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의 결심이 무색하게 그런 생각 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내 발로 황제를 찾아 간다면 반쯤 돌았을 때라고 했지만, 죽음 앞에는 모든 것이 평등했다.
정말로 강한 유혹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건 가뭄을 막자고 댐을 없애 비리 는 꼴이었다.
혼인 후의 초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니 그럭저럭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후 에 황제와 동침했다는 소문만은 안 됐다.
물론 그것도 정말 당장 죽을 것 같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나에게는 다행히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 다.
나는 내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있는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운 돌을 천에 감싸 넣어 두고 자리끼를 떠 두는 등 부산히 움직이 던 그녀는 내 시선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서연은 내 궁녀들의 통솔 격이었 다.
그리고 그 정도 되는 이라면 황제 가 꽤나 신임했던 궁녀일 것이다. 오늘 그녀에게 안기면서 또 한 번 느꼈던 것이지만, 황제를 지근거리 에서 모시는 궁녀들은 아주 강했다. 서연의 몸이 온통 단단했던 이유도 온몸이 근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능이 있는 귀족들은 황궁에서 궁 녀로 일하지 않지만, 이 세계에도 사생아는 존재했다.
가주의 하룻밤 유희로 비려진 아이 들은 충분히 많았다.
“마마. 하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서연이 공손히 물어 왔다. 나는 목 을 가다듬으려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부러 웅얼웅얼 말을 꺼냈다
•••같이 자 주면 안 되겠어?"
내가 들어도 콧소리 가득한 목소리 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 진짜 어린 에 같다.
이 몸이 어린 에는 맞지만 수치스 러웠다.
서연이 함께 잔다면 분명 안전할 것이다. 그러니 최적의 방법이다.
내가 수줍은 어린아이 연기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런 일이 앞으로 여러 번 있을 텐데, 매번 이런 짓을 해야 할까? 내가 진한 허탈함을 느끼고 있을 때, 서연이 곤란한 얼굴로 머뭇거렸 다.
나는 그 얼굴에 표정을 싹 바꾸고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썹을 축 내 렸다.
“새로 궁을 옮겼더니 낯설기도 하
•• 혼자 자면 악몽도 많이 꾸는 데.”
손도 두어 번 꼼지락거렸다. 작은 손이 꼼지락거리는 건 내가 봐도 귀 여웠다.
나는 이제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 가 내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로 했다.
“하지만 마마, 아랫것과 함께 주무 시는 것은•••
서연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잤다.
나를 꽤나 귀여워하는 줄 알았더 니, 이 정도로 넘어갈 만큼 귀여워 하진 않는다는 건가.
이런 상황에 더 떼를 쓰는 것은 씩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를 쓰는 귀찮은 아이는 오히려 그것을 들어 주기 싫을 만큼 짜증 난다.
나는 더 종용하는 대신 고개를 추 욱 떨구었다.
하나, 둘, 셋.
이래도 안 넘어오네.
•••정말 안 되는가?” 나는 한껏 더 불쌍한 얼굴로 고개 己들었다. 목소리도 더 서러웠다.
내 표정에 서연의 얼굴이 크게 흔 들렸다.
그녀는 정말로 고민되는 듯 입술을 악물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주무셔야 합니
다.”
서연의 조용한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찔끔해 입을 다 물었다.
같이 잔다고 해서 나와 같은 침상 을 쓰거나 이불이라도 가져올 줄 알 았는데, 그녀는 작은 의자 하나만을 가져와 내 발치에 단좌다.
저대로 밤을 새우겠다는 결연한 의 지마저 느껴져 나는 느을 깜빡거렸
다.
“피곤하지 않은가?”
“소인은 괜찮습니다. 염려하지 마 십시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한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밤을 새우는 게 피곤할까 봐 걱정도 되지만, 그보다 내가 잠 들면 나갈까 불안했던 탓이다.
아까 해시라고 했으니 이제 열 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살수는 당연하게도 이른 시간인 밤 아홉 시나 열 시쯤에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적어도 새벽 두 시 정도에 올 텐 데, 그 시간이면 이린 몸은 금세 잠 들어 비리고 말 게 뻔했다 혀를 깨물어서라도 깨어 있어야 하 나?
•••잠이 오지 않으시면, 이야기 라도 들려 드릴까요.” 내가 눈을 굴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서연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 었다.
천일야화 속의 술탄처럼 밤새 이야 기해 달라고 할까.
하지만 나는 금세 생각을 바꾸있 다.
