에 보 낼 수 없었던 그는, 저도 잊어버렸 던 어린 사생아 하나를 찾아냈다. 생김새는 아버지인 그와 똑 닮았으 나 이능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아이 를 말이다.
기윤 여란은 언제 미적댔나는 듯이 산야를 황궁에 홀랑 보내 버린다. 규중에서 고이 기운 막내딸을 바친 다는 양 거짓 눈물을 짜내어 이득 또한 잇속 가득 챙기고는 말이다.
그때까지도 한참을 미적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준 여식인 줄만 알고 괘씸해 하던 황제는 바로 지 금, 여란 가의 후궁이 고작 여덟 살 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일어나거라.” 잠시 상넘에 빠졌던 나는 황제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당혹과 연민, 미안 함이 섞여 있었다.
그건 아주 타당한 반응이었다.
나는 지금 이 불편한 혼례복을 입 고 두 시간째 꿇어앉아 있었으니까. 연회 내내 연회장의 한 가운데에 꿇려 놨더니 사실 그 여자가 이렇게 나 어리다니. 충분히 죄책감을 가질 만한 상황이었다.
물론 평범한 모럴리스 황제였다면 그가 어리든 말든 아무런 신경을 쓰 지 않았겠지만, 서라국의 황제들0  모두 도덕심이 투철한 인간이었으며 이번 대의 황제인 예화 아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명에 불복한 여란 가를 싫 어했지만 그것을 어린아이에게까지 적용시기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말에 사족을 달지 않 고 그대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0 ”
휘청.
일어나자마자 몸이 흔들렸다. 오래 꿇어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린 탓 이었다.
아니, 사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실시간으로 연약한 이 미지를 쌓고 있었다.
나는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며 최대 한 몸을 지탱하려 했지만, 안타깝게 도 내 몸이 쓰러지는 것과 황제가 나를 붙드는 것이 더 빨랐다.
“괜찮으나?” 아, 젠장.
나는 놀라서 커진 황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삭였다.
그녀의 눈에 들어찬 감정은 누가 보아도 호의였다.
나는 거기서 눈을 슬쩍 돌려 황제 의 뒤로 보이는 그녀의 후궁들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단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시, 시발.
다시 한 번 이 소설의 장르를 말 하자면 피폐였다.
여주가 특별히 구르지는 않지만, 남주들의 미친 집착 탓이었다.
이미 이 몸인 산아는 황제의 총에 를 얻으려다 살해당한 전적이 있었
다.
고로 나는 최대한 황제의 눈에 들 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방금은 정말로 어쩔 수 없 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는데 어떻게 힘을 주라고.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영광스럽게도 황제 폐하의 부축을 받은 사람이 되 있고, 그 부축의 값으로 황제의 부 군들에게 단번에 주목받았다.
•••네 궁에 궁의를 보내 주마.
이 와중에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께 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이지 그 호의가 눈물 나게 고 맙지 않았다.
제발 당신 뒤에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남편들을 신경 씨 주시겠 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면전 에 대고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 릇이라, 나는 011씨 웃으며 조심스레 황제의 팔에서 손을 뺐다.
“괜찮습니다. 잠시 휘청한 것뿐이
에요.”
거짓말이다. 전혀 안 괜찮았다.
서 있어서 다리에 감각은 돌아왔지 만 이제 어마무시하게 저렸다.
이따 걸을 때 분명히 목각 인형 같은 움직임이 날 것이다. 하지만 내 대답은 완벽했고, 황제 는 그 앞에서 주저했다.
자신의 실수를 그냥 넘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거라. 문 제 삼지 않을 테니.” 두 번째 똥이다.
나는 그녀의 호의에 그렇게 생각했 다.
아무도 안 믿겠지만 오늘의 주인공 은 나와 황제였다.
어찌 됐든 혼인 연회이니 말이다.
그런 연회에서 나는 철저하게 무시 당하고 있었다.
아니, 무시 정도가 아니라 모욕이 있지.
다리는 좀 아팠지만 나는 별 상관 없었다.
오히려 달가웠다. 이렇게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남주들도 나를 신경 쓰지 않겠지.
다만 문제라면 나는 황제가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하는 심사로 내게 고개를 들어 보라고 할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어린아이라는 것 을 알아채고 죄책감을 느낄 것을 알 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작의 산아는 자신의 연약함을 한 껏 강조하며 울먹인다.
그것에다시금 죄책감을 느낀 황제 는 그날 밤 산아의 처소를 찾아가 아이에게 사과하고, 악몽을 꾸니 곁 을 지켜 줄 수 있나는 산야의 말에 아이를 토닥이며 하룻밤을 머문다.
아주 당연하지만 그걸 남주들이 가 만히 둘 리가.
그들은 자신에게서 황제를 빼앗아 간 산아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산아 는 그들에게 대놓고 이를 드러낸다. 파국의 시작이었다.
자, 그럼 황제가 내게 내린 축객령 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가.
말했다시피 오늘은 내 혼인 연회였
다.
주인공인 만큼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하는 자리에 황제가 호의를 베풀었 다.
그건 내게도 총애가 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 오히려 최단기간에 총애를 얻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지금껏 어느 후궁도 혼인 첫날부터 황제에게 눈길을 받은 자는 없었으 니 말이다.
그 반증으로 후궁들의 눈길이 아주 뜨거웠다.
첫날부터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더 사족을 붙이지 않고 깔끔 하게 대답한 뒤 몸을 돌렸다.
부디 내 삐걱거리는 걸음이 두꺼운 혼례복 아래에 가려져 황제가 황송 하게도 나를 부축해 주는 일이 없기 를 바라면서.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