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에는 아주 작았다. 내 허리춤에 도 오지 않을 기였다.
이유조차 밝히지 않고 사라졌던 '산야는 내가 반가운 듯이 웃고 있 었다.
그 환한 얼굴에 속이 뒤틀렸지만,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버려 두었던 기억을 봤어.”
아이의 말간 눈동자가 나를 향했
다. 그 애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아.”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 에 울려 퍼졌다.
그래. 당연히 알고 있겠지.
어릴 적에도 너는 사라졌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너는 나의 기억이고, 내 과거 이며 나니까.
“이제 날 기억해 줬구나.” 내가 버렸던 어린 시절의 내가 웃 는다.
제가 무슨 일을 당한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바보같이.
“뭐가 좋다고 웃어?”
그런 그 아이가 참을 수 없이 끔 찍했다.
“년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어. 네 아버지에게도, 황제에게도, 심지어 너 자신에게도!”
소리를 내지르자 아이의 웃는 얼굴 이 굳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리려는 얼굴이 기괴하게 보였다.
“그래도.”
“너는 행복하잖아.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아이는 절박해 보였
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물음은 두 번째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같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행복하지 않아.
“너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어.”
과거의 기억이, 이린 시절의 내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가없고 지 긋지긋한 저 아이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네가 너무 끔찍해.”
이를 악물고, 씹어뱉듯 말을 내뱉 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서 널 지워 버리고 싶어.”
실제로도 이미 시도했었지. 지금껏 잊고 살았으니.
내 말에 아이가 입술을 파르르 떨 었다. 유약한 그 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그냥, 사랑받고 싶었던 게 내 잘 못은 아니잖아.”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산 게 아닌데•••
절박함과 서러움이 섞인 눈으로 나 를 바라보던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울기라도 하는지 어깨가 잘게 떨렸
다.
그 나약함이 보기 싫었다. “그럼 죽었어야지.”
“그때 죽었으면 얌전히 사라졌어야 지. 대체 왜 아직까지 깨어 있었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질기게도 살아남아 결국 내 앞에 섰다.
그래. 내 원망이 향한 곳은 결국 나였다.
이번 생에서 황제는 처음부터 전생 을 기억하지 못했다.
바뀐 것은 나 하나였다.
첫 번째 생에서 모든 것을 망친 게 나이듯이.
아이가 눈물을 그쳤다. 나와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절망스러웠다. 잔뜩 구겨져 볼품없는 아이가 상처 받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애처롭지 않은 것은 아 니었으나, 그 아이를 연민하기에는 나는 그 에를 너무나 증오했다.
바보처럼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 는 사람에게 헌신하고. 멍청하게 사랑을 구걸하고.
지나간 시간 속에 남지 못해 결국 이 사달을 만들었다.
결국 너 때문이다.
네가 사라졌다면, 내가 그 기억을 볼 일도 없었을 텐데.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다 괜찮았을 텐데.
다시 떠올려 낸 13년의 세월들이 수치스럽고, 끔찍하고 지긋지긋하다. “너는 태어나지 말0갔어야 했에”
아이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있 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 이 막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 국 닫았다.
그리고, 새하얗던 공간이 찢겼다. “산아!”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새빨개 진 회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아가. 네 잘못 아니야.”
황제가, 엄마가 허겁지겁 아이를 끌어안았다.
작고 볼품없는 아이가 힘없이 그녀 에게 허물어지듯 안겼다.
나는 뺨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산야. 네 잘못 아니야. 년 잘못한 게 없어.”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 등을 끌어안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
렸다.
“아가. 엄마가 미안해. 엄마 잘못이
떨리는 목소리가 젖어 있다. 어떻 게든 나를 보듬으려는 것처럼 엄마 가 나를 쓰다듬었다.
“네가 왜 태어나면 안 됐던 사람이 아.
“네가 얼마나 소중한데, 왜 그런 말을 해•••
단단하던 엄마의 말끝이 흐려진다.
나는 그녀를 마주 안았다.
“알아요.”
저 미안하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 과 같다는 것도, 내가 소중하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서 원망스럽지만, 그 렇기 때문에 원망하고 싶지 않0갔다.
“그런데, 내가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어요.” 내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품이 여전히 든든 하고 따뜻했다.
