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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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은 내 창가로 뛰어올라 놓고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댔 다.
그에 나는 순을 뻗어 덥석 고운의 얼굴을 붙들었다.
“너 괜찮아?”
볼이 좀 까슬해진 것 같은데. 눈 밑도 검고.
고운의 얼굴이 유난히 초췌했다. 달빛 아래 있어서 그렇다기엔 얼굴 이 너무 상한 것 같다.
안 그래도 식탐 없어서 마른 앤데, 고생을 얼마나 시켰으면 애가 뼈밖 에 안 남았어.
그게 속상해 나는 얼굴을 찌푸렸 다.
나와 눈이 마주친 청회색 눈동자가 동그래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장가에 앉아 있 는 고운의 양 뺨을 잡고 있다는 사 실을 떠올렸다.
뺨을 놓고 손을 잡아 내리 끌자 고운이 순순히 따랐다. 나는 장을 닫고 휘장을 친 뒤, 등불 하나만을 켜 두었다.
고운은 장에서는 내려왔지만 여전 히 창가 앞에 서 있었다.
풀이 죽은 그 모습이 안타까우면서 도 조급해졌다.
고운이 동궁을 찾았다는 게 알려지 면 벌을 받을 텐데.
장가에 앉아 있으면 더 눈에 띌 테니 서둘러 방 안에 들였지만, 이 미 누가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까는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조금 현실을 자각하기는 했어도 반 가운 건 여전해서, 나는 숨을 꾹 삼 기고는 물었다.
“어떻게 나왔어?”
고운은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찌 화내지 않으십니까?”
내 눈치를 보던 고운이 자그맣게 대답했다.
얼굴은 반쪽이 되어서 묻는 게 고 작 그 말이라서, 더 속상했다.
“내가 너한테 화를 왜 내.”
“제 실책으로 마마께서••
“고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따 지자면 널 데리고 밖에 나간 내 잘 못이지.”
내 말에 내내 경직되어 있던 고운 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나에게 미 움 받을까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
다.
나는 고운의 손을 끌어 침상에 나 란히 앉았고, 우리는 잠시 말이 없 었다.
“우리••  “제가•••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눈이 동그래 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말에”
“아닙니다. 마마께서 먼저•••  서로 네가 먼저 말하라 떠넘기던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소와 너무 똑같은 상황이 웃겼다.
하지만 웃음은 금세 사그라졌다.
정말로 어떡하지.
나는 이제 고운을 다시 못 본다는 게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그 0 0 
그-고가丁 지금도 원래는 없었을 기회. 이것 조차 날이 밝으면 끝난다. “이제 다시 못 보나 배”
웃으면서 말하고 싶었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아, 못 운다는 거 취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꾹 감았다. 내가 울면 고운이 당황할 텐데.
눈물을 말리려 1- 깜빡거렸다. 하지만 결국 한 방울이 흘렀다.
내 예상과 다르게 고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내 1- 가만히 잡아 주었다.
작고 거친 손이 따뜻하다.
어딜 갈 때마다 질리도록 잡고 다 넜는데. 이제 이것도 끝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후두둑 떨 어졌다. 당황해서 눈가를 훔치자 또 눈물이 흘렀다.
아까 궁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 었다.
고운은 내일, 황궁을 나갈 것이다. 엄마가 거처를 잘 마련해 주겠지 만, 내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궁인들이니 내게 고운의 거처를 알 려 주지 않겠지.
몰래 갈 수도 없고, 허락해 줄 리 도 없다.
고운이 출궁한다면 이렇게 몰래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진짜 평생 못 본다고?
정말로, 이렇게?
“방도가 있습니다.” 그때, 고운이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른 눈물이 개인 눈에 고운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뵐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
다.”
믿을 수 없어 되묻자 고운이 차분 히 대답했다.
확신에 찬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고운도 그걸 아는지 설명을 이어 갔 다.
“저는 맹독의 이능을 제대로 운용 하지 못합니다. 하여 문제가 생겼지 요.”
