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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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작물 포대를 무사히 손에 넣은 나는 대신들과 후궁들의 권유로 동 궁으로 돌아왔다.
또 사고 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게 빤히 보였지만, 굳이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八순히 따랐
다.
그리고,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던 내 궁녀들에게•••
“세상에, 소인, 마마께서 이리하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혼났다.
“지켜보던 소인이 다 떨려서 죽는 줄 알0갔습니다. 어찌 그러셨어요!” 좀 많이.
“아니,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암만 그러서도 그렇지! 폐하 앞에, 그것도 그 위험한 서대륙인들 앞에!
제가 공주 마마 때문에 심장이 떨려 제명에 못 죽겠습니다.” “그럼 의원에 한 번•••
“마마!”
희사가 빽 소리치는 말에 나는 움 찔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상전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
“무엄하다, 희사. 어찌 상전에게  리를 재”
“이 한목숨 죽음은 두렵지 않사오 나 마마 잘못되실까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것은 참지 못하겠습니다! 무 슨 생각으로 그러셨어요!” 제법 위엄 있게 한 말에 귀가 따갑 도록 반격받았다.
이휴, 한 마디도 안 지지.
제법 화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적 당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도르록 굴리고는 슬쩍 대답했다.
•••기묘한 믿음?”
“마마!”
“아, 알았어. 내가 미안해.” 찔끔해서 입을 다물자 장백한 얼굴 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서연이 조용 히 말을 이었다.
“소인들에게 사과하실 필요가 무어 있겠습니까.” 그 말이 돌려 까는 것처럼 느껴졌 다면 나의 착각이겠지?
혹시 화났어, 하고 물으려던 찰나, 서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마마. 그러다 폐하께서 노하 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서연의 얼굴이 초췌했다. 잠깐 사이 에 마음고생을 많이도 한 모양이었 다.
“폐하께서는 대국의 군주이십니다. 마마께오서는 폐하의 적녀이시나, 그 럼에도 폐하는 마마의 어버이이기 전에 만백성의 어버이이니•••  서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렸다.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결 국 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마마의 생각보다 무서 운 분이십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조금 황망해졌다.
예화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잊고 있었어.'
예화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었는 지, 잊고 있었다.
당연히 내 청을 들어줄 줄 알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걸 의심하지 않 았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 마••  왜 그랬지. 새삼 생각하니 신기하 다.
그렇지만 여전히 예화가 내 부탁을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기묘한 믿음이었다.
물론 그냥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지 마••
'일단 안 죽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대답했다간 더 혼날 게 뻔 해서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방 안을 슬쩍 훑었다.
방 한구석에 덩치가 산만 한 장정 이 보였다.
여류는 열성적인 궁녀들에게 질려 고운과 함께 멀찍이 밀려나 있었다.
그들에게 슬그머니 눈짓하니 얌전 히 내게 다가왔다.
궁녀들은 어느새 저들끼리 한숨 섞 인 대화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슬그 머니 여류에게 물었다.
“여류. 이번 흉년에 관한 관청이 이 디 있는지 알아?”
“예? 대뜸 그리 물어보시면•••  “아니, 뭐 관상감 같은 것 말이야.” 관상감은 기후에 관련된 관청이기 는 하지만, 하여튼 적당히 알아들어 봐.
내 말을 들은 여류는 불편한 얼굴 로 머리를 긁적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알면 아는 거지 왜 저렇게 똥 씹은 표정이람.
잠깐 의아했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지위 비렸다.
“잘됐네, 여류. 저거 들어. 내가 받 아 온 것.”
“예에, 마마.
“그리고 고운. 이리 와. 손잡자.”
“마마, 고운만 잡아 주시고 소인은
“시끄러워, 여류. 나이 먹고 사소한 것에 연연하면 보기 싫다.”
여류가 잠시 쭈그러들었다.
하지만 또 언제 그랬나는 듯이 자 루를 만지작대다 내게 물었다.
“하온데 이것은 왜 쟁기라 하십니
까?”
“잠깐 어디 갈 곳이 있어서.”
불쑥 튀어나온 내 말이 잔잔하던 궁녀들 사이에 돌을 던졌다.
거참 귀도 좋아.
한참 이야기하나 싶더니 언제 또 들었담.
“마마, 잠시만 기다려 주시어요! 의 복도 갈아입으시고, 양산! 양산 어디 있어, 유선?”
“그런 것 안 꺼내 주어도 된다!” 희사가 다급하게 외졌지만 나는 대 답을 듣지 않고 고운의 손을 잡고 후다닥 튀어 나7갔다. 등 뒤로 궁녀들의 원성이 들렸다.
“마마! 안 됩니다!” 몰라, 안 들려. 여류가 안내한 곳은 관상감 근처에 설지된 흉년을 위한 임시 관청이었 다.
화룡궁 근처의 그 관청은 후궁전만 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단정하니 예 뼜다.
식물을 다루는 자가 있나고 여류에 게 물으니 여류는 더 얼굴을 찌푸렸
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안내해 달라 고 말했고, 방긋방긋 웃고 있는 흑발 의 남자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노으9”
“소인을 기억해 주시다니 감읍합니
남자, 노을이 울먹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여류가 게워 내는 듯 한 소리를 내다가 한 대 얻어맞아 몸을 휘청였다.
