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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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름이 쫙 끼셨다.
내 가설은 들렸다. 누군가 밤중에 내 방을 드나들었던 것이 아니었 다.
내가, 이 몸에 있는 '산야'가 서신 을 썼던 거야.
빙의한 후에 원래 제 몸에 있던 아이의 행방은 굳이 신경 쓰지 않 았다.
내가 이 아이가 되었으니, 당연히 사라졌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몸을 공유하 고 있었다니.
[분명 죽었는데, 눈을 떠 보니 과 거로 돌아와 있어서 나도 정말 놀 랐어.
처음엔 그저 과거로 돌아온 줄 알았지만, 지내다 보니 그렇지 않 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꽤 오래 이렇게 지내면서, 낮에 깨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야기는 덤덤하게 이어졌다.
[미래의 너에게, 그것도 열두 살에 죽었다는 자신에게 서신을 받는 게 많이 무섭겠지. 알고 있어.
그래도 내가 깨어 있는 밤이 너무 고요해서 낮의 풍경을 너에게 꼭 듣 고 싶었어.
무서워하지 마. 나는 그냥 남아 있는 파편일 뿐이야.]
조금 머뭇거린 듯 먹물이 번진 서 신을 읽으며,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원작으로 읽은 '산야는 표 독스럽고 되바라진 어린애였다.
제 몸을 돌려 달라고 바락바락 악 을 쌌으면 썼지, 한가롭게 안부나 물을 아이는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이아 기까지만이라는 의미였던 걸까.
이미 죽은 뒤인, 내가 읽지 못한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아이.
그런 '산아가 쓴 서신은 아주 쓸 쓸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그 서신을 가만히 읽다가, 이내 붓을 들었다.
[우선, 나는 네가 아니야.
나는 원래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 고, 그곳에서 죽었어.
내가 산아라고 말했던 건 그저 우연이야. 공교롭게도 내 이름도 산야거든.]
그렇게 쓴 나는 그다음 문장을 엇 지 못했다. 붓끝에서 먹물 한 방울 이 뚝 떨어졌다.
[네가 사라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살았던 낮을 네게 돌려 주는 게 맞겠지.
몸을 돌려받고 싶니?]
잠시 머뭇거린 나는 결국 답신에 그렇게 적었다.
차마 돌려주겠다고 확답할 수는 없었다.
나 또한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
는 만큼 나가는 방법도 모르니까. 그리고 설령 방법을 알더라도, 하 루아침에 모든 것을 포기할 엄두 가 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이 몸에 적응했다.
'산에의 존재를 알았을 때, 가장 처음 든 감정은 불쾌함과 거부감 이었다.
누군가 밤중에 내 몸을 쓰고 있 있고, 그 사람과 서신도 나누고 있 었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01 고으 01 口1 나의 세계다.
부모, 친구, 내 모든 사랑하는 것 들은 이제 이곳에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모른 척 넘어갈 ^는 없다.
번드르르한 선심일 수도, 어쭙잖 은 동정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저 애는 고작 열두 살이잖
내 삶이 소중하다. 지금까지 힘들 게 일구니 온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원래 '산야'가 가 져야 할 것들이다. 저 아이가 돌려 달라고 한다면, 주는 것이 맞았다.
마냥 기뻐할 수도, 마냥 슬퍼할 수도 없는 마음으로 나는 서신을 접 어 머리맡에 두었다.
하지만 다음 날 도작한 서신은 내 예상을 빗겨 갔다.
[이름이 나와 같았구나. 흔한 이름 이 아닌데, 이름이 똑같다니 신기하 다.
네가 어쩌다가 내 몸에 들어왔는 지 모르겠지만, 내가 죽고 나서도

과거의 내 몸속에 머무는 것처럼 설 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인 거겠지.
네게 몸을 돌려 달라고 서신을 쓴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너와 이야기 를 해 보고 싶었어.]
내게는 다행인 말이었지만, 그게 몹시도 쓸쓸해 나는 마냥 기뻐할 수 가 없었다.
그 문장의 뒤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신을 곧바 로 이어 쓰지 못하고 고뇌한 것처 근해
[너는 참 상냥하구나. 내게 八A 럼없이 몸을 돌려주겠다고 하는 걸 보면.
그렇지만, 나는 이제 지졌어.]
그 문장을 읽은 나는 숨이 덕 막 혔다.
예의상의 거절이 아닌, 정말로 완 곡한 거부였다.
지졌다는 그 마지막 말이 가시처 럼 박혔다.
고작 열두 살에 죽은 아이가, 흔들 의자 하나에도 신기하다며 앉아 봐 도 되냐고 조심스레 묻던 아이가 삶 에 지졌다고 한다.
그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나 는 내 잘못을 깨달았다.