“날 속인 엄마가 미운데, 왜 그랬 는지도 이해해요.”
첫 번째 생에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용의 저주 탓에.
이번 생에서는 내가 괴로울 것을 염려한 탓에.
당신의 잘못은 없다. 그걸 알고 있 어.
“그래서 정말 미워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하나도 잊혀지지가 않아
요.”
미안하다, 하고 말하던 그 부드러 운 목소리.
안타깝다는 듯이 웃고 있던 얼굴.
언제나 등을 보이던 사람. 그 모든 것이 칼날이 되어 계속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그게 내 탓이잖아 요.”
“내가 좀 더 똑똑했다면, 좀 더 친 절했다면 모두가 날 좋아해 줬을 거 예요.” 속이 답답했다.
울고 싶은데 눈가가 금세 메말랐
다.
엄마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어깨 가 축축해졌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산야.”
엄마가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 습이었다.
“네 태도가 어떠했든지, 누구든 너 를 보살펴야 했어.”
“어린아이의 미숙함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니•••
“나를 원망해, 아가. 얼마든지 그래 도 괜찮아.”
“하지만 너 자신을 미워하지는 마.
엄마는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을지 못하는 나를 대신하듯 이 아주 오래 울었고, 나는 그 품에 오래도록 안겨 있었다.
산야가 돌아왔다.
연락이 끊긴 지 꼭 2주가 된 날이 었다.
모두가 그녀의 귀환을 반겼지만, 돌아온 산아는 모두가 기억하던 명 랑한 공주가 아니었다.
흑단 같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 어 있었다.
몇몇은 천룡의 등장이라 기뻐했 으나, 그것은 산아의 상태에 금세 사그라졌다.
돌아온 산아는 웃지 않았다.
일평생을 살았던 제집이 무엇이 그 리 두려운지 늘 불안한 얼굴이었다. 궁 내의 모든 이들은 산아를, 성년 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린 공주를 사 랑했다.
그들은 산야를 염려했지만, 산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이 집거했 다.
공주의 어머니인 황제도, 다른 후 궁들도 그녀를 달랠 수 없었다.
유일하게 곁에 두는 이는 호위 하 나였지만, 그조차도 산아의 상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자 자자 산아는 방 밖으로 나섰다.
장백하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았 고, 궁녀들에게 웃어 주기 시작했다. 즐겨 찾던 후원에 다시 발걸음했 고, 여러 연회에도 참석했다.
여전히 칩거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 해 주지 않았지만, 산아는 떠나기 전과 흡사한 상태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것에 안심했지 만, 산야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이 들은 그렇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산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산아와 대부분 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들에게는 달라진 모습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여전히 산아의 눈에는 종종 매서운 원망이 스쳤다.
새하얘진 머리칼에 대해 언급하기 만 하면 낯빛이 장백해졌고, 황제를 알현하는 횟수가 극도로 줄어들었 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야의 병이 재 발했다. 밤이 되면 산야는 궁 안을 돌아다 넜다. 단순히 잠들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 었다.
말을 걸면 대답이 돌아왔던 이린 시절과 달리, 이제 산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를 향하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 답하지 않은 채로, 정처 없이 걷다 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 그 자리에 잠들었다.
낮의 산야에게 밤의 일이 기억나나 물어도 산야는 영문을 모른다는 일 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그 말간 얼굴을 보며, 동궁의 궁인들은 속이 새카맣 게 타들어 갔다.
산아는 한 번 부서졌던 톱니바귀 같았다.
잘못 끼워 맞춘 탓에 자꾸만 기이 한 소리가 났다.
산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알 고 있다.
하지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또다 시 부서진다면?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산야도, 다른 이들도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근근이 이어 가던 평화였 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동궁을 찾 았다.
황제의 방문을 고하자 산야는 이두 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서 대륙에서 돌아온 이후 황제의 방문을 거절하던 산아였다.
궁인들이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라 며 한숨을 삼켰을 때에, 방문이 열 렸다. 궁인들이 놀란 얼굴로 문가를 바라 보았다.
근래 들어 매일같이 동궁을 찾지만 산아의 거절에 늘 돌아가던 황제였 다.
예화는 덤덤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딸아 이를 보며 설핏 웃었다.
“네게 꼭 해 줄 말이 있이 왔으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