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은 생 각보다 차근차근 풀려 갔다.
나는 유리에게 지수가 가져온 서신 을 보여 주며 이것의 답신으로 보이 는 서신을 써 달라고 말했다.
유리는 서라국의 언어를 읽고 쓸 줄 알았다. 그 덕에 공작의 말을 대 필해 주며 그의 계획을 알아챘다.
그러니 번거롭게 서신을 훔치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유리가 서신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유리에게 그 서신을 환희전 내 공작의 방에 넣어 두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말을 전함으로써, 내 계획의 준비는 끝났 다.
그리고도 다행히 하루가 남아서, 나 는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잠들기 전에는 하늘이 파랬는데, 이 느덧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와, 얼마나 잔 거야.
바깥을 보고 혀를 내두르던 나는 몸을 쭉쭉 스트레칭하며 생각했다. '이거 진짜 병인가.' 이 몸에 빙의했을 때부터 계속 이 어졌던 증상.
피곤이 가시질 않는다. 너무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가?
그래도 이1들 체력은 어른 두엇이 달려들어도 꼼짝 않을 만큼 튼튼한
거 아니었나.
'이건 뭐, 몸만 에지 체력은 지구에 서의 나보다 못하잖아.'
몽유병도 그렇고, 이렇게 자꾸 졸린 것도 그렇고.
어째 다 잠이랑 연결되어 있는 거 긴 한데.
0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 위를 뒹굴었다. 비단이 바르작거리며 소리를 냈다.
크게 안 아프니 괜찮은 건가. 아니 면 내가 병을 기우고 있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금세 결론을 내렸다.
'미리내한테 가자.' 황궁 안에 치유 부문에서는 먼치킨 인 이가 있는데 월 고민해.
“게 있느냐.”
“예, 마마.”
부르자마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 고, 문이 열리며 서연이 걸어 들어왔 다.
“귀비 마마께 찾아뵙겠다고 연통을
넣어 줘.”
하품을 쩍 하며 그렇게 말하자 서 연이 옅게 웃었다. 약간 곤란한 웃음 이었다.
“두 분 마마께서 통하셨나 보군요.
귀비 마마께서는 이미 와 계십니다.” 아, 그래?
'미리내가 웬일이래.' 내가 싫어하는 티를 냈던지, 미리내 는 한동안 나를 찾지 않았었다.
엄마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었던지 라, 이제야 좀 미안해졌다.
미안하니까 삼촌까지는 쳐 줄게. '아빠는 좀 그렇지만••• “날 깨우지 그랬어.”
“공주 마마께서 오수에 드셨다 하 니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 그랬구나.
어느새 들어온 궁녀들이 내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나는 서연을 유심 히 보았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난처한 얼굴이 지?
“마마, 헌데 손님이 한 분이 아니십 니다.”
서연이 눈치 빠르게 내가 묻기 전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도 와 계신지라
나는 그 말에 작게 감단했다.
오•••••• 예상치 못한 조합.
'선유 먼저 보겠네.' 황후와 귀비 중 신분이 더 높은 것 은 당연하게도 황후다.
신분이 높은 이에게 먼저 문안을 드리는 것은 당연했고, 그걸 잘 아는 서연은 알아서 나를 안내했다.
그래도 미리내가 더 오래 기다린 것 같으니, 나는 아주 잠시나마 고민 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고민을 할 필 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간만이구나.”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잘 지냈니, 산아?”
어떻게 인사해아 할지 몰라 각각 인사하니 그 순간에만 그들의 얼굴 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이구, 천연 석빙고네, 여기. 계절 도 빗겨 간 응접실이네.
둘이 이렇게 냉랭하게 있을 거면 굳이 왜 같은 방에 있는지도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슬그머니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로 향했고, 비워져 있는 상석에 앉았다.
“잘 잤니, 산야?”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앉기가 무섭게 또 둘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도르록 굴리다 가, 눈치 없는 적 물었다. “어찌 두 분이 같이 오셨습니까?”
그 말에 미리내와 선유가 웃는 일 굴 그대로 굳었다.
“같이 온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마주쳤을 뿐이다.” 전유의 대답은 정석이었다. 흠잡을 데도 없었고 말을 이어 갈 허점도 없었다.
“허면 어찌 같이 계세요?”
“네가 누구에게 먼저 문안을 해야 하나 고민할 것 같아 함께 있었단 다.”
애써 질문을 짜내자 이번에는 미리 내가 잘랐다.
대화를 하자. 우리 대화를 하자고. 저렇게 대답하면 내가 '아하, 상냥하
시네요.' 말고 무슨 말을 해?
심지어 대화가 끊기자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또다시 살벌한 공기가 불어닥치는 것 같았다.
진짜 다 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성질머리를 애써 누른 채 웃 었다.
“두 분 모두 동궁에는 어쩐 일이신 가요?”