이 아이를 죽음으로 떠민 것은 기 윤만이 아니다.
'산아에게 다시 몸을 돌려주겠다 고 하는 것은, 자신을 죽인 사람들 과 함께 살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
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됐었어.
이 삶을 포기해아 할 수도 있다 는 것에 치중해서, 미처 제대로 생 각하지 못했다.
무작정 몸을 돌려주겠다고 생각 했던 얄팍한 배려가 부끄러웠다.
답신을 써야 하는데, 나는 오랫동 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던 나는 어렵사리 첫 문장을 적었다.
[나는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아. 네 이야기를 읽었거든.
그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아 니이서 내가 다 알지는 못해.
그래도 사람들이 너에게 너무 가혹 했다는 건 알아.]
[그걸 알면서도 널 헤아려 주지 못해 미안해.]
'산야는 버릇이 없었고, 표독스러 웠으며 자주 패악을 부렸다.
그렇다고 그게 죽을죄였을까.
차라리 아이가 바락바락 화를 내며 제 몸을 돌려 달라고 했다면 지금보 다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몰랐다고 해도 저지른 잘못은 잘 못이지만, 나는 그래도 이 아이가 안타깝다. 엄마가, 황제가 널 사랑할 수 있 있다면.
기윤이 너를 조금이라도 안타까 워하고, 다른 후궁들 또한 그랬더 라면 너는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고, 저 아이는 그 피해자였다. 외 면할 수가 없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산아'의 이 서신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산아는 정말로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도 품이 들어서, 그저 너무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위로해 주고 싶은데, 저 마음 0 어떻게 달래아 할지 조금 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설프고 엉망인 서신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눈앞에 있었다면 고생했다고 말하 며 등을 토닥여 줬을 테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부디 저 아이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눈을 떴다.
여름이어도 새벽의 서늘한 공기 가 방 안에 맴돌0갔다. 나는 자리에 서 일어나 새파란 빛이 새어 들어오 는 장가를 바라보았다.
어제 그렇게 서신을 쓰고 꽤 긴 장했던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 일 찍 일어났다.
혹시 '산야'의 시간을 뺏은 건 아 닐까 싶었지만, 침상에서 일어난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나는 습관처럼 베개 옆을 더듬었 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서신을 펼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내가 어제 써 둔 그대로였 다. 새로 도착한 서신이 아니었다.
대신 종이의 끄트머리에 작게 무언 가가 써 있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바로 답신을 쓰는 게 어려운데, 조금만 기다려 줄래?]
나는 그제야 탁자로 시선을 돌렸 다. 탁자에는 종이 몇 개가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종이는 무엇을 쓰려고 시도한 듯 먹칠이 되어 있었다. 꽤나 고되하는 듯했지만, 서신은 다음 날 곧장 도착했다.
[진심으로 위로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었 는데, 너에게 조금 어렵게 들린 모 양이야.]
꼬박꼬박 도착하던 서신을 하루 밀 린 걸 보면 그리 간단한 내용은 아 닐 거라 생각했는데, 첫 마디는 여 상했다.
[네가 내 이야기를 아는 것도 신 기하다. 우리 사이에 설명할 수 없 는 일들이 꽤 있네.]
[그렇지만 네 말 중 틀린 것들도 있어.]
[다른 사람들은]
그 부분에서 먹이 번져 있었다.
[내가 죽은 건, 네가 말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따지고 보면 내 탓이겠지.]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해 줬으니,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아 보도록 할
[그러니까,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
야. 그냥 그랬을 뿐이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
잘못이 없다니?
황제의 관심을 받아 거슬리는 아이 를 치워 버린 것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나?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뒤의 문장을 읽고 그만두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이 야기를 하자.
오늘 네 하루는 어땠어? 즐거운 일이 많았니?]
'산야는 애써 쾌활하게 말을 맺었
다.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요한 건 내 궁금증 해소가 아 니있다. 지난 일이고, 아이가 덮기 를 원한다면 굳이 캐물어서는 안 됐 다.
[꺼내기 싫은 이야기를 개물이서 미안해. 그렇지만 하나만 물을게.]
넘어가고 싶었지만, 나는 꼭 하나 를 물이봐아 했다.
[너는 지금 괜찮아?]
네가 정말 괜찮다면, 그걸로 된 거 아.
하지만 아이가 나를 안심시기기 위해 거짓으로 그렇게 대답하지 않 기를 바랐다.
[응. 편안해.]
그리고 다행히도, 이번 서신은 온 화했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짤막한 대답이 꼭 진짜 같0갔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 아이가 괜 찮다면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 켠이 여전히 불편 했다. 나는 그 서신을 쥐고 조용히 기원 했다.
너의 밤이 정말로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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