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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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운은 다시 산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훨씬 불안정하고 외로우 며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산아를.
하지만 산야에게 어거지로 받아 냈 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산아와 밤 산책을 나갔던 날로부터 며칠 뒤. 고운은 또다시 어두운 복 도에서 덜덜 떨고 있던 산아를 마주 했다.
이번의 산야는 고운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도리어 두려운 무언가를 보 았다는 듯이 떨고 있었다.
“네가 왜 또•••
산아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 다.
고운은 산야를 따랐다. 하지만 산 아는 고운의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
돌아보는 망설임도 없이 발자국 소 리가 멀어졌다. 이불이 사락대는 소 리가 들리고, 이내 조용해졌다.
새하안 문가에는 그림자 하나 비치 지 않았다. 고운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문 앞에 있겠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고운은 날이 밝을 때까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또한, 낮에 마주친 산야는 아 무렇지 않게 환히 웃으며 말을 걸었 다. 이전과 똑같이, 아무것도 기억하 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산아는 종종 밤 마다 깨어나 궁을 돌아다녔다.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 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복도를 하염없이 걷거나 또는 구석 에 쪼그려 앉아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혼자 놔둘 수 없이 고운은 매번 동행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깨어나는 주기가 몹시 불규칙적이 있기 때문에 고운은 매일 밤 산아의 방문을 지키다 동이 틀 때쯤에아 쪽 잠을 자곤 했다.
호위를 서는 낮 시간에도 졸 만큼 의 무리였지만, 제 몸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산야가 부디 평안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산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 다. 고운을 만류하지 않았지만 반기 지도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은 사람처럼 굴었다.
첫날의 웃음이 신기루 같았다. 밤 의 산아는 건드리면 깨이질 것 같았 다.
그나마 잠들기 위해 침상에 누워 있던 나날들이 나았다.
산야는 안정을 찾으려나 싶다가도 금세 다시 불안정해지고는 했다.
산아는 고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곁에 있는 시간이 쌓이니 조금 편하게 느끼는 듯했다. 어느 날 산야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시 만나면 후원에 가겠다고 약 속했는데. 못 지켜서 미안에' 하지만 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 겠다고 덧붙여 속삭였을 때, 고운은 또렷이 기억하노라고 말하고 싶었 다.
하지만 고운은 입을 닫았다. 그는 말주변이 없었고, 이번 기회에 모든 말을 해 버린다면 다음 이야기에 끼 낼 말이 없을 것이다.
고운은 그 말을 다음번에 만났을 때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산야가 또 다시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낮의 산아는 기억하지 못했 고, 밤의 산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밤의 산야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고운에게 말을 걸이 주어 아주 조금 평안을 되찾았나 싶 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궁이 바 뀐 탓에 산야의 불안은 다시금 증폭 되었다.
아주 낯설어진 궁에서 산아는 잠시 나마 열었던 입을 닫았고, 더더욱 고립되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저 홀로 힘 껏 몸을 웅크렸다.
지독한 꿈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말을 고운은 홀로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마저도 살일 음판 같은 평화였다.
결국 일이 터진 것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날이었다.
바뀐 것은 하나. 산야의 잠자리가 화룡궁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주기가 불규칙했고, 황제는 산야를 귀애하니 큰일이 날까 싶었다.
그럼에도 그날따라 고운은 무언가 가 불안했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걱정을 내비치는 고운을 산야는 달 랬다. 고운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 말을 어느 정도 수긍했다.
유독 오랫동안 산야가 밤에 깨어나 지 않았다. 그 탓에 고운은 저도 모 르게 마음을 놓았다.
황제궁에 몰래 따라가 산아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는 돌아왔다.
그러나 고운이 간과한 것이 있었 다.
낮의 산야는 자신의 밤을 모른다. 산아가 고운을 달랜 것에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다. 고운은 낮의 안온함에 취해 섣불리 마음을 놓았다.
그 탓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해아만 했다.
습관처럼 잠이 오지 않아 궁 밖에 나와 있던 고운에게 작은 인영 하나 가 달려들었다.
고운은 놀라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즉시 알 수 있었고, 곧바로 받아 들 었다.

품 안에 안긴 이는 산아였다. 맨발 로 화선궁까지 뛰어온 산야의 발에 는 새카맣게 흙이 묻어 있었다.
덜덜 떨던 산야가 고운의 품에 일 굴을 묻었다. 고운의 옷자락이 눈물 로 젖어 가기 시작했다.
그 눈물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 다.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낮의 산야는 비교적 안정되어 보였 다. 종종 비치는 쓸쓸함이 있었지만 잘 웃었고, 사람들과 말을 하고 곧 잘 잠들었다.
그러나 그의 품에 안긴 이는 낮이 아니다.
“폐하를 봤어.” 산야가 숨이 넘어갈 듯 숨을 헐떡 대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폐하께서 여기 왜 계시지? 그분
•• 살아 계실 텐데.”
“발이 아파. 이곳이 꿈속이나 저승 이라면, 내가 길을 모를 리도 없었 을 텐데.”
•• 나는, 분명 죽었는데.” 산야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서 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고운. 나는 죽었어•••  산야는 그날, 처음으로 고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꾹꾹 담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더 이상은 짊어지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가 왜•••••• 왜 또 여기에 있어?” 참아 왔던 눈물을 쏟아 내며, 모든 이야기를 끝낸 산아가 마른 눈으로 중얼거렸다.
“왜 자꾸 해조차 뜨지 않는 이곳에
서, 나는 분명•••  뒷말은 너무 작아 듣지 못했다. 고 운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 발짝 다가갔을 때, 산아가 괴롭게 일그러 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년 내 기억 속에 없던 아이야.” 그러니 아마도 너는 이 기현상을 알고 있을 거라고, 산야가 말했다.