그렇게 얕은수를 쓰기보다, 조금 더 약을 팔기로.
•아니, 아니야. 안 해 줘도 괜 찮아.”
•••잠이 안 오는 건 아니야. 그 냥, 잠들면 서연이 가 버릴까
토할 것 같다.
지금 이 대사를 친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나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꾹 참고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가릴 수 없는 연민이 어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정말인가?”
“예. 마마.”
“한데 왜 눕지 않고•••
“어찌 고귀하신 분과 동침을 하겠 습니까.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드 0
그 대답까지 나는 비로소 마 음을 놓았다.
안 누웠던 이유가 나가려던 게 아 니라 예법 때문이었구나.
“그래••
긴장이 풀리니 금세 수마가 쏟아졌
다.
나는 눈이 감기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시야가 몇 번, 나는 이 내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서연은 금세 잠든 산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앳된 얼굴이 평온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 또한 그러했
다.
그녀는 세상 모르게 잠든 아이를 두고 며칠 전에 들었던 소식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 '잔아 이란은 첩자가 아니나.
그 말을 하는 황제의 시종의 목소 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서연 또한 그랬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으나 과하게 용했다.
서연은 아이를 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산야가 평범한 아이
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어떤 아이가 화려한 선물을 받고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끼리고, 떼도 제대로 쓰지 못해 웅얼거린단 말인가.
산아와 그녀의 신분 자는 명확했으 며, 서연은 절대로 산아와 같은 방 에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산아의 눈이 너무나 슬퍼 보여 서연은 오늘 하루만 그 절대적 인 전제를 깼다.어찌 저런 아이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래 서연은 한 달만 산야의 곁에 서 머물 예정이었다.
하나 그녀는 예화에게 간청해 산야 의 곁에 남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온 모든 궁녀들 또한 마찬가지 였다.
아이는 한 번도 돌봐 본 적이 없 지만, 아이들을 많이 기운 노련한 궁녀들이 오는 것이 산야에게 더 좋 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했다.
적어도 그러한 궁녀들은 이능 없이 도 목뼈를 맨손으로 부수지는 못하 지 않는가?
그러한 힘을 어린아이 하나를 지기 기 위해 쓰겠다니, 그녀의 손에 목 숨을 잃은 수많은 살수들이 듣는다 면 지하에서 통곡할 소리였다.
하나 방 안은 조용했고, 평화로웠 다.
그 평화로운 공기 속에 서연이 자 세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직 여기 계셨습니까?” 들어온 궁녀가 서연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녀가 작게 웃음 짓고는 그녀에게 다가왔
다.
“가서 쉬셔요. 제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무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서연은 궁녀의 말에 침음을 삼켰
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궁을 옮기다 보니 총괄인 그녀가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사가에 가지 않습니까. 어서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거부할 명목이 없었다.
서연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수, 고맙구나. 서연의 말에 연수라 불린 궁녀가 빙긋이 웃었다. “무일요.”
산아가 깨지 않게 서연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고, 연수는 서연이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산아의 잠든 얼굴이 곧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산아는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 한참을 염려했지 만, 그럼에도 어린아이의 몸이란 깊 은 수면을 요구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연수의 눈이 기묘 하게도 가라앉아 있었다.
장밖에서 새가 두어 번 울었다. 그 리고 그 순간, 창틀에서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평범한 물이었다면 곧바로 천이나 나무를 적셨을 텐데, 그 물은 물방 을의 형태를 유지하며 천천히 산아 에게로 향했다.
누가 보아도 이상한 형상이었으나, 연수는 그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무 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갔 고, 아까의 서연처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기 전 연수는 잠시 멈 칫했으나, 이내 망설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목과 코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 졌다.
나는 그 순간 불에 덴 듯이 놀라 며 잠에서 깨어났다.
입과 코로 밀려들어 온 물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해 기침했고, 그 결 과 더한 물이 입으로 밀려들어 왔
다.
입. 입을 다물어야 해.
자꾸만 몸이 물을 뱉어 내려 기침 이 나왔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으 며 주변을 살폈다. 온통 푸른빛 필터를 덧씌운 것 같 은 모습이 보였다.
눈에 무엇이라도 닿은 듯이 뻑뻑했 고, 팔다리를 휘젓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누군가 내 방을 물로 한가득 채우대 두었다.
아무렴 이 밤에 물놀이하라고 물을 채워 놨을 리는 없다.
아아.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 맞는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아니면 내가 받은 이 궁이?
확실한 것은, 누군가 오늘 밤 나를 죽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