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는 달빛이 새하얗게 내려온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그렇게 생각했 다.
몸이 가만히 있어도 덜덜 떨렸다. 처음에는 이불을 잘못 덮은 줄 알고 한껏 끌어다가 덮었는데 그래도 여 전히 추웠다.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극심한 추위 였다.
목이 부어 침을 삼기는 것도 힘들 고, 위장은 다 뒤집어져 울렁거리고 아프다.
아직 추운 날씨에 밖에서 뛰어놀 고, 불편한 상대와 긴장해 가며 음 식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산야의 몸이 약하기도 했고, 나는 원래부터 스트레스성 위장 장애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게 고스란히 위로 가는지, 금세 얹혀서 명지를 맞은 듯이 아프고는 했다.
몸이 바뀌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몸의 문제가 아니었군.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어떻게 체할 수가 있을까.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절절 끓는 몸을 가까스로 일 으켜 환한 장에 커튼을 졌다.
얇아서 치나 마나일 것 같기는 했지만, 창살에 종이를 바른 장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겨우 그걸 움직였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열이 꽤나 많이 나는 모양이다.
매섭도록 찬 손을 이마에 올려 보 니 얼음이 녹을 만큼 뜨거웠다.
손은 차고, 이마는 뜨겁고. 물수건 필요 없겠다. 이렇게 이마에 손을 대고 있으면 괜찮겠네.
굳이 사람을 부르기는 싫었다. 어 찌 되었든 나는 이 궁의 주인인데, 아프다고 누군가를 깨우면 단번에 난리가 날 것이다.
굳이 황제와 다른 후궁들의 귀에 들어갈 텐데,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무엇보다 나는 궁녀들이 어디에서 자는지 몰랐다.
싸늘한 복도를 헤매다가 쓰러지는 것보다는 가만히 열이 내리기를 기 다리는 게 나았다.
어렸을 때에도 가끔 이렇게 아팠지 만 하룻밤이면 금세 털고 일어났다. 일시적인 것이니 금방 낫겠지.
그대로 침상을 벗어난 나는 화로 앞에 쭈그려 앉았다.
화로는 따뜻했다. 불씨를 오래 남 게 하려고 무슨 조치를 해 놓은 모 양이다.
그 앞에 조금 더 앉아 있고 싶었 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자꾸만 몸이 휘청였다.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해 그 위로 얼굴이라도 박는다면 큰일이다.
나는 다시 일어나 침상에 비척비척 누웠다.
열이 오른 몸에 다 식은 침상이 따끔거릴 만큼 차가웠다.
열이 나니 이불을 덮을 수도 없었 던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차가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이 튀어나 올 것 같았다.
그래도 그게 마냥 나쁘지는 않0갔
다.
'잡아야. 아직도岬己/ 많이 아까?
일가가 사고/ 77b/ 풀까?'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 다.
아플 때에는 엄마 생각이 났다. 그 러니까 좋았던 시절의 엄마 생각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열이 낮에도 떨어지지 않는 내게 엄마가 죽을 끓 여 줬었다. 구수한 누룽지로 끓인 죽. 반찬은 멸치 볶음.
그 날은 엄마가 일하러 나가지 않 았다.
내내 내 옆에서 손을 잡아 주고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아주 좋아서, 일부러 더 아프고 싶을 때도 있었
다.
아플 때마다 그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는 하도 곱씹어 너덜너덜해진 기억이다.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더 이상 엄마 가 없다는 것.
나는 몸을 더 꾹꾹 말았다. 작은 몸이 금세 공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어린아이의 몸은 이게 좋0갔다.
얼른 자야지. 아프면 꿈도 꾸지 않 고 자는 것은 내 버릇이었다.
어차피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날 테지만, 엄마 꿈은 꾸지 않았으 면 좋겠다.
그건 깨어났을 때 너무 슬프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꾹 감 았다.
머릿속이 뿌옜다. 더운 것도 같고 추운 것도 같았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장밖을 바라보았다.
새파랗던 달빛이 어느새 노랗게 변 해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상태고?
멀리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 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내가 아픈 걸 아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내가 아직 이 불 속이면 이미 궁녀들이 왔다 갔다 는 거지.
눈을 다시 감으려는데,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입가에 끈적한 액체가 묻은 숟가락이 와 닿았다.
