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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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목욕 시 중을 받으면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먹는 등 마는 등 했고, 결국 내 궁녀들은 맥을 못 추 는 나를 일찍 재웠다.
초저녁부터 잔 나는 당연하게도 새 벽 일찍 깨어나고 말았다.
지금이 몇 시야.
나는 짙푸른 색의 새벽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도 오랜만이 네. 아니, 처음인가?
지금까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 속 편한 생활을 한 덕 에 해도 뜨지 않은 푸르스름한 하늘 이 낯설었다.
나는 침상에 걸터앉아 발을 동당거 리며 생각했다.
이대로 다시 누워서 이불이나 뒤집 어쓰면 아주 좋겠지.
새벽이라 바람도 서늘하고, 이불 안 은 따뜻하고. 그대로 궁녀들이 깨우 러 올 때까지 자는 거야.
고하네.
그대로 눕고 싶었지만,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 병든 닭처럼 꾸 벅대는데, 기껏 얻은 근면의 기회를 놓질 수는 없었다.
'해야 할 일도 있고.' 대충 잠이 깬 나는 서랍을 뒤져 문 방사우를 찾아냈다.
종이를 펼치고, 붓을 고르고 연적에 자리끼를 부었다.
그런데 먹을 가는 게 생각보다 어 려웠다.
'희사는 속속 하던데.
어찌 되었든 준비를 마친 나는 의 자에 앉아 붓을 들었다.
호기롭게 붓을 들었지만, 첫 마디를 떼지 못해 잠시 주저했다.
나는 그러니까, 원작의 내용을 정리 하려 붓을 든 참이다.
•••엄청 늦긴 했지.'
내 머릿속에만 있는 원작이다 보니 최대한 빨리 기록해 두는 것이 좋지 만, 빙의 초에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대지 말자'가 목표인 탓에 얌전 히 뒷방 후궁이 되어 잊혀질 생각이 있으니까.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생 각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
'일찍 해 둘 걸.' 사실 좀 뼈아프다.
나이를 먹었더니 예전 기억이 가물 가물해.
나는 동이 터 올 때까지 붓을 잡고 한참을 낑낑댔다.
중간중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 었지만, 나는 끝내 성공했다.
'비록 좀 흐릿하게 보이지만.
먹 가는 게 힘들어서 대충 갈고 말 았더니 이런 부작용이.
하여튼 흐린 먹으로 적힌 글씨를 흐린 눈 뜨고 보자면 이랬다.
기실 원작의 내용은 '산야'가 죽기
1년 전부터 시작된다.
미래를 알게 되는 건 좋지만, 문제 라면 너무 오래 뒤의 미래다.
'4년 후라니.'
아예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지금  쓸 만한 건 마땅히 보이지 않 았다.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자 곡자곡 접어 침상 밑에 감췄다.
'어떻게 할까.'
나는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래보다 뛰어 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내가 성인일 뿐 특출나게 총명하지 않을뿐더러, 나는 담이 작았다.
기윤. 또는 불특정 다수의 권력자
내가 가진 힘이 많을수록, 무시하기 힘들수록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견 제하려 하겠지. 밤마다 살수가 찾아오는 권력자의 삶은 질색이다.
무서운 사람들과 정면으로 싸울 자 신은 없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했다. 나의 대역 으로 나서 줄 사람들이. '그게 제일 어려워.' 사람은 생각보다 얄팍하다.
누구 하나라도 배신한다면 금세 위 태로워지는 상황인데. 내 비밀을 지 기면서도 내게 충직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까.
'일단 원작에 나온 충신들이 몇 있 기는 한데.' 여주인 예화에게 은혜를 입고 그녀 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몇몇 있 기는 했다.
문제라면 그들이 예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나는 예화가 가지고 있는 이능이 없으니 날 사랑할 리 없거니와, 여덟 살짜리 어린애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람 하 나 없을까.' 고혈을 쪽쪽 빨아먹겠다는 심산은 아니었다.
아랫사람으로 부린다고 해도 그 역 시 결국 얻는 것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누가 내 밑에서, 비 밀을 지키며 일해 주겠나는 건
'원작에 나온 사람 목숨이라도 구해
줄까.'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원작에서는 그 계기로 예화에 게 충성했던 사람들이니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멀리서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즉시 일어나 소리 없이 침 상에 폭 들어갔다.
“마마. 기침하실 시간이어요.” 뒤척이며 눈을 감았을 때 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스 타이밍.' 문방사우는 미리 정리해 두길 잘했 나에게 남은 나흘 중 둘째 날의 아
햇살이 쨍쨍하고, 새가 지저귀고, 바람은 상쾌하다.
•••공주 마마께서 오셨다.”
“마마께 열 보 떨어져라, 더러운 것 들아.”
“누가 당과라도 좀 가져와!” 나는 이 좋은 날 왜 저 시커먼 곰 들 사이에 있나.
틀린 그림 찾기처럼 숨어 있던 그  이 내가 도착하자 쏙쏙 모습을 드 러냈다.
첫 만남에 옹기종기 모여 날 관찰 한 건 기분이 나빴지만, 내 오해로 한참을 부려 먹었으니 사과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그 미안한 마음은 화서궁에 도작한 지 오 분 만에 사라졌다. '다 나가라고 하고 싶다.
여기 내 궁인데.
내가 신기한 건 알겠지만, 자꾸 힐 끔힐끔 보는 게 동물원 원숭이 취급 같아서 씩 달갑지는 않다.
