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은 예정대로 이튿날 황궁을 떠 났다.
조촐하게 고운과 친분이 있는 이들 만이 모였던 고운의 배웅은 예상외 의 인물로 조금 시끄러워졌다.
엄마는 그림자들만이 모인 고운의 배웅에 동참했다.
내가 고운을 배웅할 수 있게 안배 한 것이었다.
무려 황제의 배웅을 받았다는 이아 기는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그 아 이가 제법 총에받았다는 것으로 해 석되었다.
나는 부디 그 소문이 마호 가의 가주에게까지 들리길 바랐다.
황제가 귀애한다 하면 그나마 손을 덜 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수도에서 마호 가의 장원이 있는 비연 지역까지는 말로 일주일 정도 가 걸렸다.
그러니 고운이 도착해 내게 서신을 보내는 데까지는 이 주일 정도가 걸 렸고, 그 이 주일 동안 나는 미어캣 처럼 소리만 나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녀들이 내가 살이 빠졌다고 속상 해했을 무렵, 고운에게서 첫 서신이 도착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서신은 평 온했다.
비연이 날씨가 더 춥다거나, 특산 품이 무엇이 있다거나 하는 시시콜 콜한 내용.
마지막 줄에 쓰인 '저는 평안합니 다라는 말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서신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날아 왔다. 빈도가 잦지 않지만 오는八 기는 일정했다.
그 서신들이 모두 첫 서신과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에, 나는 점 점 마음을 놓았다. 격정이 사그라들자 이번에는 허전 함이 찾아왔다.
문득 고운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돌 때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 는 걸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해아만 했다. 그 외에도 고운의 빈자리는 제법 컸다.
어딜 갈 때마다 꼭 붙잡고 다니던 작은 손이 없으니 괜히 손이 허전했 다.
간식 시간마다 같이 먹던 이가 없 어 잘 먹히지가 않았다. 문 앞에 일 령이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내 허전함을 다른 이들도 알 았다.
새 호위가 생겼고, 내 배동이 된 서련 또한 황궁을 자주 드나들었다. 다른 후궁들 또한 내가 심심할까 하루가 멀다하고 동궁을 찾아왔고, 엄마도 더 내게 신경을 썼다.
그에 나는 자자 허전함을 메워 갔 다.
문득 드는 서늘함이 있었지만, 그 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런 일상들이 이어졌고, 내가 이 제 완전히 괜찮다고 생각했을 무렵 내 생일이 다가왔다.
전생에서와 똑같이, '산아'의 생일 또한 가을이었다. 내 생일 연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열렸다.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었고, 황궁 에서 처음 맞는 내 생일이니만큼 다 들 잔뜩 흥분해 있었다.
생일은 즐거웠다. 모두가 나를 축 하해 주는 게 싫을 리가 없었다.
연회는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고, 온통 웃음이 가득했다.
미리내와 가람이 술을 마시고 투닥 대는 걸 보고 깔깔대며 웃던 나는 아주 간만에 고운, 저것 봐. 하고 뒤를 돌았다.
당연하게도 고운은 없었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여류와 눈이 마주 졌다.
놀라 다시 고개를 돌린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어느덧 네가 없는 것에 이만큼 익 숙해졌다는 생각과, 아직도 네가 곁 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둘 다 모두 서글퍼서, 나는 그 날 서신을 쓰며 조금 울었다.
종종 그런 식으로 슬픈 날들은 있 있지만, 대체로 시간은 별 탈 없이 흘렀다.
그렇게 달이 차고 지기를 수십 번, 계절이 바뀌기를 여러 번.
나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시간 참 빠르지.'
고운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서신은 늘 일주일에 한 번 도착했다.
고운에게만 알려 준 화서궁의 비밀
바닥에 주저앉아 비슷하지만 조금 씩 다른 서신을 읽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운이 떠난 게 아직도 엊그제 같 은데, 벌써 11년 전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신의 문자 를 따라 그어지는 긴 손가락이 새삼 생경해서, 나는 시선을 돌려 면경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을 가볍게 틀어 올린 자색 눈동자의 여인과 눈이 마주겠
다.
어릴 적에는 젖살 덕에 동글동글해 보이던 인상이 이제 제법 냉정해 보 였다.
'크느라 고생 좀 했다.' 그렇지. 많이 컸지.
새삼스레 모두를 올려다봐야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커서도 그럴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럴 일은 없었고, 나는 평범한 성인 여성의 기로 잘 자랐 다.
이제 사람들 소매에 얻어맞을 일은 없다. 걷다 앞 사람이 멈춰 서면 그 사람 엉덩이와 눈이 마주쳐 불쾌할 일도.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서신을 접 고는 탁자에 놓인 작은 함을 열었 다. 그 안에는 고운에게 받은 서신 들이 담겨 있었다.
“올해도 안 오려나.”
시간 순서대로 서신을 접어 넣으며 나는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고운이 없는 생활에 완 전히 익숙해졌다.
고운도 잘 지낸다고 하고,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특별히 슬프지는 않 지만, 잊혀지지는 않았다.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슬슬 거짓말이라고 해 도 될 것 같아. 나는 괜스레 함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생각했다. 무려 11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11년.
'그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취.'
찾아가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이 지만, 나는 괜히 심술궂은 생각을 했다.
