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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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단번에 내게 시선이 와 꽂혔다.
나는 입 안에서 욕을 짓씹은 뒤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 다.
“송구합니다만, 폐하. 침실 시중을 들기에는 아직 미숙합니다.” 내 말에 황제의 얼굴이 등 뒤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이 변했다.
꽤나 회심의 일격이었던 듯이 그녀 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시, 싫은 것이나? 서역에서 들여 온 동화책이 있는데도? 무, 무척 화 려하고 아름다운데도?” 황제는 주눅 든 얼굴로 열심히 날 꼬시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난처한 미소 말고는 줄 것이 없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워 봤자 이 자피 동화책이고, 내용은 뭐가 됐든 역경을 해쳐 내고 결혼해서 행복하 게 잘 살았습니다, 일 텐데. 그걸 내가 봐서 어디에 쓰겠니••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황제는 시 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나는 조금 곤란해졌다.
내 죄목에 황제를 상심하게 한 죄를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침전에 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지? “산아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선 모양입니다.” 그때, 보드라운 목소리가 온화하게 울렸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올려 얼굴을 확인했다.
목소리만큼 부드러운 얼굴이 내게 생긋 웃었다.
어찌 됐든 미리내가 개입했으니 이 제 끝이다.
둘이서 밤에 口 지으궀' 근 하든 나는 내 포근한 침실에서-
“그러니, 제가 오늘 밤 산아와 함 께 침전에 드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잠깐만.
순간 일굴 표정이 흔들렸다.
당혹과 황당을 그대로 비치며 고개  曰들어 미리내를 바라볼 뻔한 나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야. 내가 왜 너네 사이에 껴.
혹시라도 모럴리스 수치플을 즐기 고 싶다면 절대 사양이다.
가운데에 짙은 색 장막 하나만 져 두고 신음으로 가득한 동화책 내용 을 듣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귀비. 산아와 친하느냐?”
“얼마 전 후원에서 만나 즐겁게 담 소를 나누었습니다.” 떨떠름한 황제의 말에 미리내가 달 콤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즐겁긴 누가 즐거워. 너만 즐거웠
지.
“산아. 귀비의 말이 맞느냐?” 황제가 내게 추궁해 왔다. 나는 할 말이 하나밖에 없었다.
고아하신 귀비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고, 위대하신 폐하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다.
나는 부디 황제가 내 대답 앞에 머물렀던 침묵을 이해하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단번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되겠구나!”
아나. 그거 아나. 당신은 지금 속 고 있어.
미리내의 웃음이 더 깊어진 걸 왜 너만 모르니. 다른 후궁들이 지금 하나같이 견제를 하는데 왜 혼자만 꽃밭이야.
강연에서 아무 일도 없어서 안심했 더니 마지막에 이런 이벤트가 있을 줄이야.
오늘 밤에 잠은 다 잤다. 아니, 트 라우마로만 안 남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 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마개•••••• 아주 강한 걸로.'
•••그래서, 오늘 밤은 오지 마.” 내 말에 고운이 눈을 깜빡였다. 순 한 눈망울이 깜박, 하며 긴 속눈썹 에 덮였다 드러났다.
내가 제대로 들었나, 하는 말간 일 굴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만해. 내가 미안해.
어젯밤, 고운은 내게 아주 조심스 럽게 내일도 와도 되냐고 물었다.
이유가 없이도 사사로이 찾아와 송 구하다는 말도 함께였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며 흔쾌히 승낙 했다.
그게 아마 자정이 넘은 시간일 테 니, 바로 오늘 매일 와도 된다고 허 락했는데 곧바로 정정하기가 미안했 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침실에 획
날아든다면 단번에 화살 꽂이가 될 것이다.
맹한 그 얼굴에 나는 다시금 마음 을 단단히 먹고는 말했다.
“오늘 밤은 폐하의 침전에서 자기 로 했어. 거긴 오면 안 돼.” 고운은 그제야 이해했는지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이내 눈매가 밑으로 축 처지며 시 선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나는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
다.
자라리 얼굴을 구긴다면 미안하다 고 사과라도 할 텐데, 이렇게 비 맞 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지면 방법이 없다.
“오늘만이아. 내일부터는 다시 여 기서 잘 거야.” 그 말에 고운이 고개를 들었다. 서 럽게 내려앉은 눈이 나를 빤히 응시 했다.
'안 가면 아니 됩니까.' 마음의 소리가. 아아아, 안 들려.
몰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마음 의 준비가 필요했다.
다시금 결연하게 마음먹은 나는 손 을 뻗어 고운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 듬이 주었다.
“괜찮아. 응? 하루만이고•••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운 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다 행히도 이해해 준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착하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운이 그 손에 머리를 살며시 기댔 다.
무게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작은 머리통을 토닥이며 나는 말을 이었
다.
“얌전히 잘 있으면•••  요구에는 보상이 따르는 것이 좋 다.
게다가 이렇게나 속상해하는데도 말을 들이주었으니 그냥 넘어가기엔 양심이 찔렸다.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소원 하나를 들어줄게.
그 추상적인 말에 고운은 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살짜리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게 일마나 대단한가 싶겠지만, 나는 생각보다 돈이 많았다.
자상한 아버지인 척을 하는 기윤 여란은 내게 꽤나 많은 양의 패물을 들려 보냈고, 나는 그것을 일마 전 시비에게서 빼앗았다.
