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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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사위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침의이기는 했지만 계절이 여름인 덕에 그다지 춥지 않았고, 속이 비치지도 않았다.
문틀을 톡톡 치자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여류가 나를 보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마마! 어찌 침의 차림이십니까!” 어우, 얼굴이 벌써 시끄러워.
“그럼 어찌해. 몰래 나가는데 겉옷 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을 정신은 없 다.”
“서라국의 공주 마마께서 침의만 입고 바깥을 활보하시다니요. 폐하께 서 아시면 크게 경을 치실 겁니다!”
“폐하는 날 안 혼내신다. 시끄러우 니 가자.”
“아니 됩니다. 못 가십니다!"
1-
여류가 본인을 밟고 가라-1-  강경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를 밟 고 지나갈 위인인 나는 고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고운 또한 뭐가 문제나느1- -入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지?”
그래. 이게 일반적이지. 말이 좋아 침의지 외출복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구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침의잖아!”
“평소 입으시던 의복과 다를 바 없
잖아.”
“이놈아! 너도 그러면 무사복 입지 말고 늘 침의만 입고 다녀라! 편하고 널널한데 왜 굳이 불편한 무사복을
입어!”
“여류. 고운은 진짜 입을 거야.” 가만히 거드니 여류가 조용해졌다. 나는 그새를 틈타 후다닥 달려 나갔 다.
동궁과 화룡궁의 거리는 그다지 멀 지 않은 덕에 나는 여류를 채찍질해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문을 두드리는 대신 담장을 돌았다.
언제였나, 하도 내가 찾아오지 않으 니 예화가 우물쭈물 가르쳐 준 개구 멍이 있었다.
혹여라도 오고 싶으면 이곳이 빠르 니 이 길로 오라면서.
노닥거리러 가는 건 아니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발걸음이 점자 느려졌다.
예화는 눈치를 챘을까?
내가 정말 나이가 어린 건 아니다 보니 완전히 숨겨지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나름 노력했다.
사실 아니었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 응할까.
여면의 반응이 스쳐 지나갔다.
불신과 의심.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 기는 했다.
'그래도.'
예화가 믿지 않을 것 같지는 않았 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랬 다.
나는 어느새 그녀가 내게 화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어졌다.
  해도 날 비난할 것 같지가 않았
다.
“마마?” 고운이 작게 물었다. 나는 퍼뜩  개를 들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눈만 깜빡 이던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의문이 든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두 번 든 생각이 아 닌데.
그러게. 왜 그럴까.
대체 무슨 인과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그아 엄마니까.'
그건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서 고 말았다.
“마마?”
다시금 고운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라고?
너무 당연하게 든 생각이 우습기까 지 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아주 당연하 '혼자 너무 오래 살았나.
부모님의 정을 기억하지 못하기는 했다.
어린 시절에 남들은 다 있는 부모 님이 나는 없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 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은데.
나이 이만큼 먹고 나도 부모님 갖 고 싶다고 떼쓰는 것도 웃기잖아.
그랬는데, 정말로.
“산아?”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개를 들자 나와 마찬가지로 침의 자 림인 예화가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활짝 웃 었다.
귀신 같네. 본인 생각하고 있었던 건 어떻게 알고.
“웬일로 왔느냐?” 내게 다가온 예화가 몸을 낮춰 나 와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아가?”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고 따뜻해
서.
“무슨 일이기에 그런 얼굴이야.” 당신의 다정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 가 없었을까? 아니면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바꾸 있던 걸까.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어 요?”
문득 든 생각을 묻자 예화가 웃으 며 내 코를 가법게 집었다. “이렇게 귀여운 발자국 소리가 너
말고 또 뉘가 있겠느냐?” 그 너스레에 나는 피식 웃었다. 말 았다.
별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 는데, 그렇게 웃자 예화의 눈썹이 내 려갔다.
“우리 아가가 왜 이럴까.” 예화가 나를 안아 들었다. 안정적으 로 나를 받치고 한 팔로 나를 끌어 안는다.
“제가 왜요?”
“入해卍= 그 얼굴을 하기에.

내가?
얼떨떨했다. 내가 그런 얼굴을 했었 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나를 달랬
다.
토닥, 토다
일정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나 는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이전에도 한 번 이랬던 적이 있었 지.'
기윤이 내 궁에 찾아왔을 때. 그때 예화의 반응이 딱 이랬었다.
나는 괜잖0갔는데, 나를 안고 토닥였 고 내가 울었지.
후에 생각하지만, 나는 그때 예화의 등장에 아주 많이 안도했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껏 정해 두었던 명제를 조금 비틀었다.
예화는 나를 딸이라고 생각하고, 그 렇게 대한다.
그렇다면 나는?
