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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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유난히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반짝이는 날.
이런 생각을 내가 하게 되다니 정 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눈에 필터를 끼울 만큼 오늘 나는 기분이 좋았다.
우선 오늘은 서 대륙을 떠날 확률 이 높은 날이었다.
오늘 나는 공식적으로 서 대륙을 떠난다.
왕궁을 떠나 공작령의 등지를 들렀 다가, 그대로 떠나는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여전히 서 대륙에 남아야 겠지만, 왕궁에 머무는 것보다는 백 배 나았다.
'유리에겐 미안하지만 씩 편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떠 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어제 나는 몹시도 충동적이었다.
아니, 충동적이라는 말로 설명이 될까?
잠깐 미쳤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쯤 미쳤던 나는 고운에게 입을 맞췄고, 대답을 달라고 을렀으 며 그대로 내 처소로 돌아왔다.
그때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후회도, 후련함도, 체념도 아니었
다. 나는 그저 침대를 굴러다녔다.
그냥, 와!
이게 뭐람!
지금 생각해 보면 해석할 수 없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게 내 최선이있 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온 고운이 내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벌떡 일어나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는 문을 열 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익어 있는 고 운을 마주했다.
고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어져 있었고, 답지 않게 말도 조금 더듬 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대답을 다시금 상기한 나는 또 다시 침대를 굴러다니고 싶어졌다.
허, 으, 와!
예!
됐습니다!
어제의 그 괴상한 반응인 것을 나 도 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거친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퍼뜩 놀라 고개를 들자 고운이 걱 정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가 불민하십니까?”
이 하얗습니다.”
고운이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나 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 던 손을 풀었다. 일정한 떨림이 느껴졌다. 장밖으로 햇빛이 쨍했다.
우리는 유리와 작별 인사를 한 뒤 마차로 플린트 공작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상념에 빠 지기도 쉽지.
그나저나 놀랐다.
분명 고운은 내 앞에 앉아 있었는 데, 언제 옆으로 온 거지.
생각에 빠진 나를 깨우는 방법도 발칙하기 그지없었다.
얘는 무슨 손을 이렇게 덥석덥석 잡는담. 물론 이제 잡아도 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와.
다시금 주먹을 꽉 쥘 뻔한 나는 의도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 내 손보다 조금 더 갈색빛을 띠는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보였다.
내 2' 1-으 다 덮을 만큼 큰데도 길 푹한 손이 예뻤다.
가만히 그걸 내려다보던 나-1-1- 2'1-0

뒤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깍지를 꼈
다.
잡힌 손이 움찔 떨리거나,  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나는 고운의 귀가 빨개져 있는 것을 보았
다.
아, 귀여워라.
동시에 익숙한 죄책감이 고개를 들 있으나, 나는 외면했다.
아, 어쩌라고.
누가 들으면 진짜 새파랗게 이린 에 데려다 연에하는 줄 알겠네.
심지어 이 몸으로는 내가 연하다. 정신연령도•••••• 엇비슷한 것 같으니 까, 적당히 그렇게 치자.
내가 뻔뻔한 걸 알고 있다. 그래
도.
'좋다!' 재 이제 내 애인이야. 세상에.
마자느1- O「그-巨 꼬박 달려 플린트 공작령에 도착했다.
황궁 내에서는 가마를 타고 다니
고, 먼 곳에 갈 때에는 언령을 이용 했던 나는 종내에는 마차 안에서 널 브러지고 말았다.
괜히 언령 아낀다고 마차로 가자고 했나, 조금 후회했다.
'그래도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모 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차에서 내린 내게는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 다.
“등지는 산속에 있어서 마차로 갈 수 없습니다. 저희는 하인에게 업혀 서 올라갑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내심 기대의 눈빛을 하는 공작에게 나는 난처하다는 듯 이 웃이 보였다.
“예의가 아니지요. 그분께서 주신 힘으로 편법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용의 등지는 언령으로 갈 수가 없 었다. 일찍이 시도해 보았지만 불가능했 으니까.
그런 내 대답에 공작은 미묘한 일 굴을 했다.
그러고는 잠시 이야기를 해 보겠다 며 사라지더니, 어쩐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타났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것은 저희인데 태자 전하만 보 내드릴 수는 없지요. 함께 등지에 가서 예를 올리겠습니다.” 공작의 얼굴에 서려 있던 순종이 씨으 ^1- 드^이 사라져 있었다.
계속해서 언령을 쓰지 않으니 나를 의심한 모양이었다. 용과 독대해아 하는 나는 그게 조 금 당황스러웠다.
용의 등지에서 기억을 지우거나 잠 시 재울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도 이능 사용이 불가능하면 어쩌지.
그래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여 기에서 그들의 동행을 거절한다면
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는 꼴 이다.
어째 뚜렷한 증거 없는 내 거짓말 을 잘 믿나 했지.
나는 업보라고 생각하며 겸허히 받 아들였다.
그리고 가파른 산을 오르며 공작 부부가 스스로 포기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정확히 그 생각 을 하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다.
