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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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이, 자각 이후의 나 는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고운을 보고 새삼스레 더 설레거나 덜 설레거나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냈다.
궁이 폐쇄되다시피 한 탓에 좋아 하는 사람과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아무렇지 않다니.
나라는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그 무심함에 나조차도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접을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정확하게는 접을 생각이라기보단, 이루어질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지만.
그도 그릴게•••  '잰 어릴 때도 저랬잖아.' 고운은 원체 다정했다.
잘 웃었고 사랑스러운 말도 곧잘 했었다.
너는 늘 똑같이 내게 다정했고, 헌신적이었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고운이 눈을 접 어 웃었다.
사르르 접히는 눈꼬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
평소와 같다.
평소와 똑같이 나만 문제지.
'일 하자, 일.' 나는 머릿속 비우고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싱숭생숭한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 고, 나는 어제 유리가 머무는 궁에 찾아가 방법을 찾았으니 떠나겠다고 했다.
왕궁에는 눈과 귀가 많으니 금세 그들의 귀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 고, 역시나.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가 내 소 아 에서 팔락였다.
소식을 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플린트 공작가는 득달같이 나를 초 대했다.
이전의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는, 왕실의 홀에서 여는 파티의 초대장 이었다.
왕실의 홀을 빌려 파티를 연다니, 새삼 대단한 권력이다.
어찌 되었든 부르셨으니 가야지.
나는 봉투를 탁 튕겨 떨어트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들을 이야기도, 할 이야기도 많을 것 같으니.
나는 파티장 안에 발을 들였다.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과 같은 홀, 이전과 같은 노래 와 똑같은 옷의 사람들.
달라진 것이라면 저 눈빛과 사라 진 수군거림이겠지.
당연하게도 서라국의 예복을 입 은 나는 u긋하게 그들을 둘러보 았다. 오늘 유리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 는다.
지금껏 공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유리가 나를 홀대했고, 그 탓에 내 가 기분이 상해 그 아이를 꺼린다 티를 낸 탓이었다.
정정을 미룬 것은 그게 내게 꽤 다행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애가 나랑 친구로 지냈고, 이 제 훌쩍 자라 성인이라고 해도 아 직 이린에 같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오늘 할 일
'교육에 안 좋아, 교육에.'
나는 어르신 같은 생각을 하며 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표己
머리의 사람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계속해서 그쪽을 바라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경련이 일 듯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태자 전하. 저는 플린트 공작이라 합니다.”
그가 공작 부인과 함께 내게 다가 와 인사했다. 나는 그에게 가법게 목례하고는 고 개를 돌렸다.
“간만에 뵙네요, 공작 부인. 그간 잘 지내셨나요?”
“예, 전하.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답니다.”
아하, 그렇군요. 눈 밑은 제법 까 만데.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다물었
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어색하게 웃으 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부인을 기다리고 있지요.”
장난스레 웃으며 한 말에 공작 부 인의 미소가 굳어졌다.
그에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실 덴데 요.” 그냥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
야.
넘길 이유가 없는데, 왜 봐줘야 하지?
다시 입을 다문 내 탓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공작이 아내를 눈짓하며 작게 헛기침했다.
•••제 실수로 전하께 무례를 저 질렀습니다. 사죄드립니다.”
, 그렇지.
“부인의 말마따나 제가 예비 신부 로 왔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저는 사절이니 말이에요. 타국의 사절에 게 자국의 복식을 권하는 것은 아 주 무례한 일이랍니다. 잘 아시겠 지요?” 활짝 웃으며 조곤조곤 짚어 준 말 에 공작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성격을 비렸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 상쾌하다.
“그리고•••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나 는 문가를 눈짓하며 말을 이어 갔
다.
•••서라국에서 오신 마호 가의 가주분께서 드십니다!”
시종이 가문 이름을 몰랐는지 말을 조금 더듬었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흰색 예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타국의 왕자님처럼 차려 입은 고운 은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표정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온 고운이 입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어우, 잘생겼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으며 고운 에게 손을 내밀었다. 팔을 달라는 의미였는데, 고운이 살포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장갑을 끼지 않는 서라국의 복식 상, 약간 까슬하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 미친.
하마터면 육성으로 꺼내 놓을 뻔했 다.
성격이 제법 괄괄해졌지만 비속 어 한 번 쓴 적 없는 나인데, 최근 에 대체 무슨 일인지.
아니, 근데 이건 저놈이 잘못한 거
연인인 척을 하자고는 했지만 이런 걸 한다고는 안 했다고!
심호흡하며 쿵쾅대는 심장을 가
라앉히는데, 사람들의 미묘한 시선 이 따끔거렸다.
아, 맞아. 잊으면 안 되지.