“꿈에서 깨는 방법을 아니?”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약간의 맹목 이 섞여 있었다.
“자꾸 눈만 뜨면 이곳이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곳에서 자꾸 만 깨어나.” 고운은 서 있었고, 산야는 침상에 앉아 있었기에 자연스레 산야가 고 운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깨어나는 방법을 모른다면••• • 이 게 꿈이라고 말이라도 해 주렴.” 애원하듯 산야가 말했다. 경황없이 그 正1-。근드여다보던 고운은 이내 깨 달았다.
아, 이건 두려움이나 맹목이 아니
다. 광증도, 분노도, 그 무엇도 아니었 다.
“이게 내 지옥이라면 정말 너무하
잖아•••
그저 아주 깊은 슬픔이었다.
그날 산아는 부옇게 동이 터 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평온을 얻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아 이를 고운은 안아 달랬다.
고운 또한 아직 어렸고, 체격이 그 리 크지 않았지만 더 작은 산야는 품에 곧장 들어왔다.
고운은 제 누이 같은 상전을 애타 는 마음으로 토닥였다.
그는 제 무력함을 느꼈다. 산아에 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아무것 도 알 수가 없었다.
가늘게 살린 불씨처럼 그날을 넘겼 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렇게 위 태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산야는 이제 밤중에 눈을 뜨면 고 운을 찾았다. 그 온기를 손에 쥐고 는 다시 잠들려 에를 썼다.
대부분은 숨이 잦아들 듯 잠들었지 만,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산 아가 입을 열었다.
짧은 것도, 긴 것도, 외로운 것도 아픈 것도 있었다. 날카롭게 잘려 나간 인생의 자투리들이었다.
고운은 그 이야기들을 모두 묵묵히 들었다. 그러나 때로는 산아의 결핍 이 너무 깊어 문득 아득해지고는 했 다.
말하지 않는 것들도 훤히 보이다가 도, 돌아서면 눈앞에 있는데 손을 뻗어도 닿질 않는다.
나는 당신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 까.
이런 내가 당신을 위해 무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는 맞았다.
가물거리는 눈을 한 산야를 토닥이 며, 고운은 나지막이 말했다.
낮 시간의 당신은 아주 사랑스러우 며, 현명하고 다정하다고.
많이 웃고, 화내고 슬퍼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랑한다고.
조금 서투른 면도 있지만 그마저도 눈부시니, 분명.
당신 또한 그러하다고.
고운이 말을 길게 한 것은 이례적 인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이 아기를 들은 산야의 눈이 커졌다.
•••낮에도 깨어 있었구나.” 의미심장한 말. 고운은 산야가 어 떻게 이해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부 디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날부터, 산야는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산야는 웃었다. 때로 는 시무룩해 했고, 종종 기분 나빠 했다.
시든 꽃에 물을 주듯 그녀는 다채 로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산 야는 조금씩 고운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뗐다.
고운은 그에 쓸쓸함을 느꼈다. 하 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산아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고, 고운은 단순히 주기가 길어진 것이 라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산아가 인사 없이 떠났음을 깨달았 다.
아주 먼 여정을 떠났음을 알았다. 돕고 싶었지만 지금껏 그랬듯이, 산 아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고  0은 크게 손쓸 수 없다.
하지만 고운은 그 사실에 대해 그 게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낮과 밤 모두, 산아는 그녀의 방법 으로 상냥했다. 그러니 고운의 마음 또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산아가 도움을 청하지 않 은 것은 혼자 가아 하는 길이기 때 문이었다.
아주 멀고 험하지만 그 누구도 직 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그 녀는 안 것이다.
하여 그는 기다렸다. 한 자리에서, 언제까지고 무사히 돌아올 산야를 기다렸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고, 산아는 돌아왔다.
그녀는 멋지게 마무리를 지었다.
고운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저 산야의 설명이 곧장 이해되었 다. 아니, 이해랄 것도 없었다. 처음 부터 고운은 둘이 다르다고 생각하 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흘러가는 것은 있다. 밤의 산야는 과거였다. 고운은 둘 모두를 사랑했지만 남는 것은 결국 현재다.
아주 조금 심장께가 시렸지만, 그 것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안녕. 오랜만이지, 우리." 그래서 고운은 산야가 말을 걸어왔 을 때 적잖이 놀랐다.
“너에게도 꼭 인사를 하고 싶었
어.”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래전, 제가 안고 재웠던 그 어린아이였다.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거라•••••• 고 맙다는 말을 하려면 지금뿐이겠지.” 산야는 머뭇대다 천천히 입을 열있
다.
고민하듯 입을 달싹인다. 그러니
“내 이야기를 다 들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산야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있 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휘어진 눈 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 이 밝게 반짝였다.
산야는 울었지만, 동시에 웃었다.
그녀를 감싼 회색빛 어둠을 몰아내 듯 눈부시게.
”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그 차가운 밤중에 네가 참 따뜻했
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녀에게 평생은 없다. 산아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외 롭게, 그 감옥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그 기억들은 그저 주인이 비린 과거의 망령.
끝없이 자신의 죽음을 곱씹으며 괴 로워하다 이내 그것마저 놓으려는 과거.
그럼에도 그녀는 평생을 약속했다. 고운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산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대로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아녀 ”
위태로이 반짝이던 눈동자가 깜빡, 점멸했다.
“또 만나, 고운.”
산야는 잔잔히 웃으며 눈을 감았
다.
고요한 침묵. 얼핏 그녀의 인영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스며드는 듯한 모습에 고운이 눈을 감았다.
그제야 그녀가 평온을 되찾았다는 것을 알아, 그는 울지 않을 수 있었
다.
기구한 삶을 돌아 여러 해.
마침내 잠든 이의 낮이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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