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선물에 파묻혀 나오 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상당히 귀여운 꿈 이지만, 실제로 그 징그러운 원숭이 의 눈알이 내 눈앞에 있는 건 생각 보다 끔찍했다.
밤새 꿈을 꾸었더니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따뜻한 방 안에서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 았다. 아침을 배불리 먹었더니 유난히 졸 렸다.
'그런데 맛있었지.' 그전에 나온 식사도 맛은 있었지만 그저 그랬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정말 눈이 번 쩍 뜨일 만큼 맛있었다.내가 아파서 숙수가 힘을 준 건지, 아예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맛만 있으면 되지.
잠시 아침 식사를 상기하던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이불을 놓고 다리를 쭉 폈다.
보드라운 이불이 무게감도 없이 내 다리에 내려앉았다.
이불은 꽤나 컸고, 푹신하고, 도톰 했지만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 았다.
어제 받은 선물 중에 있었던, 서역 에서 온 마법에 걸린 이불이었다.
서라국에 이능이 존재하듯, 서역, 그러니까 서대륙에는 마법이 존재했 다.
그 마법은 대부분이 '마법'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것과 아주 비슷했 다.
이마에 흉터 있는 마법사 소년 이 아기를 제법 좋아했던 나에게는 이 능보다 마법이 더 익숙했다.
마법은 이능보다 훨씬 편리했다. 제 가문에 축복받은 이능 한 가지만
을 사용할 수 있는 서라국의 이능과 달리 마법은 마력만 있다면 한 사람 이 여러 가지의 마법을 부릴 수 있 기 때문이었다.
인재가 많은 덕에 여러 가지 연구 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이런 이불 도 만들어 낼 수 있지.
한국에서 쓰던 자렵이불 같은 느낌 에 나는 이불에 코를 박았다.
옅은 꽃향기가 느껴졌다. 丁口스 1-六꼬 인지는 모르지만 꽤나 좋았다.
할 일도 없겠다, 날씨는 좋겠다.
나는 지금부터 늘어지게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성인이었을 때는 낮잡을 자면 밤에 잠을 못 잤지만, 어린아이는 원래 잘 자지 않나.
이불을 손으로 몇 번 두드리던 나 는 아늑한 굴 같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대로 눈을 감으려는데, 문밖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선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입 안에 욕이 고였다.
왜 왔지. 그것도 이 타이밍에?
•••들어오시라고 해라.” 하지만 욕은 욕이고, 출입은 다른 문제였다.
내가 어느 누군가를 문전박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가람이 저벅저 벅 들어왔다.
여전히 공작새처럼 화려한 모습이 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진 행동은 전혀 그 같지 않았다.
“아, 안녕.”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좀 같잖았다.
가람은 어정쩡히 서서 내게 들었다.
수줍음 타는 초등학생 같은 모습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 선비 마마.”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 라, 나는 작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침상에서 일어나지는 않았 다. 병약해서 침대를 벗어날 수 없 는 콘셉트로 가기로 결정했다.
환자와 마주 앉아 무슨 말을 얼마 나 하겠는가?
트집을 잡으면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웬일로 가람은 내게 일언반 구 없이 계속 쭈뼛댔다.
나는 그가 목화를 신은 발을 바닥 에 문지르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 다.
부디 그 발에 진흙이 묻어 있지는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었다.
그나저나 가람은 꽤나 잘 버텼다. 엄청나게 더울 텐데.
그는 불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 더위를 잘 탔다.
원작에서도 한여름에 가람이 웃통 을 벗은 묘사가 종종 나오곤 했다.
이 몸의 체온이 낮은 편이라 이곳 이 온돌방처럼 따뜻했지만, 가람에 게는 끓고 있는 가마솥 안에 들어온 것 같을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장으 로 슬금슬금 다가가 휘장을 걷어 내 고 살짝 열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 “에취.” 광! 쨍그랑!
“같네!”
차가운 바람을 들이켜 작게 기침했 던 나는 순간 터져 나온 고성과 창 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어깨를 떨었 다.
안 부서졌나? 저걸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지.
그나저나 뭐라고 한 거야.
가람은 도자기를 깬 어린아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실제로도 하나를 깨부쉈다.
나는 어제 미리내의 선물 중 하나 였던 새하안 백자가 산산이 깨진 것 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마! 큰 소리가•••••• 세상에!”
소리를 들은 희사가 깜짝 놀라 뛰 어 들어왔다.
그녀는 곧바로 도자기의 잔해들을 치우고는 방에서 나7갔다.
그 과정에서 몰래 가람을 한 번쯤 째려본 것 같기도 했다.
•••아끼던 것이었어?” 가람이 슬그머니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잠시 주저했다.
미리내가 준 선물인데, 아끼지 않 는다고 말하기도 참 그렇지.
그 말에 가람의 어깨가 채찍에 맞 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입을 두어 번 달싹이던 그가 꽤나 필사적인 어조로 말했다.
“물어 줄게. 똑같은 것으로, 아니.
더 좋은 것으로 구해다 줄 수 있 어.”
그 말에 나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리내가 선물용으로 품질이 떨어 지는 것을 준비했을 리도 없고, 무 엇보다 이 세계는 공산품이 없었다. 장인이 하나하나 공들여 만든 백자 를 어떻게 똑같은 것으로 구하겠는 가?
그냥 나중에 미리내가 어디 갔냐고 트집 잡으면 가람이 깼다고 일러바 쳐야지.