거기에 황제와 미리내, 그리고 가 람이 보낸 값비싼 선물들도 산더미 같이 많다.
그 선물들은 그 날부터 오늘까지 꾸준히도 화선궁의 장고를 채우고 있었다.
이차피 준 거니 내가 팔아 지워도 썩 신경 쓰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도 스스로가 우스워 픽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제대 로 사용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황 제가 주었던 금 뒤꽂이를 구부려 고 운의 핀으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미리내에게 도 큰소리를 한 번 지는 게 아닐 까.
나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그런 상상을 두엇 한 뒤 다시 고운을 바 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여전히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앞머 리를 본 나는 저것도 귀엽지만 왜 앞머리를 자르지 않는지 다음 날 밤 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 가아 할 시간이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운의 머리에서 핀을 빼 주었다.
인형극의 막이 내려가듯이 곱슬거 리는 머리카락이 다시 고운의 눈을 덮었다.
때맞춰 서연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운에게 핀 하나를 쥐여 주 고는 하나는 내 귓가에 꽂았다. “다녀올게.” 웃음기 어린 내 인사에 고운이 얌 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좋겠지. 아이들은 무언가 를 파괴하는 것을 좋아하니 말이
다.”
•••내가 듣고 있는 거지.
황제의 궁, 화룡궁.
그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지한 침실의 문 앞에서 나는 허, 하고 헛 웃음을 흘렸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을 좋아한다니.
대체 무엇을 고르고 있단 말인가.
“하오나 폐하, 그것보다는 이것이 어떠할지요.” 황제의 의기양양한 목소리 뒤로 온 화한 미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나는 정말로 온몸에 소 름이 쭉 돋았다.
정말로 고르고 있는 거야.
“어린아이들은 심미안이 뛰어나니 말이에요. 거슬거슬한 촉감도 좋아 할 듯싶습니다.” 아니다.
나는 방금 전의 내 생각을 철회했 다. 무엇인지 몰라도 좋았다. 이해하 고 싶지 않다.
나는 당장이라도 뒷걸음질 치려는 발을 꾹 눌렀다.
고하거라.” 나는 황제의 말소리를 들으려 입을 봉해 두었던 궁녀에게 질린 듯이 중 일거렸다.
그녀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도착을 황제와 미리내에게 알렸고, 즉시 내 눈앞에 있던 문이 열렸다.
이미 이곳까지 오며 많은 문을 거 친 터라 시야에 곧바로 휘장이 쳐진 침대가 보였다.
진보랏빛의 휘장 안에 당연히 두 사람의 인영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갔던 나는 그 안이 텅 빈 것을 발견했다.
여기 없으면 어디에 있지. 하고 나 는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눈이 둥그래진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둘이 왜 저기에 앉아서 양손이 결박된 것처럼 뒤로하고 나를 바라 보고 있는 걸까.
“사, 산아 왔느냐.” 그 정적을 깬 것은 황제였다.
그녀는 어설프게 웃으며 내게 인사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등 뒤로 향한 채였다.
미리내도 뒤이어 내게 웃으며 인사 했지만 손을 앞으로 돌리지 않는 것 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순간, 꾸득. 하고 무언 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구겨지는 건가?
E 드 드
소리는 이어서 들렸고, 나는 소리 의 원인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앞부분의 무언가가 찢 어져 바닥에 떨어진 휘황찬란한 책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건.” 뭐 하자는 거지.
나는 입을 두어 번 벌렸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口이으 하는지도 모르겠고, 조금 졸렸다.
결국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2•' 으 탁자 위로 올렸다.
그 손에는 아까 바닥에 떨어진 책
의 장식임이 분명한, 하지만 무엇인 지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서역에서 온 것이다. 네게 이것을 읽어 주고 싶었는데••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이 진 책을 주위 내게 내밀었다.
비단과 금실, 은실과 보석들로 화 려하게 꾸며진 동화책의 표지에는
'호두까기 인당이라고 적혀 있었다. 호프만이 이 시대에 있었던가. 그 리고 내가 알던 동화책이 원래 저런 휘황찬란한 표지였던가.
나는 그런 고민들은 기억의 저편으 로 밀이 두기로 했다.
지금은 황제의 말에 대답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미리내가 시무룩한 황제를 달랬다.
“폐하. 다른 동화책은 많습니다. 산 아의 마음에 드는 것이 더 있겠지
요."
“하지만, 아이들은 무언가를 부수 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무언가가 부서지고 갉아 먹히는 동화는 이것 뿐이었단 말이다.” 나는 황제의 시무룩한 말에 정말로 반박하고 싶었다.
대체 무슨 맥락으로 아이들의 폭력 성을 주장하며, 그것과 호두까기 인 형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허나 폐하, 산아는 무언가를 부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내가 읽은 서책의 모든 아이들은 문을 부수고 장문을 뚫으며 바닥에 드러누워 때
를 쓰는 존재라 쓰여 있단 말이다.
저 아이는 지금껏 제 본능을 억누르 고 살아온 것이다.”
그 말에 나는 기묘한 소름이 벌레 처럼 내 팔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 꼈다.
원1-느八1-天도 하고 들린 듯도 한 그 말은 기묘하게도 해맑았다.
•••장문을 달에 한 번쯤은 뚫어야 하나?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