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어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 개” 서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막대가 내 볼을 찔렀다.
젓가락 입에 물고 있었구나.
멍하니 정신을 차리고 젓가락을 입 안에서 빼자 서연이 물어 왔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공주인 내 식사는 훌륭했고, 아침이 라고 입맛 없는 것도 모르고 잘만 먹었던 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영 넘어가질 않았다. 의무적으로 밥 한술을 더 넣고 우 물거리던 나는 결국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속이 조금 좋지 않아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서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걸려 한 말인데, 그 말을 들은 서연이 벌떡 일어났다.
“소화제를 가져오겠습니다.”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저기 서연, 나 약은-” “드셔야 낫습니다.” 아나. 약 안 먹을래.
알약 삼카는 것도 싫어하는 나에게 이 세계의 한약이니 환이니 하는 것
들은 끔찍하다고.
하지만 나를 몇 번 더 달랜 서연은 결국 다른 궁녀들에게 명령하러 문 가로 다가갔다.
나는 등 돌린 서연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속이 안 좋기는 했다. 그 이 유를 알지만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오려나.' 기윤이 오겠다는 서신이 남몰래 도 착했으니 마냥 마음이 편할 수가 없
었다.
고등학교 때 발표 수업 차례 기다 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으로 열 배쯤 더 긴장되 는 거 같았다.
그리 살갑지 못한 성격이라, 어린 딸아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채면 어쩌지?
“이것이 아니지 않느냐. 소화제는 푸른 주머니에 담긴 것이라 누누이 일러 주었거늘
궁녀가 무일 잘 찾지 못했는지 서 연이 그를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도 몇 마디를 더 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송구하오나 소인이 잠시 자 리를 비워도 되겠사옵니까.” 직접 가서 일러 줄 모양이었다. 나 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보낸 겸에 방 안의 궁녀들도 모두 물렸다. 혼자 침상에서 뒹굴거 리며 생각이나 진득하게 할 참이었
다.
누워서 호떡 뒤집듯 뒹굴거리던 나 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벌떡 일어 났다.
시간이 안 가는 건가, 아니면 정말 로 늦는 건가?
약방은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았 다.
서연은 약의 위치를 아니 금세 찾 아올 수 있을 텐데.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말소리나 발걸음 소리가 들릴 텐데.
왜 이렇게 갑자기 조용하지?
=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머리를 이밀었다. 하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 다.
수없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복도 가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꽤나 섬뜩한 모습이어서,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뭐지?'
아무리 소리를 죽여 봐도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았다. 쥐 죽은 듯 궁 이 고요했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발걸음 소 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궁녀들의 발소리라기엔 묵직하다. 남자의 발걸음 소리 같았다.
창호지 사이로 점점 인영이 다가왔
다.
희미한 그림자가 문 너머로 너울거 린다.
똑똑. 그림자가 문가를 두드렸다.
저게 뭐야.
귀신인가? 아니, 자라리 귀신인 게 낫나.
'아냐. 무서워!'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작은 종을 손에 쥐었다.
•••거기 누구나.”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바 로 종을 울릴 생각이었는데, 다정한 목소리는 내게 말을 걸었다.
“아비란다, 산야.
••하고
내가 주저하던 사이 그림자가 또 일렁였고,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문이 드르륵 열렸다.
순간 흠칫 떨 만큼 놀랐던 나는 문 가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반대로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본 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이 나 지는 않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기윤 여란.
이 몸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작중 최종 보스였던 사람.
'이게 다행이라니 참••• 착잡하지만 정말 그랬다. 나는 엄청 난 힘을 가진 살수인 줄 알았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1- 권 쥐었다 폈다.
작은 손이 덜덜 떨렸다.
'놀랐다.'
E-갂장이라도 안겨서 반가워해아 하 는데, 너무 놀라서 몸이 잘 안 움직 여졌다.
그런데 당연하잖아. 살수 내지 귀신 인 줄 알았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말간 눈으로 그 를 바라보자 기윤이 찡그리듯 웃었 다.
“그간 참으로 격조하였지요, 공주
마마. 아니,” 기윤이 잠시 말을 멈추고 먹먹함을 달래듯 숨을 참았다. 그러고는 아련 하게 웃는다.
0 으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사랑하는 아비 지라면 눈물 두 방울쯤은 홀릴 만한 감동적인 대사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라면 내게 기윤은 완전 한 타인이며, 대부분의 감동적인 말 드 0
근 1- 제정신인 상태에서 들으면 상 당히 오글거린다는 것이다.
공주 마마, 아니. 산아•••
'염병하네.'
두려움에 떨던 긴장 상태가 풀린 것은 좋지만 이번엔 다른 쪽으로 문 제가 되었다.
아니지,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
나는 지금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고 천진한, 아빠를 오랜만에 봐 마냥 기 쁜 여덟 살 꼬맹이다.
“아버지•••
제법 극적이다. 찡그리듯 슬쩍 하품 해서 눈가도 촉촉했다. '누가 걱정했어.' 연기가 천직이었던 걸까.
당연하게도 정말 그가 달갑지는 않 았다.