용의 등지가 있는 산은 아주 가팔 랐고, 자욱히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안 그래도 치마는 길었고, 머리가 락도 틀어 올리지 않아 치렁치렁 내 려왔다.
“아직 멀었느냐!” 공작 부부도 마찬가지인지, 그들이 길잡이 하인에게 호통을 졌다.
나는 잠시 쉬어 가자며 멈춰 선 자리에서 헉헉댔다.
대체 어떤 대단한 하인이 이런 길 을 제 상전을 업고 오른 건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들자 뽀송한 고운의 얼굴이 보였다.
저런 놈이었겠구나.
“안아 드릴까요.” 고운이 내 이마의 땀을 닦아 주며 나직이 물었다.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인다. 너만 날 아왔니•••
“아나. 위험하잖아.”
그게 조금 얄미워서 냉큼 받을까 싶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힘들어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산이 너무 가팔랐다.
고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설마요, 하고 말하는 듯한 웃음에 기분이 미묘했다.
“용을 만나 뵈러 가는 길에 네게 안겨 가서야 되겠니. 내 발로 가야
“용께서도 혼약자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이해하시겠지요.”
불퉁하게 덧붙인 말에 다정한 대답 이 돌아왔다.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이 혼약자 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다.
나는 그 번드르르한 얼굴을 바라보 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고又鬱曰曰느 丁리에게서 0 등을 돌리 그-五巨그- -그-그 있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고운의 멱살을 잡았고, 그대로 쭉 끌어당겼다.
작은 소리가 났다. 멀리 들리지 않 을 만큼 작지만, 둘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빗겨 가 입술이 아닌 입꼬리에 닿았고, 그대로 귀엽게 떨 어졌다.
1-긋하게 웃던 고운의 웃음이 그대 로 얼어붙었다.
이런 것에 딱딱하게 굳을 놈이 혼 약자 타령을 해. 백 년은 이르다.
픽 웃어 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쉬었더니 아주 힘이 나네.
“이, 이곳이 분명 맞습니다!”
“그러면 왜 동굴이 안 보여! 네놈 이 헷갈려서 우리 모두 헛걸百0 0 하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각오 하거라!”
몸을 쭉 피고 있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공작 부인의 뒷모습 과 애처롭게 떨고 있는 하인이 보였
다.
“어찌 그러세요?”
  그리 쥐 잡듯 잡나.
그들에게 다가가자 공작 부인이 놀 라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 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차가웠다. 어 지간히 힘들었는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이곳이 맞니?”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하인에게 물 있다.
조금 안도한 듯한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분명 이곳입니다. 제가 둔 표적이 있습니다.”
“고작 나뭇가지 꺾어 둔 것을 어떻 게 믿어!”
공작 부인이 다시 소리졌지만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용의 등지를 대대로 맡아 온 가문 이니 길잡이 하인은 이곳을 하루 이 틀 오르내린 게 아닐 것이다.
그러니 맞을 확률이 높았다.
안개가 하도 짙어서 알아볼 수가 없는 것 같은데.
주위를 빙 둘러보던 나는 유독 새 카매 보이는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 다.
고운이 눈치 빠르게 따라왔고, 나 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개가 순식간 에 사라졌다.
고개를 든 나는 작게 단성을 내뱉 었다.
“여기구나.”
목소리가 응응 울렸다. 용의 등지 는 커다란 동굴이었다.
동굴은 아주 컸지만, 아름답고 웅 장한 동굴이라기보단 아생동물이 겨 울잡을 위해 파 둔 굴에 가까웠다. 종유석 하나 없고, 물 흐르는 소리 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그런데도 내가 용의 등지라는 것을 의심치 않은 것은, 동굴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머리뼈 때문이었다.
사람 여러 명을 합친 것 같은 크 기의 머리뼈는 난생처음 보는 모양 이었다.
아니, 그게 고양이나 강아지 머리 뼈와 같았어도 다른 동물들이 그만 큼 클 리가 없으니 용이 맞았다. '일이 잘 풀렸어.
공작 부부는 동굴을 찾지 못했지만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 히도 고운도 함께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는 일반적인 동 굴처럼 커다랬다. 안개라곤 찾아볼 수 없이 바깥이 그대로 보였다.
하지만 밖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나 배'
용의 유해를 가지러 온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때그때 용의 허락을 받 아아 한다든지.
바깥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내가 나가서 저들。 데려오 지 않는 이상 공작 부부가 동굴에 들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용의 머리뼈가 보였다.
기왕 들여보내 줬으니 한 번쯤 만 나 주겠다는 의미 아닐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만난 다음 다시 나가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 면 되겠지. 생각을 끝낸 나는 가만히 숨을 들 이쉬었다.
약간 막막했다. 어떻게 불러야 하 지?
'그땐 여의주를 붙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똑같이 해도 되려나?
다행히 나는 실바누스에 머무는 내 내 용 비녀를 하고 있었다. 비녀를 빼내려는 순간, 사박사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숨마저 죽인 채 굳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용의 머리뼈 뒤로 작은 인영이 보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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