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황했다.
왜, 왜 안 되지?
처음엔 용이 막았다지만, 지금은 가라고 먼저 말했었는데.
나는 황망히 바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그
하안 풍경은 여전했다.
이 동굴 안에서는 이능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능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적 으로 흩어진다.
그 양이 아주 적어 굳이 고려하지 않았는데.
내가 기억들을 볼 동안 바깥의 시 간이 너무 오래 흘러 버린 건가?
내가 본 기억은 족히 몇십 년은 걸렸다. 설마 그 시간들이 모두 흐른 거 라면•••
'안 돼.'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만 남겨 두고 모두가 몇십 년 의 시간을 앞질러 갔다는 건 상상 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능이 없으면 돌아갈 수가 없잖아.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새하얗기만 한 바깥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저기로 나가면 되는 걸까?
용과 이야기하기 전에는 불가능 했지만, 이제는 바뀌었을지도 모른 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입구 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0 .
손끝이 닿았고, 나는 소스라쳐 곧 바로 손을 떼었다.
'저게 뭐야?'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었다. 흰 무언가는 풍경이 아닌 벽이었다. 그렇지만 평범한 벽은 아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소름 끼 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저건 건드리면 안 돼.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나는 미련 없이 그것에서 돌아섰 다.
여전히 넓은 동굴의 정경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이능도 없고, 출입구는 닫혔다.
이것만 보자면 이 동굴 안에서 평생을 썩어야 할 것 같지만, 다행 인지 불행인지 방법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용을 다시 찾아가는 것.'
이능이 다 떨어져서인지, 이 동굴 안에서는 이능을 쓸 수 없어서인지 는 모르겠지만 용은 그 모든 것들에 서 자유로울 것이다.
찾아가서,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
아, 정말 싫다.
제 이름을 아냐며 나를 올려다보 던 용의 흐린 눈동자가 다시금 떠 올라 양심이 아팠다.
아무리 타인의 고통이라지만 정도 가 있지.
이건 가장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 다.
철면피 내지 쓰레기가 되어야 하는 건 아륜 가의 핏줄로 이어지는 운명 인가?
방금까지 굉장히 깔끔하게 포기하 고 푹 쉬라고까지 빌어 줬단 말이
하지만 그래 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대로 이곳에 남을 수는 없으니, 정말 미안하지만 딱 한 번만 더 부탁하자.
나는 한숨이나 한 번 더 내쉬고는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이 그리 크지느 1- 이으 1- 거2' 같은데.
초행길이라 그렇게 길게 느껴졌 던 건지, 구슬들의 방에서 입구까 지의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얼마 걷지 않아 투명한 구슬들이 떠다니는 방이 보였다.
구슬 속에 비지던 황제는 사라졌 지만 여전히 구슬은 반짝였다.
커다란 비눗방울 같은 구슬들과,
한구석에 천으로 덮여 있는 볼록한 것
아마 저게 용이 이 동굴에서 지 냈던 기억일 것이다.
그 구슬은 유독 다른 것들보다 작았다.
다른 구슬들은 지름이 족히 50cm는 되어 보이는 것에 비해 손바닥 안에 들이올 법한 크기였 다.
'기억의 크기와 비례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나는 금세 그것에서 시선을 거두 었다.
보지 말라고 한 것엔 이유가 있 을 테니 볼 생각도 없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저것이 아니니까.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깊숙 이 들어갈수록 동굴 안은 어두워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는 동굴 안이 제법 섬뜩했다.
소리 내 부르고 싶지만 이름도 모르는 데다, 용이 어떤 상태인지 를 몰라 섣불리 부를 수가 없었다. 처음 이 동굴에 나를 데려온 용 과, 내가 실수로 구슬을 만져 기억 을 본 뒤의 용은 태도가 달랐다. 전자는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고, 후자는 삶에 지친 노인 같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전자가 훨씬 더 두려웠다.
천진한 용은 순수한 만큼 잔인했 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을 모두 잊은 그는 선악의 구분조차 없었다.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고운을 죽이려 했고, 내가 아륜이 아니라 는 걸 깨닫자마자 나를 방지했다.
내가 아직 남아 있을 때 돌아가 라던 용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을 잠시나마 되찾았지만 그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또다시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도와달라고 귀찮게 했다간 망설임 없이 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륜이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고.
'애조에 속일 수나 있나 싶지만.'