궁주(宮主)는 나인데 손님을 마주하 는 주인 같은 태도도 같잖0갔고 번드 르르한 면상도 재수 없다.
하지만 나는 활짝 웃었고, 기윤 또 한 웃으며 내게 팔을 벌렸다.
완벽한 부녀의 정경이다. 연기력은 가문 내력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뛰어가려다 치맛자락 을 밟아 휘청했고, 그 모습에 기윤이 놀란 얼굴로 팔을 뻗었다.
나는 안정적으로 그의 품 안에 폭 들어갔다.
기윤은 웃으며 나를 안아 들었다.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격이었는데 힘 들이지 않고 무 뽑듯 쑥 들었다.
제법 사랑스러워하는 몸짓이었지만 아주 불편했다.
팔에 나를 앉히고 적당히 반대 손 으로 등을 받친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안아 줄 때 와 확연히 다른 자세였다.
마주 보고 코알라처럼 꼭 안아 주 는 게 기본적인데, 기윤은 어떻게든 내게 손이 닿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무엇보다 딱딱하고 차갑다. 사람 살 결 같지 않게.
다행히도 그 섬뜩하고 불편한 느낌 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윤은 금세 나를 의자에 내려 두 있고, 본인도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기윤과 마주 앉은 탓에, 그리고 내 가 햇볕을 등진 덕에 그의 얼굴이 잘 보였다.
나는 빙의 첫날 잠깐 보고 말았던 기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초리가 조금 올라간 눈.
얇은 입술.
전체적으로 선이 고운 미인이다.
다른 것이라곤 아이보리에 가까운 연갈색 머리카락뿐, 나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서라국에서 흑발은 황족의 상징이 기도 했지만 평민들이 가장 많이 가 지고 있는 색이기도 했다.
제가 다스리는 백성들의 편에 선다 는 식으로 해석되어 황족의 흑발은 오히려 칭송받았지만, 귀족들에게는 천한 것들의 색인 흑발이 부끄러운 것이다.
'산아의 머리색은 여란 가의 사생 아였을 때에는 어미가 천한 피라는 반증이었다.
황궁에 나를 밀어 넣을 때는, 그리 고 내가 공주가 될 때에는 황족의 피가 섞였다는 의미가 되어 도움이 있겠지만.
“아비가 자주 들여다보았어야 했는 데 그러질 못하였구나. 그간 평안했 느나?”
기윤이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나 는 활짝 웃어 보였다.
“예, 그럼요. 아버지가 조금 보고
싶었지만•••••• 괜찮았어요.” 내 대답에 기윤이 나를 보는 시선 이 에잔해졌다.
“아비에게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산야.”
그건 내가 기윤에게 할 수 있는 말 중 드물게 진심인 말이었지만,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다른 의도를 위한 밑밥일지 도 모르고.
“네가 입궁할 때에 시비 하나 들려 보낸 것이 못내 마음이 쓰였단다. 사 가에서 네 시중을 들었던 이들을 보
내 주마.”
'안 되는데.' 그렇게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라면 내가 입궁할 때에는 왜 외면했 나고 묻는 것은 덮어 두더라도, 호의 든, 아니든 내 궁녀들이 여란 가의 이들로 바뀐다는 건 곤란했다. “아버지, 지금 궁녀들도 제게 무적 공손해요. 그리 무리하지 않으셔
“산야. 내 거짓을 고하지 않아도 된 다 말하지 않았느냐. 네게 공손한 이 들이 그 아비인 내게 그리도 방자할 개”
상냥하게 나를 달래던 기윤이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섭도록 섬뜩해졌
다.
“아비 말을 듣거라. 응?” 다시 다정하게 달래는 말에 나는 새삼 무언가를 깨달았다.
'저게 협박일까, 회유일까.'
만약 협박이라면, 내가 거부할 수 있을까?
나는 이능이 없고, 기正0 0 이능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와 독대하고 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간 이 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갈 수도 있겠구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이다. 빙의 초, 미리내의 앞에서 했던 긴 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산야?” 그래. 난 공주고 이건 취미다.
나는 뭣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되 되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진짜 공주이니 반은 맞는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지만 태연하게 대 꾸하려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 폐하께서 내려 주 신 궁녀들인걸요••• 우물쭈물 대답하자 기윤의 눈동자 가 미묘해졌다.
내 처분을 고민하는 것만 같아 손 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나는 기윤이 그 말에 물러 날 거라 생각했다.
원작에서도 그는 '산아'가 다른 후 들을 증오하게 했지만, 황제만은 원망하지 않도록 안배했다.
괜히 '산야'가 천등벌거숭이처럼 날 뛰어 황제를 능멸하기라도 하면 곤 란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윤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동궁께서 어찌 지내시는지 들여다 보지도 않으시다니. 폐하께서 참으로 무심하시구나.”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 답했다.
그에게 무어라 물으려던 순간, 기윤 이 기묘하게 웃었다.
그 서글픈 웃음은 얼핏 비웃음처럼 보였다.
“이런. 손님이 오셨구나.” 느긋한 그 말이 끝난 순간,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