“조금이라도 제가 국왕 전하와 국 혼을 추진할 가능성은 없었을 거 랍니다.”
“저도, 국왕 전하께서도 유일한 후계자이니 각 나라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있지만•••  나는 때맞춰 고운의 팔에 2' 1-으曰 올렸다. 따뜻한 살갖이 단단했다.
“혼약자와 함께 온 것이라서요.”
그렇게 말했지만, 다들 씩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면 어째서 먼저 밝히지 않으 시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것이 아닌 탓에 함구하였습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운이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어조가 조금 더 가법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을 뿐인데 돌 같 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지만 혼약자의 지위 또한 가 법지 않은데, 그런 저를 앞에 두시 고도 혼인을 운운하시니••
고운이 말끝을 흐리며 깊게 웃었 다. 그 얼굴이 괜히 위험해 보였 다.
나는 그 태도가 조금 당황스러웠 다. 진짜 화난 것 같은데.
고운의 이능이 강력한 걸 알아서 괜히 걱정되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여기선 사고 지면 안 돼.
“제가 더 인내하지 못하여 태자 전 하께 간청드렸습니다.”
다행히도 고운은 금세 위험한 기 운을 지우고 빙긋 웃었다.
“대대로 서라국의 황제께서는 후 궁을 많이 두셨으니, 태자 전하께 서도 얼마든지 그리하실 수 있겠 지요.”
“현명한 부군이 되어 드릴 생각이 니 혹 후처가 들이신다 하더라도 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지 않겠 습니까.”
후처 들일 생각은 없지만, 잘 한
다.
더 패.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패.
그리고 이겨.
“고운, 그만해. 공작 부인께서는 그저 모르셨을 뿐인걸.”
나는 고운을 말리는 척 한 대를 더 때렸다.
공작 부인은 웃는 것도 잊은 창 백한 낮이었다.
그동안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 하다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상대를 만난 게 꽤나 애석한 모양이다.
“오신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이 능 부족을 해결할 방법을 찾으셨 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싸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공 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비로운 흑발을 가지셨으니 비 범하실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맞다니요!”
서라국에는 발에 채일 만큼 흔한 게 검은 머리인데, 서 대륙에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좋게 봐주는 걸 철회할 생각은 없어서, 나는 그저 수줍게 웃었다.
“저도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답니
다.”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되찾은 공 작 부인이 내게 물었다.
“대체 어찌하셨는지 감을 잡을 수 도 없어서요. 어떻게 방법을 찾으셨 나요?” 옳지, 잘 물었다. 본인 딴에는 날카로웠다고 생각 할 것이 분명하다.
내게 아주 반가운 질문이었다는 걸 말해 주지 못하는 것이 이1석할 따름 이다.
나는 깎아 달라는 말을 들은 장사 꾼처럼 난처한 얼굴을 하며 잠시 고 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용을 직접 만나 뵈었답니다.” 거짓말이다.
“용께서는 다시는 인간계에 관여 하고 싶지 않다 하셨지만, 제 간청 에 다행히도 한 번 더 기회를 주 셨어요.” 역시나 거짓말.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내가 무려 흑발을 가 진 서라국인인 덕에 금세 사람들 이 술렁였다.
“용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잠드시 고, 지금은 그 유해만이 남아 있습 니다만•••
“어머, 제 이능을 모르시나요?” 당황스럽다는 듯한 공작 부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 물었다.
“언령이란 말의 힘이죠. 모든 이 능과 마법이 존재하니, 용께서 잠 드셨지만 그 혼만큼은 살아 계시 다는 증거 아니겠나요?” 하여 간청드렸더니 만나 주셨답 니다, 하며 나는 웃었다.
“정확히는 황가의 이능이지만, 이 마마마께서 제게도 양도해 주셨으 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일부러 교묘히 돌린 말이었다.
서라국 황실의 이능은 알려지지 않았고, 측근 소수만 아는 그것은 도화다.
천룡으로 각성한 엄마만 쓸 수 있는 힘이지만, 나는 그게 본래 황 가의 힘인 것처럼 말했다.
거짓말이지만 뭐 이때. 나중에 혹 여라도 서라국을 침략하려 했을 때 한 번이라도 우리를 막아 줄 텐데. 인생은 원래 선동과 날조인 것이 다.
“조절이 잘 되지 않아 걱정이에 요. 함부로 한 말에 이능이 발동되 면 큰일인데.” 과격한 말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자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 나는 속으로 웃 있다.
“아, 그리고 말이에요.”
복수도 할 만큼 했고, 놀리는 것 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할 일을 해야지.
나는 완전히 휘어잡은 분위기 속 에서 입을 열었다.
“용께서 제게 부탁하신 것이 있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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