침을 삼기는 것만으로도 목이 너무 아픈데, 저걸 삼길 수 있을까? “마마, 제발. 드셔야 합니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서연이라 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서연이었지만, 아주 어릴 적의 우리 엄마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힘겹게 약을 받아먹었다. 쓰디쓴 홍삼 같은 약이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마와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 껴졌다.
코끝이 시큰한데 눈물이 나질 않았 다.
얼마 되지 않아 또 북적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쩔쩔매는 목소리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무래도 •••께오서 드
그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왜 내 목이 이렇게까지 붓고 입술이 이렇 게나 갈라졌는지 알았다.
어제 미리내와 함께 한 식사에서 먹은 것 중 하나에 알레르기를 일으 기는 게 있었구나.
지금까지 잘 참아 왔던 울분이 몸 이 힘드니 조절이 되지 않았다.
나는 아픈 와중에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끝까지 도움 안 되는 새끼. 언잔1가 널 고아서 용봉탕을 끓일 거야••• 머리는 어질어질한데 배는 더 아파 오기 시작했다.
위장을 비틀어 짜내는 듯한 고통에 나는 몸을 웅크렸다. 스트레스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맹장이면 어떡하지?
이 세계에서 배를 쨀 수도 없고, 그냥 두면 복막염으로 번질 텐데.
아, 몰라. 아파.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는지,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사락사락, 하고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윽고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작은 허밍 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익숙했다.
노래를 듣자마자 부은 목이 가라앉 았다.
몸이 풀어지는 기분에 나는 축 늘 어졌고, 힘을 뺀 복부에서 더 큰 고 통이 몰아닥졌다.
아파서 몸을 웅크리자 앞에 서 있 던 미리내가 당황해 주춤 뒤로 물러 섰다.
어째서 내가 아직도 아픈지 모르겠 는 모양이다. 고쳐질 리가 없지.
미리내의 치유력은 몸에만 국한되 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가.
미리내의 힘에 고쳐지지 않는다면 맹장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뒤로도 허밍 소리가 몇 번 더 들렸고, 나는 아까의 고통을 겪지 않으려 몸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만, 그만하고 저리 가. 나,
그리고 나는 까무룩 기절하듯 잠들 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조용하다가. 시끄러웠다가. 쓰디쓴 약을 한 번 더 받아먹었을 때 눈을 찌르듯 쨍하던 햇살이 모습 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방에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 이마에 느을 대었다.
깨질까 조심스러운 손길에 나는 눈 을 반쯤 떴다.
아직도 머리가 아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착잡해 보이는 회녹안이 흐려진 시 아에서도 금세 들어왔다.
황제였다.
그녀는 죄책감에 점철된 얼굴로 나 를 계속해서 쓸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나는 멀 찡하니 이만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 있으나, 내 몸 상태는 빈말로도 그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미안하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혼인 연회 날 나를 꿇려 놓은 것?
접시에 이상한 과일들 층층이 쌓아 둔 것?
물론 잘못이긴 하지만, 왜 이제 와 서?
“괜찮아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내가 생각 해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그러니까 찾아오지 마.
난 죽기 싫어.
네가 그 후궁들과 주지육림을 자리 든 말든 아무 상관없으니까•••
“저리, 저리 가•••
열에 취해 목소리가 횡설수설 나갔
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 필터링 없이 입으로 뱉어지려 했다.
너 여기 있는 거 동네방네 소문 다 날 거잖아.
네 궁에 가. 아니면 후궁들한테 가.
뭐가 됐든 좋으니까 여기서 나
간신히 입을 다물고 있는 내게 황 제가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아무것도 없이.” 뭐가, 뭐가 괜찮아. 뭐가 없어.
네가 여기 있으면 하나도 안 괜찮
저리 가. 얼른 나가•••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입을 웅얼거 렸다.
황제가 내 이야기를 들으려 고개를 숙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리 가
“쉬이. 괴물은 없어.”
원 괴물 타령이야. 너. 너 말이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작태에 벌컥 화가 났다.
아프지만 않았다면 일어나서 소리 를 질렀을 것이다.
아니, 아프지 않0갔다면 이럴 일도 없었으려나.
또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벌써 저녁인 걸 보면 하루 종일 잔 것 같은데 또 잠이 왔다.
나는 그리 저항하지 않고 졸음에 몸을 맡겼다.
대신 부호의 유언을 들으려 준비 중인 서기 같은 황제에게 마지막 힘 을 담아 속삭였다.
일어났을 때 황제가 내 손에 머리 를 기대고 자고 있지 않게 해 주세 요.
나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그렇게 빌며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