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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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처먹질 않으니, 원하는 대로 양껏 해라.
대강 그런 의미의 말이었다.
하지만 나의 위지상 두 사람에게 '더 해라' 하고 말할 수 없으니 존 대로 바꾼 것이지.
그런데 말하고 보니 어째 꼭 비꼰 것처럼 들렸다.
굳이 정정할 힘도 없었던 나는 한 숨이나 한 번 쉬었다.
지금껏 보고 느낀 게 있어 이 정 도의 말로 목숨이 위험하지 않다는 건 안다.
물론 좀 혼나거나 벌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겠지.
기왕이면 근신이었으면 좋겠다. 당 분간 너희 일굴 그만 좀 보고 싶다. 혼날 생각을 하니 또 급격히 피곤
해진 나는 대강 마음의 준비를 했 다. 하지만 내 예상은 모두 빗겨 갔
다.
“그래! 너 드디어- 악!” 반색하던 가람이 미리내의 매서운 손길에 지위졌다.
벌레를 쫓듯 가벼운 손짓이었는데 가람은 비틀거렸다.
미리내에게 버럭 화를 내려던 가람 은 왜인지 멈칫했다.
그러고는 슬쩍 내게 시선을 돌렸
다.
“산아. 너 왜, 그•••   문제가 있나요?” 말이 씩 곱게 나가질 않았다. 여전 히 무표정을 고수하자 가람이 더듬 댔다.
“산야. 무서웠니? 미안하구나.” “아니요. 괜찮습니다.” 애써 다정히 말을 붙이는 미리내의 말도 평소와 같이 마음에 들지 않0갔
다.
“내, 내가 미안하다.”
가람 또한 당황한 일굴로 사과를 건네 왔다.
“미리내 말대로 무서웠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어찌 되었 든 미안하니••  이것도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다.
이놈들은 올바른 사과에 대해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살며시 미간이 구겨지자 가람이 귀 신이라도 본 일굴을 했다.
반응이 제법 격하다. 내가 이렇게 까지 화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 나.
그래•••••• 사실 조금 이성적으로 생 각해 보자면, 평소와 그다지 다른 것도 아니었다.
요 며칠 새 유독 더 사사71크건 나 를 귀찮게 굴기는 했지만 평소에도 궁녀들이나 후궁들이 극성맞기는 했 으니까.
그런데 유독 오늘은 참고 넘기기가 힘든 건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이
다.
지금껏 그 일들을 참고 넘겨 왔다 고 생각했는데, 그냥 꾹꾹 눌러 놓 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임계점을 넘긴 탓에 지금 이렇 게나 짜증이 나는 것이고.
물론 요 며칠 그네들이 심하기도 했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나는 적당한 사회성도 집어던질 만큼 감정적이
다.
그리고 그냥 좀 감성적이어야겠다.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들어가 보겠
습니다.” 나는 대강 묵례한 뒤 대답을 듣지 도 않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미리내와 가람이 나를 부 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앞만 보며 걸어갔다.
꾹꾹 참다가 화병 나서 죽나, 후궁 들 눈 밖에 나 죽나 거기서 거기
화령궁의 후원.
가람은 산아가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쌩하니 자취를 감춘 지 한참 된 아이를 찾는 뒤늦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람 본인은 입을 열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궁인들이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용의자는 하나였다.
미리내는 이미 자리에 없는 아이를 이제야 찾을 만큼 정신이 빠져 있었
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한참 전부터 그랬다.
누구의 앞에서도 자유자재로 말로 상대를 박박 긁어 놓던 미리내는 산 아에게 고작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 다.
목소리가 떨리거나 말을 더듬지 않 았지만 그 한마디가 미리내가 산아 를 달래는 전부였다는 것이 그의 당 황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리고 그건 가람 또한 마찬가지였
다. 아니, 그는 더 심했다.
멍청이처럼 말을 더듬거리고도 여 전히 정신을 자리고 있지 못하니 말 이다.
'내가 제대로 본 건가?' 가람은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
그러니까, 산야의 지나진1 의젓함이 걱정이 되었고, 마침 미리내는 재수 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미리내와의 언 쟁이 조금 길어졌고, 목소리도 높아 졌다.
그 과정에서 산아에게 불똥이 튀었 고, 산아가 화가 났다.
안절부절못하던 순한 얼굴이 일순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싸하게 굳어 졌다.
그것까지는 아주 좋았다. 가람은 산아가 무엇이라도 감정을 표현하기 를 바랐다.
조금 질책받더라도 내 한 몸 바쳐 네가 화낼 수 있다면••••••! 멍청하게도 가람은 그런 생각을 했 다. 그걸 티 내려다 미리니1에게 호 되게 얻어맞았을 때까지도 그랬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산아의 얼굴에 한 줌의 노기도 비치지 않았을 때였 다.
산야는 미간을 찡그리지도, 입가를 비죽이지도 않았다. 울지도 화내지 도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자 같은 얼굴이었다.
젖살이 남아 있는 통통한 얼굴이 정색한다고 무서우면 뭐 얼마나 무 서울까 싶지만, 정말로 무서웠다.
호랑이를 눈앞에서 마주하면 이럴 까?
그 기백에 모두가 맥을 못 추는 사이 산야는 어떠한 질책의 말도 없 이 또박또박 말했다.