나도 이만큼이나 컸는데, 이제 다 시 마주치면 둘 다 서로 못 알아보 는 거 아닌가.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
봄. 마침 고운과 만났던 계절이다.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컸을까?'
고운이 마호 가로 들어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마호 가가 폐쇄되다시피 했다.
이능의 특성상 생명에게 치명적인 탓에 서신을 배달하는 파발도 간신 히 오가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화가를 보내 느긋하게 초상화를 그려 오라 할 수가 없어 나는 고운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중 나는 다시금 면경 속의 나와 눈이 마주졌다. 피 식 웃자 어릴 적과 똑같은 얼굴이 나왔다.
'어릴 때랑 똑같겠지, 뭐.'
고운은 유난히 또래보다 작고 말랐 고, 얼굴도 예쁘장하니 선이 고운 편이었다.
될성부른 떡잎이었으니 그대로 예 쁘게 크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고생 많이 했을 텐데, 너무 마른 건 아닌지 모르겠네.
'상관없긴 하지만.
말랐든 살쪘든, 얼굴이 잘생겼든 흉터가 대문짝만 하든 무슨 상관인
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됐지.
•••그러니까, 언제 오냐고.
한숨을 내쉰 나는 달각대던 함을 닫았다. 안쪽에 붙어 있던 면경 탓 에 눈이 부셨다.
화서궁은 늘 그랬듯 고요했다. 멀 리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 지만, 나와는 먼 세상 이야기였다.
“태자 전하!”
•••아니었다.
나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 을 털었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긴 못 찾을 줄 알았는데, 귀신 같아라. 근 承
나는 혀- -入 자고 함을 다시 집 어 들었다.
“태자 전하! 어디 계십니까!”
까랑까랑한 여사의 목소리였다. 나 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는 게 아니었어.'
11년 동안 변한 것이 하나 더 있 었다.
나는 공주에서 황태자가 되었다. 후궁에서 공주가 되었던 때처럼, 이 번에도 어이없는 방법이었다.
몇 년 전, 노는 것도 질려 침상을 굴러다니는 내게 엄마가 웃으며 물 었다.
'아가. 할 일이 그라도 없었니?'
'그리면 황태자 해/ 몰래?'
'4//닭한 거지?
아무래도 우리 엄마는 취업 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네?' 하고 한마디 한 것에 황태자 책봉으로 땅땅 결정지어진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누군가 하나쯤은 말릴 줄 알았는 데, 아무도 안 말려 주더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궁들을 포 함한 궁인들은 당연하게도 내가 황 태자가 되는 걸 반겼고, 다른 대신 들도 후계를 생산하지 않는 엄마의 태도에 지친 후였으니까.
나는 거부하려 했으나, 현실에 타 협해야 했다.
무거운 자리 싫다고 엄마에게 나 대신 그 왕관 씨 줄 에 하나만 낳 으라고 하는 건 미친 짓이잖아.
그래서 나는 순순히 황태자 위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 말은, 그 모든 교육들을 다 순순히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었 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나는 숨을 크 게 들이쉬고는 자그맣게 입을 열있
다.
[황궁 밖으로.]
울림이 조금 다른 말이 뱉어지고, 이내 시끄러운 말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1- 감았던 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인파에 섞 였다.
고운과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나 는 종종 저잣거리에 홀로 놀러 나갔 다.
그 날 고운과 즐거웠던 기억은 행 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추 억을 곱씹는 게 좋았다. 물론 오늘은• 도피성이 조금, 아주 조금 짙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름 합법적인 일탈이라 고
이제 이 정도의 잠행은 다들 눈감 아 주었다.
내가 위험을 자처하지 않기도 하 고, 무엇보다 내 안전이 조금 더 확 실해졌으니까.
엄마는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 언 령으로 본인의 이능을 내게 양도하 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무리 언령이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어 영구적인 양도는 불가능했지 만, 아예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 다.
한 번 언령을 걸면 엄마가 가진 힘의 3분의 1 정도를 반나절 정도 운용할 수 있었다.
3분의 1이라고 해도 엄마의 힘이 워낙 뛰어난 터라 그것만으로도 충 분했고, 나는 그 힘을 백번 이용해 열심히 놀러 다니는 중이었다. '솔직히 일정이 너무 빡빡해.'
내가 어릴 때 너무 놀아서 조금 더 바쁘게 잡았다지만, 그래도 과했 다.
어떻게 된 공부를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다 해?
나는 최대한 따라가려 노력했지만, 몹시도 평범한 사람인 나로서는 그 게 아주 어려웠다.
평범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아주 가끔 땡땡이도 치는 거지.
나는 손에 든 함을 동궁의 내 방 으로 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깐만 놀고 들어갈 생각이다. 어 찌 되었든 미룬 일도 내 일이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당호로부터 하나
시선 끝에 노상이 보였다. 나는 활 짝 웃으며 한 발을 내디딨고, 그대 로 발목이 삐끗했다.
몸이 휘청, 하더니 그대로 몇 번 더 흔들렸다.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사람들 탓에 더 흔들리기만 했다. 이능을 쓰고 싶지만 당장 눈만 돌려도 다른 사람 들과 눈이 마주쳤다.
느을 꾹 감고 그냥 넘어져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누군가가 나를 부드럽 게 끌어당겼다.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