지체해선 안 된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무리 깊숙이 들어가도 인기척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거의 뛰다시피 걷던 나는 결국 우뚝 멈춰 섰다.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제대 로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두웠다.
숨죽여 집중했지만, 숨 쉬는 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눈이 어둠에 적응할 시간을 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 러보았지만, 여전히 용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뒤를 돌아 희미한 빛 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입구의 벽
에서 나는 빛이었다.
'물리적으로 찾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아까 사라질 때도 전조 없이 눈 앞에서 사라졌었다.
그만큼 자유자재로 이능을 사용 하니 동굴을 뒤지는 것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한참을 걷던 나는 우뚝 멈춰 섰 다.
어느새 많이 환해진 시야에 이제 익숙해진 것이 보였다.
허공에 등등 떠다니는, 투명하고 큰 구슬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구 슬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들끼리 유유히 떠다니는 구슬 드 0
보며 나는 속으로 용에게 사 과했다.
내가 저 구슬을 만지고 다시 그 기억들을 본다면, 용은 일부러 묻 이 두었던 제 아픈 과거를 다시 마주해아 하겠지.
하지만 이것 외에 그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된다면 용이 잠시 라도 제정신이 들 것이고, 아까처 럼 이곳으로 올 테니까.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나도 이러고 싶지가 않은데,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망설였지 만, 결국 가장 앞에 있는 구슬에 “을 뻗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투명한 구슬에 거울처럼 무표정 한 여자의 일굴이 비쳤다.
왜. 이건 또 뭐가 문제인데••
분명 손을 대면 어던가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고, 눈을 뜨면 다른 풍경이 보였는데.
이번엔 여전히 흙과 돌뿐. 그저 그 동굴이다.
구슬을 몇 번 더 만져 보던 나는 다른 구슬에 댔다. 하지만 결 과는 같았다.
떠다니는 구슬들은 모두 투명해 져 있었고, 어떤 것도 다시 용의 기 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안간힘을 씨 커다란 구슬 여러 개를 끌어안아 본 나는 결국 울상 을 지었다.
'다시 볼 수가 없어.' 그 말인즉, 다시 용을 부를 수 없 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대로 이곳에 남아야 하 나?
언젠가는 나타날 용을 기다리며? 절망스러운 생각이 발끝을 타고 올랐다. 하지만 나는 애써 생각을 돌렸다. 건드리지 않은 기억이 딱 하나 있다.
방의 구석, 회색의 천에 덮인 저 기억 말이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것 앞에 섰다.어떤 기억이 담겨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용이 이 동굴에 온 뒤의 기 억은 위험하다며 보여 주지 않았으 니, 그릴 거라 추측할 뿐.
하지 말라고 한 걸 하는 건 자살 행위지.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
다.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심호흡을 한 나는 그 앞에 주저 앉았다.
용의 기억은 끔찍했지만, 마치 영 화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니 저 기억이 아무리 길고 지난하더라도 나는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던 와중, 용의 생 각이 어렴풋이 났다.
당신은 내게 이 기억이 위험할 거라 말해 주었는데, 나는 결국 내 이익을 위해 당신에게 이 기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 또 이렇게 당신을 이용하게 되어 서 너무 미안하지만, 정말 어쩔 수 가 없어.
몇 번 더 숨을 내쉰 나는 기억을 덮고 있는 천에 손을 대었다.
=
천은 마치 기다렸다는 사르록
흩어졌고, 다른 구슬들과 같지만 훨씬 작은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 다.
기억을 본 다른 구슬들과는 달리 새하안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구슬. 구슬이 둥실 떠올랐고, 그 안에 맺힌 이를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슬에 비진 이는 어린아이였다.
흑발이었지만 초대 황제는 아니었 다.
그녀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 고, 구슬 속의 아이는 자안이었다.
암울한 얼굴의 이린 여자아이.
그 아이가 낯이 익었다.
•••나잖아?”
작은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울리는 내 목소리가 생경했다.
꼭 그만큼 익숙하고 낯선 얼굴이 있다.
어릴 적의 기억이라 흐릿하지만, 저 얼굴은 분명히 어린 내가 맞았 다.
용의 기억 속에 왜 이린 날의 내 가 있지? 그것도, 저렇게나 어두운 얼굴의 내가?
조금 더 자세히 보려 한 발짝 다 가7갔을 때, 구슬이 순식간에 가까 워졌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코끝에 닿았 고, 그대로 눈앞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