'더 해 보세요.' 그 목소리조차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자라리 조금의 노기라도 섞여 있었 다면 당장에 싹싹 빌었을 텐데, 산 야의 반응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가람은 뒷목이 싸하 게 당겨 왔다.
이게 아닌데?
당황한 것은 가람뿐만이 아니었는 지, 산야의 물음 아닌 물음에 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또다시 당황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산야는 그 밀랍 같은 얼굴로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무런 기대도, 관심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가람은 산아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금껏 저 아이가 많이 참아 주있 구나.
그리고 이번에는•••
••••참지 않은 거구나.
가람은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0갔다.
그 시각, 화선궁.
“내가 심했나?”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고운이 고개 를 내저었다.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무작정 내 편을 들어 주는 모습에 나는 피 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람의 표정 이 다시금 떠올랐다.
'꼭 귀신 본 얼굴이었지.'
당시에는 당장 내가 너무 화가 나 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필 수 없 었지만, 궁으로 돌아와 진정한 뒤 다시 떠올려 보니 그랬다.
미리내는 항상 눈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아마 그도 비슷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나 놀랄 일이었나.' 버럭버럭 화를 낸 것도 아니고, 무 표정일 뿐이었는데?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회상을 그만두었다.
귀신 본 얼굴을 하든, 놀라서 까무 러지든 자업자득이지.
'솔직히 너무 심해.' 아껴 주는 건 정말 고맙다. 하지만 이렇게나 호들갑을 떠는 건 정말이 지 바라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그다지 불쌍하지도 처 연하지도 않은데, 왜 다들 나를 굴 다리 밑 고아처럼 보는지.
정말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졌기에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거다. 갖고 싶 은데도 남 눈치보며 괜찮다고 말하 는 게 아니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인간들이 왜 그걸 몰라?
“고운. 산책 갈래?”
나는 침상에 누워 있다 괜히 열이 뻗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덤덤히 대답하는 고운을 빤 히 보다 다시 드러누웠다.
“미안해. 귀찮아졌어.” 하루에 두 번 외출은 무리다. 그리 고 무엇보다, 나갔다가 또 사과하겠 답시고 떠들썩하게 방문한 미리내나 가람을 마주치면 곤란해진다.
내 변덕에도 고운은 군말 없이 다 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고, 고운은 얌 전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항 하나 없는 행동에 기분이 묘 해졌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해. 내 명 령이든 뭐든.” 이런 말을 전에도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다시 강조해서 나쁠 것 없으 니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고운이 눈을 접어 사르르 웃었다. 그 웃음이 둘도 없이 따뜻 하고 다정했다.
이 몸의 나이는 여덟, 그리고 고운 은 열두 살. 우리는 네 살 차이가 난다.
성인의 정신인 내가 고운을 귀여워 하듯이, 고운도 종종 나를 이린 여 동생 보듯 볼 때가 있었다.
내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느낌보다는, 막무가내인 동생에게 맞춰 주는 상냥한 오라비 같달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약간 충격 받았다.
어른답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운에게 알게 모르게 떼를 쓰고 있 있나?
그렇다면 좀 충격이지만, 고운이 제일 의지가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정말로. 싫거나 부담스러우면 꼭 말해 줘야 해.” 다시금 진지해진 내 말에 고운은 여口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 못 미덥긴 하지만 우선은 이걸 로 넘어가야지.
아, 그리고•••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 설명해
줄게.” 애초에 이 이야기를 해 주려 불렀
다.
내 호위인 고운도 그 상황에 있기 는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니 아무래 도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말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대답은 없었지만, 예쁜 청회색 눈동 자가 조금 커졌다.
“내가 너무 조용하대. 감정 표현도 잘 안 하고, 바라는 것도 없고.” 나는 그런 고운의 손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正근 1- 내가 떼도 쓰고 울기도 하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나 봐. 의 도는 이해해. 조금 과열됐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래. 그건 정말이다.
어느 정도의 깊이이든 간에, 기반 이 애정이라면 모질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이상하게 보
지?”
“나는 나일 뿐이야. 내 감정 표현 이 화를 내고 떼를 쓰는 거라 어떻 게 단언하는 걸까?” 강제는 아니라지만 만만치 않게 성 가시고 번거롭다.
본인들이 배운 것에는 그렇지 않다 는 것도 알겠지만, 그들이 본 어떤 예시도 내가 아니잖아?
이래서 의욕만 앞서는 바보는 피곤 하다.
별로 화내고 싶지 않았는데, 기어 이 내가 화를 내야지 말을 들으니.
이 모든 일의 시초인 궁녀들도 내 가 싸하게 굳은 얼굴로 궁에 돌아오 자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했다.
당분간 서연만 시중을 들라는 말에 도 항의 하나 없이 물러나는 모습이 편하면서도 착잡했다.
•••허면 폐하께 말씀드려아 하지 않겠습니까.” 씁쓸함을 곱씹고 있던 나는 고운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폐하께? 왜?”
“선비 마마와 귀비 마마께서 다시 는 화선궁을 찾지 못하시도록 해
농담인가 싶었지만 고운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두 분을 다시는 뵙고 싶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앤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당황스러웠다.
“미안하다 하시면 받아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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