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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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다시 화룡궁을 찾았다. 이 번에는 조금 기가 죽은 채로.
사실 선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엄마와 말해 두었던 것이 있었
다.
'한 번 설득해 보겠다고 했지.' 황후가 황궁을 떠난다면 위험해질 거라던 엄마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 있다.
남아 있겠다고 하기는 했는데, 이
마주 앉고도 잠시 우물거리던 나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를 잠시 동안이라도 요 양을 보내드리는 게 어떨까요." 실패의 기색이 역력한 내 말에도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된다. 그의 이능이 황궁의 결계 유지에 꼭 필요하지 않느냐."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귀양을 가셨던 그 몇 개월 동안도 결계가 유지되었지 않나요?"
내 질문에 엄마가 찝찝하다는 일굴 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께서 귀양을 가신 것이 언제이지요?"
"지난 해 매듭달(12월)이지."
"이능의 이상, 그러니까 결계가 무 너지기 시작한 것은요?" 나는 서 대륙의 사신들이 불시에 등장했을 때 굳어지던 엄마의 일굴 을 기억한다.
꼭 전혀 예상을 못 한 것처럼 굴 있지.
그러니까 그때 알아챈 게 아닌가 싶은데•••
"아륜의 시작 후였지."
"허면 그전까지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씀이시지요?"
황후가 떠나고도 몇 달은 버텼다는 의미다.
선유가 돌아와 다시 결계를 강화했 을 테니 잠시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황후 폐하께서 오래 황궁을 떠나 계시라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 만 한 달. 적어도 보름만요."
"황후는 이미 요양의 명분으로 몇 달간 궁을 떠나 있지 않았느냐. 그 것이 어찌 비칠지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황후인데, 죄를 지 어 쫓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요양이라는 건 귀양을 덮기 위한 좋은 핑계였겠지.
하지만 선유를 이대로 두면 안 돼.
"폐하께서는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 세요."
그 또한 황궁에 오래 있었으니 제 지위와 무게를 알 것이다.
황궁에 남겠다면서 폐위를 시켜달 라 청하는 건 다소 무모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 몇 마디에 눈물이 터질 만큼, 충동적으로 폐위를 청할 만큼 그는 아직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아 하나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처한 상황을 예를 들어 보자면, 제가 죽은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가 단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죽어 가면서 엄마를 애타게 찾았는데, 엄마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절 돌보지 못한 거죠. 제가 죽 고 나서야 그 관심사가 사라진 것이 고요."
내 설명을 엄마의 얼굴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이나?" "그럼요.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상처는 언젠가는 낫는다.
다만 그게 선유에게는 지금이 아닐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치료 시기가 중요한 것은 똑같다.
아직 아물지 못한 사람을 데려다 상처를 방치하고, 또 헤집어 두면 어떻게 낫겠어.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누이를 애도하고, 자괴감을 떨쳐 내 고 다시 일어날 시간이.
'이대로 황궁에 뒀다간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감정적인 사람은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기 쉽다.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너무 미워 진 나머지, 다른 귀족과 결탁하기라 도 하면 어떡해.
완전히 선유를 걱정하기만 해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건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소리도 못 내고 가만히 우 는 게 너무 슬피 보였으니까.
선유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나 는 조용히 생각했다.
"황후에게 누이의 죽음이 그런 의 미일 줄은 몰랐구나."
엄마가 조용히 중일거렸다. 그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 있어 나는 그게 조금 신기했다.
"이제 아셨으니 됐지요. 잘못이 있 으면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 사죄하 면 되는 것이고요."
풀 죽어 있는 모습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았다.
어설픈 내 위로에 엄마가 웃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엄마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했 던 게 엄마 탓은 아니잖아. 어설프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며 나는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 다.
말을 좀 돌리고 싶은데, 뭐 좋은 거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마침 물어보려 했던 것이었다.
"후천적으로 이능이 생긴 자를 혹 시 아시나요?"
난데없는 질문에 엄마가 당황했지 만, 금세 진지하게 고민했다.
"글씨1. 나도 아는 것이 없구나." 생각을 돌린 것은 좋은데, 내가 기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조금 실망했다.
내심 알고 있을 줄 알0갔다.
"아예 없었나요? 서라국의 역사 내 내 단 한 번도?"
힘없이 중얼거리자 엄마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금서실에 가 보련?"
'장서관의 첫 헌찌/ 서고의 전/ 헌까// 책장을 찾아라.
나는 엄마의 말을 복기하며 장서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지 공기가 깨 끗했다.
