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이 돌아온 뒤에도 내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고 운이 내 옆에 늘 있게 된 것이다. 책장을 넘기던 나는 흘끗 뒤를 돌 아보았다. 무시할 수 없는 시커먼 그림자가 존재를 과시했다.
어릴 적의 나는 고운과 언제나 함 께 다녔다. 방에 혼자 있을 때나 잠 시 혼자 산책을 나갈 때에도 늘.
그건 어디까지나 고운에 국한된 일 이어서, 고운이 떠난 뒤에는 개인적 인 일을 할 때 곁에 누굴 두지 않 았다.
그렇게 11년을 살다 보니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원래는 아무도 없던 방에 시커먼 남자 하나가 멀뚱히 서 있으니 괜히 어색하다.
결국 나는 내 옆자리를 손으로 툭 툭 졌다.
고운을 부르려는 행동이었는데, 내 가 하고도 깜짝 놀랐다.
고운은 그걸 보고 곧장 내 옆으로 왔고, 나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재빠른 사과에 고운이 의아하단 일 굴을 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내가 이렇게 부른 거, 기분 나빴 지.”
말을 하면 되는 걸 손으로 툭툭 졌다. 꼭 강아지 부르는 것 같잖아. '어릴 때 습관이 이렇게 나오네.' 예전에 고운을 이렇게 불렀던 기억 이 어렴풋이 난다.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에기들도 강아지 부르듯 부르면 안 되지.
새삼스레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데, 고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본래 그리 부르셨지 않습니까.”
응. 그것도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도 괜찮다니 다행이라고 생각 하면서 나는 말을 골랐다.
뭔가 어색한데. 이야기할 만한 것 없을까.
“그동안 어찌 지냈어?”
서신에 적어 두었다고 말할 법도 한데, 고운은 성실하게 내게 답변해 주었다.
무탈하였습니다.”
“특별한 일은? 밥은 잘 먹었어? 잠은 잘 잤고?”
“예. 살펴 주신 덕택에 평안했습니
다.”
작게 웃으며 한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나는 괜히 머쓱해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어릴 때도 고운은 과묵했고, 대부 분 내가 말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은데 왜 이렇 게 어색할까.
반야일 때에는 상대가 말을 하든 말든 내가 신나서 떠들었으면서, 정 작 그렇게나 기다렸던 고운과는 서 먹하다는 게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 다.
내가 기억하는 고운과 많이 달라졌
나. 내가 너를 너무 미화했을까. “정말 못 알아보겠다.” 나는 단식처럼 중얼거렸다. 어린에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 니, 11년의 공백이 정말 컸다. 어릴 때 얼굴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자세히 뜯어보면 보이려나.
나는 고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 다.
머리카락 색이 조금 더 옅어졌나? 여전히 회색이기는 한데.
사슴 같던 눈망울이 제법 날카로워 졌다. 입술은 여전히 붉은빛.
어릴 땐 아기 호랑이 같았는데, 크 고 나니 늑대 같네.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무거운 인상 이다. 과묵한 성정과도 꼭 닮았다. '그래도 눈 색은 똑같네. 새벽하늘의 청명한 색. 그 눈동자 속에 내가 그대로 비쳤다.
잠시 눈을 맞추다 시선을 돌리려는 데, 고운이 난처한 듯 살짝 시선을 피했다.
혈색 좋은 입술이 한 번 달싹이고, 귀 끝에 붉게 꽃물이 들었다.
그 눈동자와 다시 눈이 마주친 나 는 내가 고운과 제법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동자 속에 서로가 비질 만큼 가 까운 거리.
그러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법한.
나는 화드득 놀라 몸을 뒤로 젖혔 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너무 격하게 몸을 뒤로 젖혔는지 이번에는 몸이 휘청했다.
하필이면 앉아 있었던 의자가 등받 이가 없었다.
으, 넘어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꾹 감았지 만, 이어지는 고통은 없었다. “괜찮으십 니까?”
얼마 전 고운을 저잣거리에서 만났 을 때와 똑같은 말. 하지만 조금 더 놀란 듯한 목소리.
누군가 나를 끌어안아 지탱하고 있 었다. 나는 그게 누군지 인식하기도 전에 눈을 떴고, 더 놀라서 몸을 화 드득 떨었다.
고운이 아까보다 더 가까이 있었
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고운이 잠시 흔들렸고, 나를 붙드는 힘이 강해졌
다.
“어찌 그러십니까?” 다급하게 묻는 말에 나는 그를 밀 어내던 걸 딱 멈췄다.
어, 어. 그러게.
그냥 얼굴을 봤을 뿐이고, 넘어지 려는 나를 잡았을 뿐이다. 이렇게 털 뽑힌 닭처럼 날뛸 필요가 없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촉감을 깨달았
다.
고운을 밀어내느라 손이 고운에게 닿아 있었다.
그러니까 어깨에서 조금 아래에 있
'어디다 손을 대고 있는 거야?!' 깜짝 놀라 손 떼어 낸 나는 내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귀에서 북 소리가 울린다.
빚쟁이가 채무자 집 문 두들기는 소리도 이보다는 작을 것 같았다. “일단! 놔 줄래?!”
반쯤 삑사리가 난, 웃음으로 포장 했지만 당황이 여실히 느껴지는 나 의 말에 고운이 순순히 나를 놓아 주었다.
“무어 불편하셨던 것이••• “아나! 괜찮아. 아주 괜찮아!”
