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안은 고요했다. 그곳이 낯익 으면서도 아주 오랜만에 발을 디 던 것 같았다.
나는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손끝에 닿은 차가운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작은 구슬. 그 안에는 여전히 어
린 내 얼굴이 맺혀 있었다.
그 기억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내가 보고 왔음에도 여전히 자리 를 지키고 있었다.
뻗어 구슬을 만지자 구슬이 빛으로 화해 흐릿해졌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그 사이로 기 억들이 각인되듯 밀려 들어온다. 지금껏 어떻게 잊었냐는 듯이, 머 근것속에 차곡차곡 자리를 잡았다.
내가 소설 속이라고 믿고 있었던, 원작의 내용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 기억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맞는지 확 신할 수가 없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들어 올 렸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검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꼭 각성한 뒤의 엄마의 머리카락 처럼.
새하안 머리카락. 기억 속에 있었 던, 이 생에서는 이능을 얻은 나.
그건 분명 조금 모자랄지언정 언 령이었다.
언령을 가진 이들에게 흰 머리가 락은 각성을 뜻한다. 그건 본래부 터 없었던 힘이 생긴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가 내가 목숨을 잃을 뻔한 계기로 충격을 받아 자각한 것처 럼, 아마도 나 또한.
그러니 지금 내 머리색이 변했다 는 것은, 결국 내가 본 기억이 맞 다는 반증이다.
그 삶이, 내 과거였다고.
자마 그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과거는 흐릿하지만 사라지지 않았 다.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어린 나 에게도 그러했던 검은 머리칼의 황제.
나를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흰 머 리칼의 어머니.
그 둘의 같은 듯 다른 얼굴이 겹 쳐진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황망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눈앞이 새하얘졌다.
지금껏 아무리 애써도 운용할 수 없던 언령이 움직였다.
이제 알겠니? 하고 말하듯이.
나는 꼬박 한 달 만에 서라국에 돌아왔다.
행방불명되었던 기간이 제법 길 있던 탓에 내가 나타나자 황궁은 발각 뒤집혔다.
모두가 부산하게 나를 챙겼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지금껏 어디에 있었는지. 그럼에도 돌아와 서 다행이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 기억 속의 삭막했던 황궁과의 괴리가 너무 커서, 나는 그 안에 섞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겉돌았다. “폐하께서도 금방 오실 거예요.” 희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내가 입궁했 을 적부터 지금까지 나를 모셨다.
그렇다면 전생에는?
전생의 나는 궁녀들에게 꽤 앙칼졌 는데, 너도 내가 내쫓았었니?
그래서, 나를 그대로 잊었어?
“산아!”
목 끝에 걸린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 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 자 백발의 여인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회녹안 이 휘등그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 왔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푹 끌어안 겼다.
“세상에.”
“대체 어디에 있었니. 기별조차 해 주지 않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매섭게 나를 혼냈다. 하지만 제 아이를 보 듬는 손은 따뜻했다.
“아니다. 이것으로 되었어.”
“네가 돌아왔으니, 무사히 돌아왔 으니 이거면 됐다. 고맙구나, 아 가.”
그 목소리가 더없이 무거워서, 그 웃음이 생각이 났다.
처절히 애원하는 나를 보며 가벼 이 웃던 그 미소. 한가롭던 손짓.
' '매았하구나, 찬이 그 말.
본능적인 일이었다. 그녀=1-口丁。 비하게 내가 미는 대로 밀려났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내게 거절당한 그녀의 눈동자에 는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 다.
오롯이 나를 걱정하는 따뜻한 눈 동자에 소름이 돋았다.
“제가, 조금 피곤해서요.” “아가, 네 안색이 “나가 주세요.” 그래. 이래서 기억을 지웠었지.
시간이 오래 지나고, 되찾은 기억 마저도 군데군데 바래 있다. 그럼에도 당신만은. 그 말만은 려지지도 잊혀지지도 않아. “간청드립니다, 폐하.” 아주 오랜만에 끄집어낸 호칭에 그 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는다.