“너를 본 지가 오래된 것 같아 들 렸단다.”
“지나가던 길에 동궁이 보이더구
나.”
세 번째로 대화가 잘렸다.
앉아서 눈싸움만 할 거면 왜 왔어. 나가, 이놈들아.
나는 참을 만큼 참0갔다고 생각했다. 노력도 이만하면 많이 했다.
“두 분이서 나눌 이야기가 많으신 듯하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 했다.
그러자 놀란 눈 두 쌍이 나를 향했
다.
나는 거기에 대고 생긋 웃으며 말 해 주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
니다.”
“미안하구나, 산야. 너를 배제하려 던 게 아니었다.”
“우리 아가가 화가 났구나. 이제 아 니 그럴 테니 화 풀렴. 응?” 초강수를 두자 그제야 그들이 허등 댔다.
손바닥 뒤집듯이 빠른 태세전환이 었다.
정말 나가려고 했으나, 진심 가득한 말에 발목이 잡힌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한 분씩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어떠할까요.” 그래도 이 조합은 아닌 것 같아.
나는 우선 미리내와 독대했다. 그는 나와 둘만 남자 얼굴 표정부터 바뀌 었다.
“잘 지낸 듯해 기쁘구나. 어디 아픈 곳은 없었니? 불편한 것은?”
환하게 웃는 예쁜 얼굴이 미묘하게 엄마와 닮아 있었다. 나는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실은 귀비 마마를 찾아뵈려 했습
니다.”
“나를? 어쩐 일로?” 미리내는 의아해하면서도 내심 좋 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표정에 나는 다음 말을 꺼내기 가 조금 미안해졌다.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미리내의 얼굴이 삽시간에 걱정으 로 물들었다.
그래도 감추다가 큰 병 만드는 것 보다는 조금 걱정시카고 건강해지는 게 낫지.
환부를 말해야 하는 건 줄 알았는 데, 미리내는 곧바로 내 손을 붙들고 작게 노래를 불렀다.
전에도 들어 보았던 작은 흥일거림. 노래가 끝나자 몸이 한결 가뿐해졌
다.
좋아, 치료 끝.
“감사합니다.”
“착하기도 하지, 우리 산야.” 픽 웃은 미리내가 내 머리를 쓰다 듬었다.
“그래서, 어디가 아팠던 거니?”
“속이 조금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 가 잘 되지 않아 그랬나 봐요.” “이런, 숙수에게 소화가 잘되는 음 식으로 바꾸라 말해야겠구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내 가 한 말이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 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미리내가 어색 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네가 걱정되어 왔단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미리내가 웃었 다.
“내게 다완에 축복을 걸어 달라 하 지 않았니.”
아, 맞아.
그제야 뒤통수를 맞은 듯이 그게 기억이 났다.
어떻게 까먹고 있었지?
내가 잊은 것도 우습고, 미리내가 평소와 같이 태연하게 날 대한 것도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네가 어찌 그 사실들을 알고 있는 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모 르겠더구나.” 미리내가 조곤조곤 내게 말했다. 나 는 벌 받는 아이처럼 얌전히 그 말 을 들었다.
내가 한 일은 나 혼자 몰래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설명해 봤자 만류나 안 당하면 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의논해 아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래도 미리내 딴에는 얼마나 당황 스러웠겠어.
“너는 늘 그랬었지.
그렇지만 미리내는 나에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가벼운 목소리 였다.
“네 이야기를 웬만해서는 잘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 조금 웃음기마저 서려 있는 말투에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리내의 웃음이 깊어졌다.
무서워 보이지도, 수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아주 단단한 미소였다.
“아가, 산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 란다.”
“그러니 네가 말하고 싶을 때에,언가가 어려울 때에 내게 말해 주려
무나.”
그렇게 말한 미리내가 다완을 들었 다. 내리깐 눈이 다정했다.
“갑작스럽기는 해도, 네가 내게 무 인가를 부탁한다는 것이 기뻤단다.” 그 말이 너무 진심 같아서, 나는 그 에게 좀 더 미안해졌다.
엄마도, 미리내도. 다들 나를 엄청난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나를 너무나 소중해서, 다가 가는 것도 어려운 사람처럼 대했다.
나는 평범하고, 부족하고, 미성숙한 사람인데.
하지만 그 마음은 생각보다 부담스 럽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어떻든 언제나 똑같은 마음으로 나를 봐 줄 테니까.
그래서 조금 더 미안했고, 고마웠 다.
나는 절대로 그만큼을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은데.
내 얼굴이 침울해졌는지 미리내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레 고개를 기울였
다. 울지 마, 하고 다독이듯이. “이번엔 내가 도움이 되었니?”
꼭 다 아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말 어른 같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안 해 줄 수가 없 었다.
내 대답에 미리내가 활짝 웃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