“얼굴이 붉으십니다. 몸이 안 좋으 신 것 아닙니까?” 고운의 그 말에 나는 양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댔다.
손등이 금세 뜨끈뜨끈해졌다. 얼굴 이 붉어졌다는 고운의 말을 면경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고운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야. 왜, 왜?
뭔데 이거?
“허니 부디 대책을•••
“태자 전하.”
“태자 전하!” 즈언하, 에 가까운 말투에 나는 퍼 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당 황했다.
대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부담스 러운 시선에 나는 는 을 도르록 굴렸
다.
“어젯밤 잠을 설겠니?”
엄마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 었다.
잠은 잘 잤다. 문제라면 몇 시간 전에 있었지.
고운과 있었던 일이 또 생각나려 했다. 나는 혀를 잘근잘근 깨물어 어떻게든 그 생각을 밀어 냈다.
아니, 사실 그 기억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왜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렇게 발광하느나지. “피곤하면 들어가 쉬려무나.” “아니에요. 경청할게요.”
지금은 강연 중이었다. 똑바로 집 중해야지.
지금까지는 비록 실패했으나, 나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부른 대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계림 지역에서 이능이 사라졌다는 상소가 올라왔사옵니다.”
“비단 계림뿐만이 아닙니다. 소화 와 천아 또한 상소를 보내왔사옵니 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표정을 굳혔다. 내가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안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본래 아기씨께서 나타나시는 해에 는 이능이 변덕스러운 것이 맞사오 나, 해가 갈수록 점자 회복되는 양 이 적어지고 있사옵니다.”
11년 전, 단순히 아기씨의 존재만 으로 납득했던 일은 생각보다 큰일 이었다.
서 대륙에서 그랬듯이 동 대륙의 이능 또한 점차 말라 갔고, 지금에 와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 고 있었다.
“용께서 주신 이능이 점점 사라지 는 것을 어찌 나라의 중대사가 아니 라 할 수 있겠습니까.” 노대신의 묵직한 목소리가 대전 안 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대책을 강구해아만 하옵니다, 폐 하.
엄마에게 말하면서도 내게 시선이 머무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강연에 참여할 때마다 대신들은 내 대답을 유심히 살폈다.
대신들이 질문을 한 것에 내가 답 하고, 그것을 그들이 평가하는 관례 는 없앴지만 여전히 그들은 다른 방 법으로 나를 평가했다.
다른 자손이 없고 황제의 총에 또 한 확실하니 내가 다음 황제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괜히 긴장되네.'
나는 숨을 한 번 삼기고는 얼마 전 문득 떠오른 생각을 뱉었다.
“서 대륙에 가 보는 것은 어떻겠 내 말에 대전의 분위기가 싸해졌 다.
노대신은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았고, 엄마조차 안타까운 눈을 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버럭 소리치는 것 같은 성량의 목 소리가 또 대전을 울렸다.
그에 나는 얼굴을 찔끔 찌푸렸다.
기실 이 말은 오늘 처음 꺼낸 말 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 말이 되지 않나.
동 대륙 내를 쥐 잡듯 뒤져도 되
는 일이 없다면, 서 대륙에도 가 봐 야지.
그곳에도 용의 유해가 있고, 마력 이라는 것을 알고 아티팩트를 만들 01능에 능하니까.
하지만 내 제안은 번번이 기각당했 다.
“서라국인이 서역에 간 일은 유래 없는 일이옵고, 초대 황제께서 엄금 하신 것이옵니다!” 그래. 저것 때문에.
서라국인은 서 대륙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그 오랜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대체 무엇 때문에 초대 황제가 그 걸 금했는지는 몰라도, 과거는 과거 고 현재는 현재지.
“언제까지 그 명을 붙들고 있을 겐 가. 이능이 없어진 후에는 무엇을 해도 늦어.”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되옵 니다, 전하.”
답답하다는 내 말에도 대신은 꿋꿋 이 말을 이어 나갔다.
“서라국인은 서 대륙의 땅을 밟을 수 없사옵니다.” 저 말도 이해가 안 간다.
황제의 이능이 언령인 마당에, 못 갈 건 또 뭐야.
반박하려던 나는 한숨이나 푹 내쉬 었다. 말해 봤자 돌아올 대답은 뻔 했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엄마가 내게 양도한 이능의 양을 가늠했다.
이 정도면 왕복 가능할 것 같은데. 나는 고민하지 않고 작게 무어라 중얼거렸고, 눈앞이 하얘지더니 풍 경이 바뀌었다.
황궁에서 광장으로 이동한 정도였 지만, 이곳이 동 대륙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건물의 양식과 사람들의 복색이 다 르다.
첫 시도였는데, 이렇게나 가볍게 성공하다니.
'그러면서 뭐가 안 된다고 한 거 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 았다. 내 화려한 동 대륙의 복색에 사람들의 시선이 점자 몰려들고 있 었다.
서 대륙만의 특징. 뭐가 있지.
그때, 내 눈에 과일 나무가 들어왔
다.
조롱박 모양으로 생긴 배. 서 대륙 에만 있고, 사절이 동 대륙으로 오 랫동안 오지 않아 서라국에 없는 과 일이었다.
배 하나를 딴 나는 다시 언령을 읊조렸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모두의 경악에 찬 시선을 받으며, 나는 손에 든 배를 흔들었다.
“다녀왔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