“허면 운용 방법을 배우면 되는 일 입니다.”
단순하고 무식한 대답에 나는 울상 을 지었다.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 없어?" “아니요.” 그럼 불가능하다는 거잖아.
잠시나마 불이 붙었던 희망이 다시 사그라졌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고운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마호 가는 대대로 학자를 배출한 가문입니다.” 마호 가. 고운의 가문이었다. 놀라 고운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제 부친께서는 그중에서도 이능에 관한 학문을 갈고닦으셨으니 -
“안 돼.” 나는 고운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답했다.
얼마 전 이능을 그렇게 무식하게 쓰지 않았더라면 등이라도 한 대 때 렸을 것이다.
아버지라고 하기도 싫은 작자가 이 능을 잘 아니까, 그를 찾아가 도움 을 받겠다고?
고운의 트라우마는 심각했다.
몇 개월간, 아니.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감쪽같이 숨겨 온 이능을 아비와 닮은 이를 보았다=1- 0 0口} 으로 통제를 놓졌다. 그런 아이다. 다시 그 손아귀 안에 놓이게 할 수 없었다.
“됐어. 너 안 봐도 괜찮아.”
딱 잘라 말하자 고운의 눈이 흔들 렸다.
••그런, 농은.” “농으로 보여? 정말 됐어!” 나는 너를 많이 좋아하고, 해어지 는 게 아쉽다.
그렇다고 네가 내 곁에 남기 위해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
조금 더 안절부절할 줄 알았던 고 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안다는 듯
“고운. 정말이야.”
그 웃음이 확고해 보여서, 더 무서 웠다.
“네가 날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 어.”
불안한 내 말에 고운이 고개를 내 저었다.
“이전부터 생각하던 일입니다.”
“더는 무력하게 남아 있고 싶지 않 습니다.” 힘이 없는 것에 대한 비참함은 나 도 잘 안다. 고운이 제 이능을 잘 다루게 된다면 분명 큰 힘이 되겠
지.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제 무력함은 이능을 다루지 못함 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내 생각을 반박하듯이, 고운 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극복해아 할 제 나약함 이고, 그 시기가 지금 온 것뿐입니
다.”
고운이 가만히 웃었다. 나는 입술 을 꾹 깨물었다.
너는 약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 었다.
무력해도, 나약해도 상관없다고. 내 게 기댄다면 모두 해결해 주겠다고.
그렇지만 나는 과거 이와 같은 상 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내가 그랬듯이, 고운이 원 하는 건 그런 대답이 아닐 거야.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구
나.”
엄마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흔쾌히 말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
간신히 꺼내 놓은 허락에 고운의 웃음이 깊어졌다.
좋다고 웃는 얼굴이 제법 얄미워 서, 나는 괜히 고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너를 그리 보내고 나는 매일 네 걱정을 할 텐데, 잘도 웃는구나.” 고운은 볼이 당겨지는 대로 얌전히 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는 밤에 편히 잠드시니, 안심 하고 떠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 말에 문득 잊고 있었던 아이가 떠올랐다.
밤마다 외로웠을 그 아이를 지켰던 건 고운이었다.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정말 맞는 모양이었다.
밤중의 그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한 다는 이유로 계속 주저하고 있었구 나.
아이의 이타적인 마음씨가 고우면 서도 마음이 아려서, 나는 고운의 순을 꾹 쥐었다.
“잘 돌아와야 해.”
몸도, 마음도 아픈 곳 없이. 지금 처럼 예쁘게.
“정말로, 꼭 돌아와야 해.”
다짐하듯 꾹꾹 힘주어 말하자 고운 이 화답하듯 내 손을 마주 쥐었다.
“그러겠습니다.”
외전. 산아
[밤에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 릴 수도 있어.
정말 살아 있는 아기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산야는 그 서신을 떠올리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서신으로 당부해 준 것이 무색하 게, 산야는 화룡궁으로 향하고 있었
다.