날 알아보는 걸 보면 내가 알던 그
노을이 맞는데.
그런데 그럼 왜 여기에••••••?
혼란스러운 내 시선을 받은 노을이 잠시 의아해하다 이내 작게 웃었다.
“대부분 그림자들은 본업이 있습니 다. 여류와 새벽이 특이한 경우이지
요.”
“잠시 이 관청으로 소속된 것이 아 닌가?”
“소인은 본래 공부(工部) 소속입니 다. 약소하나마 소인의 이능이 도움 이 되어 잠시 이 관청으로 소속을 옮겼지요.” 나는 가만히 수긍했다.
그러고 보면 암대라는 것이 대놓고 호위로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당연히 다들 위장 신분이 있겠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여류를 바라보 니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찌 그리도 벌레 씹은 얼굴인가 했더니.”
애보다 못한 놈아. 어휴.
그를 십 초 정도 한심하게 본 나는 노을에게 시선을 옮겼고, 잠시 머뭇 대다 물었다. “허면 이능이 무엇이야?” 좀 궁금했다. 아니, 사실 많이.
이능이라는 것이 개인의 능력이고, 또 가문의 비기인 경우도 있어 이능 을 물어보는 것은 현대로 따지면 주 민등록증을 보여 달라는 것과 비슷 했다.
실례라는 걸 알지만, 이번 한 번만 권력 좀 쓰자.
궁금한 건 둘째치고 그가 도움이 될지를 알려면 이능을 물어봐아 했 다.
“그리 대단한 이능은 아닙니다 마••
다행히도 그는 싫은 티 없이 겸양 을 떨었다.
나는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머뭇대던 노을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생명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어린 것은 쑥쑥 기우고 늙은 것은 활기를 돋우지요. 땅에 파묻혀 자라는 것에 만 해당되는 작은 이능입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 대단한데?
공신 가인 일곱 가문 중 하나일 수 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땅에 국한되어 있다고 해도 생명이
먹이사슬 중 가장 중요한 생산자를 기워 낼 수 있는 힘 아닌가.
“가문을 축복한 선조가 엄청난 영 물이었던 모양이구나.”
감단하는 내게 노을이 쑥스러운 듯 이 말했다. “지령이 정령이셨습니다.”
어,
“그렇구나.”
말문이 막힐 뻔한 걸 드럽게 넘 겼다.
암. 지령이 대단하지.
근데 대체 무슨 정령일까.
동물이 오래 북어 지혜를 쌓고 도 를 닦으면 정령이 된다.
영험한 지령이라고 한다면, 음.
•••견원 정도밖에 떠올릴 수가 없 는데.
하지만 나는 금세 생각을 떨쳐 냈 다.
조상이 견원이든 궁예든 그건 중요 한 게 아니다.
“그럼 땅에서 자라는 것은 모두 기 을 수 있어?”
“그러합니다.”
“무엇인지 몰라도 기울 수 있이?
그러니까, 기우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나?” 그렇게 말하며 고구마 하나를 꺼내 자 노을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마께오서 하사받으신 것이 식물 이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 시 생각했다.
여면에게 이걸 증명하려면 나 혼자 만으로는 안 될 텐데.
공부(工部)에서는 농사에 관련한 것 들도 담당한다.
공부 소속이라고 했으니 그의 말은 꽤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얄팍하지만 충성 맹세도 받았으니 까, 괜찮겠지.
마음을 굳힌 나는 노을에게 고구마 를 내밀고는 이 자리에서 기위 달라 고 말했다.
노을은 얌전히 내 말을 따랐다. 그 의 이능은 빛이 새어 나오거나 연기 가 나지는 않았지만, 고소한 흙냄새 가 풍겼다.
고구마에서 싹이 나더니 줄기가 쭉 쭉 뻗어졌다.
줄기가 한 뼘 정도 되었을 때 노을 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했다.
의아해하면서도 노을이 내게 고구 마를 내밀자 나는 순을 뚝 꺾었다.
그리고 그걸 노을에게 쥐여 주었다.
“이것을 기워 쥐.”
“허나 마마.
“무일 격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해 줘”
줄기를 심는 삽목(揷木)이 인위적인 방법이다 보니 이 세계에서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게 맞았기에 나-1- 1- 工1 0 0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노을은 결국 내 말을 따랐고, 줄기는 쑥쑥 자라 뿌리를 뻗 더니 이내 내가 알던 고구마의 모습 을 갖추었다. 그리고 나는 휘둥그래진 눈 세 쌍 을 마주했다.
“줄기만 있었는데, 어떻게•••  “신기하지? 그것이 이 흉년의 대비 책이야.”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노을이 내 말에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척박하고 추운 땅에서도 잘 자라 고, 물도 많이 필요하지 않지. 하나 만 먹이도 든든하지. 곡식이 잘 자라 지 않는 척박한 땅에 유용한 양식이
될 거야.” 담담하게 말했지만 점점 커지는 노 을의 눈에 내심 뿌듯했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못 믿겠1 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줄기에서 식물이 자라난 걸 봐서 그런 듯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경악에 찬 목소리에 나는 빙긋 웃 으며 대답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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