'그 책장의 책들 중 붉은색의 비 단을 씌운 책 두 개, 푸른색의 비단 을 씌운 책 세 개를 뽑고 나면.' 붉은 책 두 개, 그른 책 세 개.
아, 이거 생각보다 무겁다. '문 하나가 나올 거란다.' 뽑아 든 책을 들고 끙끙대던 나는 정말로 나타난 문을 신기하게 바라 보았다.
책장이•••••• 뭐가 아래로 내려가고, 뭐가 올라가고 해서 어떻게 된 것 같은데.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다.
들어가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고 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운이 내 잡더니 자연스레 자신이 앞장섰다.
'데려가도 괜찮다고 했지.' 중요한 서류들이 있는 곳이라고 했 지만, 고운의 출입 또한 허락받았으 니 괜찮겠지.
불빛 하나 없는 계단을 천천히 내 려가자 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 다.
나는 고운에게 등불을 비춰 달라 부탁하고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능이 존재하는 세계이지만 아이 러니하게도 금서실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자물쇠를 따고 문을 손으로 밀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운의 손에서 등불을 받아 들자 고운이 문을 밀었다. 문은 언 제 그랬냐는 듯 잘만 열렸다.
장서관이 그랬듯 금서실도 보존 상 태는 뛰어났다.
쿰쿰한 먼지 냄새도, 지하실의 눅 눅한 공기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크고, 책도 많 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궁녀들 시킬까?
되먹지 못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 들었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금서실에 아무나 들일 수도 없을뿐 더러, 이 많은 책들을 영문도 모르 고 뒤져야 하는 궁녀들은 무슨 죄 아.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 을 거야.
이중 이능에 대해 쓰여 있는 책들 만 보면 되지.
실록부터 한 번 쭉 훑고, 그다음에 이능에 관련한 책들을 찾아보자.
애써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고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책들이 어떤 식으로 분류되이 있는지 쓰여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
아. 같이 찾아 줄래?"
고운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했 다.
맑은 눈동자로 고민하지도 않고 대 답하는 모습에 내가 상전이니 못 하 겠다는 말도 못 했겠다 싶어 조금 미안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찾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운이 얇은 책 하나를 가져왔다. "찾았습니다."
"벌써?"
놀라 받아 들자 정말 분류표였다.
그것도 꽤 세세하게 적힌.
어떻게 찾았담. 엄청나잖아.
나는 고운을 칭찬해 주고는 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근데 왜 이렇게 많아.
나는 그득한 책들 사이에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서라국은 대륙 자체가 한 나라였 고, 아륜 왕조가 건국 때부터 이어 져 온 만큼 역사가 깊었다.
즉, 실록의 양도 어마어마하다는 의미였다.
이능 찾는 방법 알기 전에, 이거 뒤지다가 내가 먼저 죽겠는데•••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나, 나는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아무렴 책 읽다가 죽기야 하겠어.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다 보면 언젠가는 보이겠지.
"고운, 자꾸 부탁해서 미안한데. 이 번에도 한 번만 도와줄래?" 도저히 혼자 할 엄두는 안 난다.
어렵사리 고운에게 그렇게 묻자 고 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의아한 얼굴이어서, 나 는 피식 웃었다.
"월 찾나 싶어?"
"아닙니다. 그저 어찌 제게 부탁하 시나 싶어••• 그렇게 묻는 고운의 말에 나는 말 문이 막혔다.
"왜 부탁하나니?"
•••명령하시면 그것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내 얼굴이 굳자 고운이 눈치를 보 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가 말갛다.
신분제란 참.
뒷맛이 쌌다. 나는 웃으며 고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에게 명령하지 않을 거야."
어째서요? 하고 묻는 듯한 눈이었
다.
"너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담담히 내뱉은 말에 고운이 잠시 동안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지그시 제 입술을 깨물었다.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 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에 함부로 명령하고 싶지 않다
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앞선 이야기이니 까, 우선은 이 정도로 괜찮겠지. "하여튼, 도와줄래?"
재차 묻는 말에 고운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뒤를 돌아 걸어가는 모습이 영 이 상했다.
'오른손이랑 오른발이 같이 나가 네.'
그래도 멀쩡히 책을 펼쳐 보고 있 는 걸 보니 아프지는 않은 것 같고.
口0 으 1-노 - 0 나는 본격적으로 실록
을 꺼내 들었다.
'하다 보면 다 읽을 수 있겠지,
뭐.' 그리고 몇 시간 뒤.
나와 고운은 그대로 금서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니, 안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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