등 뒤에 칼이 꽂힌 것 같은 얼굴 을 하던 그녀는 이내 애써 웃었다. “그래. 오래 떠돌다 돌아오면 곤 할 테지. 배려하지 못해 미안하구 나.”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혹 시 내가 깨지기라도 할까 조심스 러운 손길이다.
“푹 쉬고, 어미가 보고 싶으면 언 제든지 오거라.”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내게 다정 했다. 그녀가 방을 나서고, 방 안 에 정적이 흘렀다.
“저, 전하•••
한 궁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말에도 다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다들 나가 줘.” “하오나 전하,”
“나가, 제발!”
지금 나는 그들을 설득할 수 있 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집이었 는데, 모든 것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결국 궁녀들이 방을 나서고, 방 안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
다.
“내가, 나가라고-
“송구합니다, 전하.”
덜덜 떨리는 차가운 손을 큰 손이 모두 덮어 쥐었다. 그가 무릎을 꿇 어앉아 있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청회색 눈동자. 다른 이들처럼 격 정과 다정이 담겨 있었지만, 유일 하게 껄끄럽지 않았다.
그 얼굴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추운 밤 사막을 걷다 마주한 모닥 불 같았다.
내 오랜 친구이고, 사랑스러운 연 인이며 유일하게 오롯이 믿을 수 있는 사람.
1- 근 뻗어 고운을 끌어안q갔 다. 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든든한 품 안에서 불안정하게 뛰 던 심장이 자자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조용히 들 려왔다.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어깨 에 얼굴을 묻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어떻게 하 면 네가 믿어 줄 수 있을까?
이 세계가 소설 속인 줄 알았는 데, 사실 내 전생이었대. 그 생에서 나는 모두에게 외면받 고, 무시당하다가 단명했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던 이가 나를 배신했어.
그 사람이 내 어머니야, 고운.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알 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라도 털어놓 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 동굴에서.”
“한 기억을 봤어.” 나는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 가 불안정하게 문장을 만들었다.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앞뒤가 맞지 않는 듣기 어려운 이야기였
다.
고운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 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입을 다물었을 때, 나 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 포옹이 꼭 위로의 의미 같아 서, 나는 품에 안긴 채 물었다. “너는 내 말을 믿어?"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나는 힘 없이 웃었다.
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믿는다는 저 말이 의심 가지 않는 나도 참 이상 하지.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운에 게 물었다.
“너는 나에게 거짓을 고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렇지?” 언뜻 절박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고운마저 믿을 수 없다면 나는 그 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러자 고운은 나를 안은 팔에 힘 을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게 다라는 듯이.
다정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없었지 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 온기에 기대어 속내를 털 어놓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 어.”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잖아.”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였다. 이 생에서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 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차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이번 생과 전생이 뭐가 그리 달 라서 이렇게나 바뀌었는지.
단순히 내 태도 탓이었을까?
나는 처음부터 그들을 배척했고,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는 점 점 멀어졌다.
이번 생의 내가 그들에게 다정하 게 대해 주어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황제는 어째서?
“전생의 나는 폐하를 부모처럼 따 랐어. 늘 눈치를 봤고 사랑을 갈구 했어.”
“그때에는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바뀐 걸까?”
마음껏 원망할 수도 없고, 덮어 두고 사랑할 수도 없다.
깊게 사랑한 만큼 드러난 흉터가 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당신만은.
내 어머니만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며 덮을 수가 없었다.
“괜찮을 겁니다.” 고운이 생뚱맞게 그런 소리를 했
다. 서투른 위로였다.
“괜찮아질 거예요.”
=을 토닥이는 손이 다정해서 나는 괴로워하던 것도 잊고 픽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정말 힘 겨운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을 미워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만, 피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건 없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시끄럽던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고운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그를 한번 꼭 껴안은 뒤 고 개를 들었다
“폐하께 가 봐야겠어.”
눈이 마주친 고운의 표정이 심각했 다. 괜찮겠느냐고 묻는 얼굴에 웃이 주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 곧바로 받아들이실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본 엄마 라면 절대 날 외면하지 않을 거 과거의 황제는 차가웠지만, 이번 생의 엄마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 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내게 보여준 모 습들도 분명히 진실일 거라고, 나 는 믿기로 했다. “나 다녀올게, 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