낮의 그 아이, '산야는 신경 쓰지 말라 서신을 보냈지만 그럴 수가 없 있다.
밤은 고요했고, 아이 우는 소리는 동궁에서도 어렴풋이 들렸다. 아기씨의 전설은 산야 또한 알지 만, 그래도 달래 보고 싶었다.
홀로 우는 일은 쓸쓸하다. 다른 누 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것을 산야는 알았다. 화룡궁에 다다른 산아는 괜스레 주 위를 살폈다.
아이를 달래고는 싶었지만, 장소가 화룡궁이라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
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고민하던 산아는 고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운. 미안하지만•••••• 여기서 다 른 이들이 오는지 확인해 줄 수 있 을까?”
어렵사리 부탁한 것에 비해 고운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여전히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기에, 산아는 고맙다고 말하며 서둘러 대 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산아가 문을 닫자마자 울 음소리가 뚝 멎었다.
놀라 고개를 돌린 산아는 기묘한 것을 보았다.
그것이 무어라고 정의할 수가 없었 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주 새하 얬다는 것.
[너, 그 아이구나.]
어른도, 아이도 아닌. 인간이라 말 할 수도 없는 그 기묘한 것이 산아 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 질문에 산아는 어리둥절했다. 이런 기묘한 것을 어디서 또 보았 을까. 티끌만큼도 기억나는 것이 없 었다.
산야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니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공백이 있구나.]
낮게 중얼거린 그 말. 뒤이은 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
다.
[그래선 안 돼. 둘이 되었어도 비 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지.]
“그게 무슨 말이오? 무엇이 둘이 되었고, 무엇을 버린다는
[그 아이는 거부했으니, 네게 줄 산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흰 것이 불쑥 눈앞에 다가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것이 사라졌다.
대전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린 아이도, 흰 기묘한 것도 사라진 그 안에는 산야만이 남아 있었다.
산야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빛무리가 건넨 것은, 정확히는 일깨운 것은 산야의 기억이었다.
지금껏 잊고 있었다. 오늘 화룡궁 에 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감 정이 솟구쳤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을까. 지금껏 깨어 있었던 것도, 이리 홀 로 고통스러워했던 것도, 모두.
그 아이의 탓이라는 걸.
그 뒤로 무슨 정신으로 동궁에 돌 아온 것인지 산야 또한 알 수 없었 다.
산야는 서신을 쓰려 했다. 하지만 탁자에 앉은 순간 멈추고 말았다. 읽다 나간 서신이 펼쳐져 있었다. 매일 밤 꺼내 읽던 다른 서신들과 함께.
여러 번 읽은 종이에는 손때가 묻 어 있었다.
그만큼 많이 읽은 서신이기에, 산 아는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도 내용 을 알 수 있었다.
산야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네가 밉고, 원망스럽다. 그래도 여전히, 네가 내게 보여 준 다정함이 남아 있어서.
차곡히 쌓인 그 마음이 애틋해서. 산야는 글씨를 오래도록 손끝으로 매만졌다. 낮의 그 아이의 흔적을 따르듯이.
한참을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산야 는,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 올 때 즈 음에야 간신히 붓을 들었다.
서신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구 섞 인 감정을 도저히 담을 수가 없었 다.
길게 쓰지 못하고, 반드시 물어야 할 것 하나만을 물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고, 다시 눈을 뜬 산야는 답장을 받았다.
답장은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산야는 다시금 서신을 썼다. 마지 막이 될 것이었다.
짧은 서신을 씨 머리맡에 두고, 산 아는 마지막일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동이 터오는 하늘과 차가운 새벽 공기.
아이의 기에 맞춘 방 안의 가구 들과 세심히 켜 둔 등불까지.
아이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으로 가득 찬 방.
그러니, 네 대답은 거짓이 아닐 것 이다.
네 행복이 진실이라면, 그것으로 된 거야.
산야의 얼굴은 서글프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아이의 눈은 메말랐다.
해가 완전히 떠올랐고, 산야는 눈 을 감았다.
〈후일담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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