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는 정 말로 시무룩해 보였다.
나는 썩 구겨지지도 않은 책과 그 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눈 지재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습니다. 폐하.”
내 말에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울 고 난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나는 옅게 웃었다.
내게 읽어 주고 싶은 동화책을 못 읽어 준 게 뭐 그리 큰일인가 싶지 만, 이대로 두었다간 이렇게 서서 밤을 새울 것 같았다.
“저는 다른 동화들도 들어 보고 싶 습니다. 그리고, 이 동화책도 찢어지 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인형을 뜯어 비렸 지 않느냐.” 시무룩한 황제의 말과 함께 그녀의 손에 잡혀 있던 호두까기 인형이 가 련한 모습을 드러냈다.
책의 커버를 비단으로 씌운 탓에 옷을 바느질해 고정했는데, 그것이 뜯기며 호두까기 인형은 반나체였
다.
어우, 눈 마주졌어.
복수하겠답시고 밤에 생쥐들이랑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최대한 아이처럼 활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장이지 않습니까. 저는 서책의 내용 또한 궁금한걸요.” 그 말에 황제의 얼굴이 비로소 밝 아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 내 이것을 읽어 주마!” 황제는 동화책을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꼭 안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미리내는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
랐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이것까지 아마 세 번째. '황제의 성격이•••••• 원래 저랬나?'
황제는 온화했고 관대했으며 다정 했지만 여전히 지배자였다. 그녀가 베푸는 호의는 애정이라기보다는 박 에였다.
그 박에 안에 아이를 생각해 동화 책을 고른다는 것은 들이 있지 않았
다. “산야?” 내가 다가오지 않자 황제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동화책도 내려놓 은 채 다시 내게 걸어오고는, 해사 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굽혀 앉았
다.
“자. 가자꾸나.” 나는 내게 내민 손을 보고 웃지도 을지도 못한 얼굴을 했다.
황제가 뒤돌아보는 경우가 있었던 가? 그리고 이렇게 몸을 굽힌 경우 느9
“예. 폐하.”
나는 생각을 삼키고는 입꼬리를 올 렸다.
황제의 손에 내 손을 얹자 그녀는 신난 듯이 걸어가다가도 내 보폭을 맞추었다.
손바닥에 닿은 온기가 미지근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황제와 미리내와 같은 침상에 누웠다.
침상은 충분히 컸고, 셋이 눕기에 충분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내가 이 중간에 끼어 있다는 것이다.
“미리내. 이번 장은 네가 읽겠느
나?”
“그럴까요, 폐하?” 연에질은 나 빼고 해 줬으면 좋겠 다.
나는 마음껏 서늘한 얼굴을 했다. 가운데에 있으니 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 정도의 얼굴을 해도 안전했다.
둘은 한 장씩 번갈아 가며 내게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호두까기 인형의 내용을 극도로 줄 이고 삽화를 화려하게 넣은 동화책 이라 그리 길지는 않았다.
문제라면 황제가 정말, 빌어먹게도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왕, 자를 놔. 줘. 마아••••••리는 쥐 의 왕에게, 목화를•••••• 아, 아니. 신 을 던지며•• 새삼스럽게 초등학교 때가 떠올랐
다.
국어 시간에 가끔 선생님께서 아이 들에게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했는 데, 가끔 어떤 아이들이 저렇게 읽 을 때가 있었다.
이 세계의 교육 방침에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황제의 읽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녀가 지금껏 무언가를 소리 내어 읽을 필요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 지만, 목소리가 잔뜩 긴장한 사람처 럼 달달 떨리고 있어 더 했다.
그런 목소리를 듣고 잡이 올 리가 없었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런 황제의 모습 을 미리내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연에질은 나 빼고 했으면 좋겠다.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직접 책을 읽으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쉽 지 않았다.
아니, 그게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까?
당장 표지에 박힌 보석만 해도 다 섯 종류가 넘어7갔다. 그건 내지도 비슷했다.
동화책인지 드레스인지조차 헷갈렸 다. 주인공인 마리의 드레스는 모두 진짜 실크로 만들어져 있었고, 호두 까기 인형 또한 온갖 보석으로 장식 되어 입체적이었다.
왜 표지의 호두까기 인형이 쥔 것 만으로 떨어졌나 했더니, 안에 이런 것들이 있는데 당연히 무게에 못 이 겨 떨어질 수밖에.
피곤한데 자꾸만 잠이 깨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는 대신 몸 을 한 번 뒤적이고는 시선을 위로 올려 장가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달빛이 고인 장가. 그것을 보자 자연스럽게 고운이 생각났다.