“괜찮습니다.” 담담한 내 목소리에도 가람은 영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게 불편해서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지려 했다.
그냥 저번처럼 할 말 하고 바람같 이 사라질 것이지.
“그래도•••
가람이 쥐어 짜내듯 중얼거렸다.
슬쩍 시선도 피했다.
나는 그 모습에 입술을 작게 모았 다.
지금 내가 아끼는 거 깼다고 미안 해하는 건가?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혹시 몰라 슬쩍 미끼를 던졌 다.
그 말에 가람의 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뭐야. 진짜?
•••내가 준 선물 중에도 자기가
있어.” 나는 이어진 말에 멈칫했다.
“자개장도 있다. 금으로 만든 주령 구도 있고. 색색의 수정으로 만든 질교도 있고, 비단실을 달고 옥을 끼운 보랑구도 있이.” 나는 가람의 입에서 줄줄 나오는 생소한 이름들을 주위 담으려 애썼 다.
주령구••• ••는 신라 시대에 있었던 주사위고.
질교는 어릴 적에 했었고.
보랑구는 뭐지?
“가지고 놀아 봤어?” 나는 어느새 초롱초롱해진 가람의 시선에 식은땀이 났다.
가지고 놀아 봤나니, 당연히 안 놀 아 봤다.
여란 가에서 보낸 선물인 줄 알고 저 구석에 처박아 두었으니까.
거짓말을 하기엔 내가 보랑구를 몰 랐다.
결국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때 어 간신히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아직•••
“아니, 아니. 송구해 할 것은 없지. 괜찮아.” 가람은 재빨리 을 내저으며 부정 했다.
하지만 말투가 미묘하게 처져 있었 다.
진짜 왜 저러지. 어제 깽판 졌다고 황제한테 혼났나?
“큰 소리 무서워해?”
내가 작잡한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가람이 대뜸 내게 물 었다.
무슨 의도의 질문인지는 모르겠지 만 나는 대답해 주기 위해 八그 고 심했다.
더 정확히는 자주 놀라는 것이다.
천등소리를 무서워하는 어린아이는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에 는 귀찮았다.
“큰 사람은?” “그것도•••••• 두렵지요.”
후자는 사실이었다.
아이의 몸이 되니 커다란 사람이 무서웠다.
내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 를 굽어보는 모양새가 공포스러웠 고, 실제로도 내 주위의 큰 사람들 은 나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이들 이었다.
이능 있는 세계에 이능이 없는 인 간으로 사는 것.
그것도 어린아이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황궁에 있어서 아직까지 죽 을 위험이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람이 낮게 가라앉은 목 소리로 말했다.
“무섭거나 싫은 거 있으면 말해.” 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인가?
오늘의 가람은 유난히 관대했다.
그리고 조금 하찮았다.
앞의 말들은 어찌저씨 이해가 되지 만, 마지막 말은 나에 대한 호의가 조금 섞여 있었다.
“정말요?” 묻는 내 목소리가 조금 상기되있 다.
가람은 내 얼굴에 눈을 밟은 강아 지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다 치워 줄게.” 그 확답에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 다. 옅은 기대감이 찰랑찰랑 자올랐
다.
그럼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살짝 가람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온순한 강아지처럼 얌 전히 서 있었다. 역시, 괜찮을 것 같았다. “나가 주세요.”
아, 속 시원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래서 동화 속의 남자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진 것일까.
묵혀 있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 분이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띠었고, 가람은 지켜 올라간 눈썹을 축 내렸다.
으음. 왜지.
내가 나가라는 게 그렇게 서러운 일인가.
사당 뺏긴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영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머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물거리던 가람이 이내 주춤주춤 뒤를 돌았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걸어가는 가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 렸다. 이제 정말로 잘 생각이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나는 들려온 서연의 목소리에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던 몸을 급하게 잡 아 올렸다.
우당탕, 하는 소리에 가람이 의아 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든 사이 문이 열렸다.
나는 들어온 여인의 얼굴을 보고 절망했다.
긴 흑발. 회녹안. 틀어 올린 머리 를 고정한 황금빛 용비녀.
모로 보나 황제였다.
황제는 문 앞에서 기다리지도 않는 다.
황제가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는 것이다.
문 앞에서 황제 폐하 오셨으니 들 일까요, 했어도 들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그 작은 선택지마 저 뺏긴 것은 씩 좋지 않았다.
저벅저벅 걸이 들어오던 황제가 가 람을 보고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가람. 와 있었구나.”
“폐하.”
가람은 황제를 보고 힘없이 웃었 다.
누가 봐도 저 무슨 일 있습니다, 하는 미소였다.
아. 그래. 너네 여주랑 남주였지.
가람은 후보이긴 하다만.
연에질은 나가서 해 줬으면 좋겠 다.
나는 남몰래 씩은 눈을 하며 황제 에게 인사를 했다.
내게 고개를 돌린 황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우선 가람부터 상대해아 한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저 아이가 나가 달라고 하
소심하게 덧붙인 말에 황제가 벙
찐 얼굴을 했다.
가람은 황제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미적미적 걸이 나갔다.
고자질인지, 너도 나오라는 건지 모르겠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녀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입가에 미소 를 띠었다.
“나••••••도 나가야 하느냐?” 눈을 껌뻑이던 황제가 멍청하게 되 물었다.
나는 웃는 이마에 힘줄이 잡힐 것 같았다.
나가. 네가 1순위야.
“폐하께서 찾아 주시는 것은 더없 는 영광이지요.”
•••권력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