떠올리기만 해도 애틋한, 엄청난 유 대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인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하던 가.
나는 언제 이렇게 이 다정이 익숙 해졌을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고아였던 것은 아무렇지 않다. 기댈 사람이 없었던 것도 익숙하다. “절 어떻게 찾았어요?” 그래도 이 애정이 달가운 걸 보면 나는 어쩌면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
다.
목을 꽉 끌어안아도 예화는 나를 때어 내는 대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여상하게 대답했다.
“내가 네 이미지 않아.” 그 말에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
다.
그러게. 엄마구나.
가족이라는 관계는 손쉽게 맺어지 지 않는다.
낳기만 한다고 부모가 아니고, 법적 인 관계로 묶인다 해도 그건 받아들 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어느 순간 맺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것.
가랑비에 발끝부터 젖어, 몸이 젖고 있음을 눈치챘을 때에는 어느새 머 리까지 잠겨 있는 것처럼.
어느 평범한 날에, 대단한 일 없이 문득 깨닫는다.
“엄마.” “으,2”
너무나 당연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늘 들었던 호칭처럼, 그녀는 아주 당 연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힘을 얻어 나는 불안한 질문을 던졌다.
“엄마. 나 사랑해?”
그 질문에 예화가 멈칫했다. 이내 나를 꼭 끌어안고, 그녀가 0 1- =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사랑하지. 우리 산아.” 처음 해 본 질문, 처음 들은 대답.
그렇지만 아주 익숙한 말 같았다.
우리는 미숙했고, 무심했고, 어리석 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부이진 애정이 싹을 틔웠다. 비로소 가족이 된 날이었다.
뜬금없지만 설명하자면, 황제는 황 궁 안에서 가장 많은 수를 대동해 다닌다.
아무리 본격적인 행자가 아니라고 해도 황제는 황제였고, 당연히 꽤나 많은 궁녀와 환관이 뒤따랐다.
이 말의 요점은 내가 화룡궁으로 가는 길에 예화를 만나 한 짓을 꽤 나 많은 사람이 봤다는 것이었다.
'민망해•••
궁인들을 모두 물린 처소에는 나와 예화뿐이었지만 어색함은 가시지 않 았다.
평소에도 내가 그다지 살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했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방금까지 엄마라고 불렀지만 그땐 감성에 차 있었고.
이성을 되찾은 지금 맨정신으로 엄 마라고 부를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폐하라고 하기도 뻔뻔하
“평소 하던 대로 불러도 된단다.” 입도 못 떼고 우물쭈물거리는 나에 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나는 에매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부르던 대로 하면 이름으 로 불러야 해요.' 비교적 개방적인 서양에서도 부모 이름을 막 부르는 건 예의 없는 짓 인데, 하물며 동양에서는 더하지.
엄마라고 인정했지만 내 태도가 손 바닥 뒤집듯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칭하는 호칭이 엄마보다는 예화나 폐하가 편했다.
그래도 바꿔 봐야지. 엄•••••• 마니
까.
'으아악!'
아, 그런데 솔직히 시간 좀 걸리는 건 이해해 주세요. 제가 거의 20년 동안 부모가 없었어서요.
그래도 이제 엄마라고 속으로는 존 대를 썼다. 이건 괜찮았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 탁자로 시 선을 옮겼다.
아직 일을 하고 있었는지 넓은 탁 자에는 서류가 몇 개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간식이 없네.”
“아가. 단것을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아.” 내 중얼거림을 기가 막히게 드 0 예화가 나를 타일렀다. 나는 조금 머 쓱해졌다.
거, 꼭 먹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 는데.
어딜 가든 다들 내게 단것을 한가 득 쥐여 주는 탓에 없는 게 좀 익숙 하지 않을 뿐이다.
•••근데 생각하니 억울하네.' 익숙해진 게 내 탓이냐, 준 당신들 탓이지.
“제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 러십니까? 그리고 지금껏 아무 말 없으셨던 것도 폐하시고요." 괜히 억울해 한마디 하자 그녀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 어미가 잘못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나온 대답은 순순 했다.
하지만 다음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는 네 간식 양을 할당하도 록 하마.
•아니, 꼭 그렇게까진.
자존심을 지키고 그러라고 대답할 것인가, 자존심쯤 한 번 접고 정정할 것인가.
한참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앞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고개를 들자 당연하게도 예화가 웃 고 있었다.
“농이란다, 농.”
내 뺨을 가볍게 꼬집은 그녀는 결 국 말린 과일을 내주었다.
안 먹겠다는 내 입에 한 번만 먹으 라며 사정해 결국 하나를 물린 예화 가 덕을 괴고 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서, 고작 간식을 먹자고 화룡 궁에 온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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