눈이 아픈 동화책보다 훨씬 나은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나무인 지 모를 무언가의 그림자가 휙 흔들 렸다.
나는 일순 비치는 불안함에 눈가를 살풋 찡그렸다.
내가 장가를 더 살펴보려던 찰나, 조심스러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잠들었나?” 그 순간 나는 창가에 신경을 끄고 곧바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저 더듬거리는 '호두까기 인당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눈꺼풀이 떨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숨을 고르게 쉬니 황제가 가만히 나 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탐색하듯 그렇게 바라보던 그 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들었군.” 그 목소리에 섞인 뿌듯함에 나는 기가 막혔다.
본인이 날 재웠다고 생각하는 걸
까.
“예. 그렇군요.” 뒤이어 미리내의 목소리도 들려왔 다.
둘의 목소리에는 몽롱함이란 찾아 볼 수 없었고, 나는 조금 불안해졌
다.
'귀마개 아직 못 꼈는데.
자칫하면 잠에서 깨어난 척을 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미리내가 드럽게 속삭였다.
“참으로 사랑스럽지요.”
•••그렇구나.” 황제의 조용한 긍정에 나는 하마터 면 웃을 뻔했다.
그녀는 정말로 미리내를 아끼는 모 양이었다. 그런 말에도 긍정해 줄 만큼이니 말이다.
나는 황제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믿지 않았다.
그건 내게 변할 수 없는 명제였고 진리였다.
순수한 모습은 역시나 연기였나.
그때, 머리 위에서 작은 입맞춤 소 리가 들렸다.
나는 뒤이어 들려올 소리에 지레 놀라 얼굴을 찌푸렸으나, 질척한 소 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내게 남은 것은 이마에 작게 내려온 입맞춤이었다.
“잘 자거라.” 그 목소리는 낮았고, 나는 그게 황 제인지 미리내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다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이내 고른 숨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내가 아까 보았던 그림자가 무엇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내 양손 을 잡은 두 개의 손 탓에 포기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등장했지만, 잠에서 깨있 을 때 나는 그 꿈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세 번째 부름에 이르러서야 고운이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앞머리가 =들리며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푹 한숨을 내 쉬었다. “어젯밤에, 화룡궁 장가.” 움찔.
고운의 어깨가 떨렸다. 시선이 다 시금 아래로 口내려갔다. 어떻게든 눈을 피해 보겠다는 모습 에 나는 왼쪽 눈썹을 속 올렸다.
고운은 거짓말을 잘 못 했다. 그건 검지 손톱을 뜯는 엄지나 내가 말할 때마다 떨리는 어깨로도 나타났지 만, 역시 가장 투명하게 보이는 것 눈이었다.
그래서인지 고운은 핀을 꽂지 않고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덕에 눈은 확연히 가려졌다.
내가 만약 어린아이라면 속아 넘어 갔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꼼수는 내 눈에 다 보였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아이를 한 번에 잡기보단 슬슬 몰아가기로 결 정했다.
“내가 분명히 앞머리 넘길 걸 주었 던 것 같은데.”
“자. 하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는 어디 있을까.”
나는 내가 아까부터 쥐고 있었던 핀을 내밀며 가만히 고운을 바라보 았고, 그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했 다.
“그러고 보니, 앞머리가 너무 길어 서 자꾸 시야를 가리지.”
내 여상한 말투에 고운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옅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 꼬리를 올렸다.
“아나. 불편할 테니 자르자. 지금 눈이 보일 만큼만 자르고 내일 서연 에게 다듬어 달라고 하면 될 거야.” “아, 안 됩니다.” 그 반응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 다.
고운이 내 말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말을 더듬어 가면서도 꺼낸 말은 꽤나 결연했다.
처벌할 생각은 없지만 이유는 물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제 동료들이, 제 얼굴은 못생 겼다고. 꼭 가리고 다니라고 하였습
니다.” 그렇게 말하는 고운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수줍음이 아닌 수치스러움 이라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것에 나는 꽤나 경악스러웠고, 그 '동료들'이라는 인간들의 얼굴을 반드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을 얼굴로 판단하지 않지 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고운의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다른 사람보다 커다란 눈 과 발간 입술.
아직 이린 데도 미모라고 할 만한외모였다.
누군지 몰라도 심미안도, 인성도 글러 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나 1-八0
1- 1- 근 뻗어 고운의 얼굴을 잡았 다.
그대로 끌어당겨 눈을 맞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못생겼어.” 내 말에 고운의 눈이 동그랗게 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