'나쁜 의도가 아닌 건 알지만.
귀여운 병아리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난 병아리가 아니라 인간 이라고.
조용하게 부산스러운 그 모습을 본 나는 입가를 늘여 웃었다.
어찌 됐든 웃으니 좋다고 다른 그 림자들의 얼굴이 헤벌쭉 벌어졌다.
내 웃음의 의미를 아는 고운만 안 절부절못하다 내 눈앞에 있는 그림 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우, 소리 봐. “왜 때려!”
“좀 닥쳐.”
고운이 씹어뱉듯 말하며 계속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괜찮다며 손짓하고는 고운을 불러들였다.
“오늘 그대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 어.”
저들끼리 수군대던 그림자들이 내 말에 딱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간단한 무술을 가르쳐 줬으면 하
는데.” 내가 이 황금 같은 휴일을 쪼개 이 곳에 온 것은 오늘 아침 날아온 서 신 때문이었다.
어느 때처럼 일어나지 않겠다고 이 불 속에 꾸물꾸물 숨이 들어가고, 회 사가 세숫물을 가지러 나갔을 때였
다.
무언가가 톡톡, 장을 두드렸다.
정원에 새를 풀어 두었기에 가끔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런 것인 줄 알고 장을 열었지만, 장가에 놓인 것은 두 번 접한 종이였다.
종이는 내가 펼쳐 보기도 전에 스 르록 풀렸다.
[아비다. 곧 만나러 가마.]
그 간략한 내용을 읽은 나는 그대 로 얼어붙고 말았다.
엄청나게 놀랐지만, 그와 동시에 그 릴 때가 됐구나 싶었다.
선전포고까지 했으니 그는 요 며칠 안에 올 것이다.
아무렴 내게 호의를 보이려 것이니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심 불안했다.
이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윤은 대체 어디에 있기에 동궁의 수많은 방 중에서도 내가 있는 방을, 그것도 희사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정확히 맞췄을까.
다들 이능을 쓸 줄 알아 그런 것인 지 황궁에는 금위군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림자들。  찾아온 것이다.
나름 진지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그 림자들의 얼굴이 더 진지해졌다.
할 말 많은 얼굴로 나와 고운, 여류 를 번갈아 보던 그들이 둘로 나눠졌 다.
그나마 똑똑해 보이는 이들은 나에 게 오고, 다른 사람들은 여류를 끌고 뒤뜰로 사라졌다.
“마, 마마. 살려 주십시오. 잠깐만. 마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공주 마마.
마마의 귀한 시간을 쓰실 지가 아닙
니다.” 어, 뭐. 그래. 나는 한가롭게 손을 흔들었다. 호위 를 달고도 무술을 가르쳐 달라는 말 이 호위가 형편없다는 말로 읽힌 모 양이었다.
'아무렴 죽이기야 하겠어.' 여류에게서 시선을 때자 눈앞에 서 있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익숙한 얼굴. 노을이었다. “송구하오나 마마,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음,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힘이 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태연히 고른 말이 꽤 충격적이었던 지, 노을이 눈을 크게 떴다.
“힘이 필요한 용건이 있으시다면 소인들을 부리십시오. 마마께서 검을 쓰기에는 무리가 갈 것입니다.” 달래는 듯한 말에 나는 얼굴을 찌 푸렸다.
“그대들은 폐하의 검이 아닌가.
•••그림자는 황족을 위한 이들입 니다.”
단정 짓는 내 말에 당황하던 노을 이 말했다.
“마마께서 후궁전에 속해 계실 때 에는 해 드릴 것이 없었으나, 공주 마마이신 지금은 폐하의 명령 다음 으로 우선인 것이 공주 마마의 명입
니다.”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며 생각 에 잠겼다.
원작에서의 그림자는 황제만을 위 해 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는 황 제를 제외한 직계 황족이 없었다. 아륜 황실에는 선황제나 태후가 있 는 전적도 많지 않았고, 손도 귀했 다.
무엇보다 굳이 내게 이런 문제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 저 말은 진실이겠지.
“하지만 노을. 사람은 변에” 그래도 결국엔 내 명이 최우선이 될 수 없다.
내가 시길 일이 화서궁 뜯어고치기 정도만 됐어도 저 말을 기쁘게 받아 들였을 텐데.
“그대들이 내게 변함없이 충성할 것을 내 어찌 믿지?” 황제니까. 황족이니까. 주군이니 당 연히 충성한다.
그런 얄팍한 걸 어떻게 믿겠어. 태연한 내 대답에 노을이 눈을 홉 떴다.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충성을 중요시하는 세계. 그걸 당연 하게 생각하고 여기던 이들.
그 근간을 흔드는 질문이니 당연하 겠지.
하지만 동시에, 내게는 별생각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비단 내 호위만을 못 믿겠다 는 의미는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타인을 맹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굳이 말을 꺼낸 건, 노을의 저 표정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황, 놀람을 거쳐 언뜻 절박해 보 이기까지 하는 난처한 얼굴.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이 당황스러 운 모양이구나.”
•••예. 그렇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묻자 노을이 낭패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뒤는 굳이 내가 손쓸 필요도 없 었다.
부디 의심하지 마소서. 저희는 마 마의 검입니다. 손에 들린 검이 어찌 주인을 베겠습니까.”  , 나왔다. 내가 원하던 대답. 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하다가,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였다. “허면 말이다,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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