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는 한숨을 내쉬고는 들어오라 일렀다.
산야의 시중을 드는 궁녀 중 하나 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걸어왔다.
“준비가 모두 되었습니다.”
그 준비라는 것은 산아와의 초야였 다.
당연히도 아이의 몸에 소끄 하나 낼 생각 없지만, 괜스레 쓰레기가 된 기분에 예화가 미간을 좁혔다. “별다른 점은?”
“타박상은 없었으나 흉터가 미미하 게 남아 있습니다.” 그 말에 예화의 미간에 새겨진 골 이 더욱 깊어졌다.
황제의 후궁은 들이기 전부터 꼼꼼 히 관리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
었다.
아니,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라 산아는 여란 가에서 규방에 두고 에 지중지 기운 막내딸이라고 들었다.
당연히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 을 테고, 전에 생긴 흉터라도 지우 려 애썼을 덴데.
그럼에도 흉이 옅게 남아 있다는 것은.
예화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무표정 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서궁으로 가겠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산야의 궁 으로 가겠다는 말만을 남겼다.
의심으로 시작하여 연민으로 생각 이 끝났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내 맞은편의 잔에 따라지는 맑은 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제와 그의 비를 위해서 올라온
주안상에 있는 술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무려 황제가 자 작을 하게 두는 중이었고.
술을 따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황제가 간결한 손 짓으로 막았다.
'감히 제가 어찌••• 하며 조금 더 예를 차리려던 나는 그냥 관뒀
다.
이차피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 니 그럴 필요도 없었고, 황제는 그 정도로 어린아이를 책벌할 만큼 냉 혈한이 아니었다.
술 시중도 들지 않는 후궁이 무일 할까.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시선을 내 리깔았다.
화려하게 차려진 주안상은 보는 것 만으로도 재미 있었다.
'대부분 다 과일이네.' 늦은 시간에 먹는 거라 그런지 간 식 종류였다.
당과 조금에 과일, 과일, 과일•••
'저건 용과인가?' 씨가 콕콕 박힌 모양이 딱 용과인 데 색이 노랬다.
어떤 과일인지 제대로 보려 눈을 가늘게 떴을 때, 황제가 무심한 듯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먹거라.”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보고 있었나?
하지만 곧 수긍했다.
초반의 황제는 산아에게 꽤나 다정 하니 말이다.
어린아이인 줄도 모르고 꿇어 앉혀 두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너무 어린아이라는 동정심.
하지만 그것들을 웃도는 여란 가에 대한 의심.
이로 인해 황제는 산야에게 적당한 애정을 보인다.
그건 산야가 가여워서도 그렇지만, 산아를 이용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집 안에 공공 갇혀 산 여란 가의 막내딸.
아이의 몸의 흉터로 보아 사랑받지 못했겠지만, 오히려 잘 훈련된 접자 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참 잔인한 생각이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헤집어 놓겠다 는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황제가 산야가 정말로 그 집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 과 자신을 따르는 게 진심이라는 것 을 알게 된 뒤 끝나지만.
그에 반해 산야는-
“하아.
이어지려던 생각이 황제의 한숨 한 번에 끊겼다.
순식간에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깜 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지극히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나, 그 모습에 황제는 더욱 당황했다.
황제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 을 달싹이다 한마디를 내뱉었다.
•••위협하려던 생각은 아니었 다.”
물론 그렇겠지요. 당신 머릿속에는 나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가득 자 있 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얌전히 고개 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불민하여 그만.” 나는 그렇게 사과하고도 눈을 깜빡 였다.
어, 잠깐만. 생각해 보니 나 지금 굉장한 무례를 저질렀는데.
황제가 먹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은 주제에 사과까지 받았다.
나는 흘끔 황제를 흘겨보았다.
먼저 사과한 걸 보니 처벌은 안 하겠지?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녀는 나를 처벌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움직여 내 앞에 있는 접시에 과일과 당과들을 놓기 시작 했다.
“유밀과다. 이건 여과. 이건 생요,
이간-1•••
나는 접시에 계속 쌓여 가는 다과 에 당황했다.
뭐야. 벌이아?
내가 당황하든 말든 황제는 내 접 시에 계속 다과를 쌓았다.
마침내 더 담을 수 없을 만큼 산 처럼 쌓은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쯧, 하고 혀를 자고는 말했다.
“먹어라.”
그 말에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 는 얼굴을 했다.
챙겨 준 건 정말 고마웠지만, 나는 차마 그걸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황제가 말해 준 이름 중 처 음 들은 유밀과밖에 이해하지 못했 다.
엄청 손이 많이 가는 한과라고 하 던데.
언7년1가 봤던 동영상에서 페스트리 처럼 올라온 층이 인상적이라서 기 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이름들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생요는 뭐고 여과는 또 뭐야.
이름 모를 것을 먹기 싫을뿐더러, 내가 빙의하기 전의 산야는 철저하 게 식단이 조절되어 왔다.
하도 굶은 날이 많아 장기가 약해 져 있었기 때문이다.
볼품없이 마른 터라 살을 찌우겠다 고 음식을 억지로 먹였었지만, 크게 탈이 난 뒤로부터는 그러지 못했다.
이 시간에, 그것도 저렇게나 많이 먹는다면 분명히 탈이 날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먹으라고 친히 집어 준 것을 먹지 않을 수는 없어서,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황제가 가장 먼저 접시에 둔 탓에 유밀과는 맨 밑에 깔려 있었다.
그나마 이름을 아는 그건 꼭 먹어 보고 싶었다.
좋아. 목표는 유밀과다. 다 먹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각오를 다지고는 가장 위에 얹어져 있던 과육 하나를 집어 들있
다.
보라색 과일이 마치 포도 같았다.
잡으니 살짝 말캉했다.
이름이•••••• 뭐라더라. 자편?
고개를 잠시 가웃한 나는 그걸 그 대로 입에 집어넣고 씹었다.
오렌지처럼 과육이 톡 터져 나왔
다.
살짝 달고, 시고-
“콜록!"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니 기침이 나왔다.
그 덕에 그 쓴 과즙은 내 코에서 튀어나왔다.
비강을 거쳐 콧물처럼 튀어나오는 게 입을 가로막은 손에서 느껴졌다.
아. 쪽팔린다. 그리고 아프고 씨.
내 심정을 가장 간결하게 말하자면 저거였고, 더 설명하기엔 나는 위의 세 이유로 경황이 없었다.
최대한 기침을 줄이려 입을 꾹 막 고 있는데 덜컹, 하고 의자가 넘어 지는 소리가 났다. 과당-!
아닌가. 부서졌나. “궁의를 불러! 독 “아니요!” 나는 그 우레 같은 목소리에 아픈 것도 잊고 황제를 붙들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던 황제 가 내 손길에 멈칫했다.
“독, 콜록. 독살이 아닙니다. 큼. 괜찮습니다.” 나는 칼칼한 목으로 그렇게 말했
다.
황제는 황망한 눈으로 내 모습。 살폈고, 내 입가와 손 어디에도 피 가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
다.
“그럼 왜•••
그 황망한 얼굴에 나는 눈을 도르 록 굴렸다.
내가 먹은 건 모양은 포도였지만 맛은 자몽과 비슷했다.
다만 자몽보다 조금 더 썼고, 어린 아이 입맛인 내 입에 그 과일이 엄 청나게 쓰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걸 어떻게 요약할지 생각하고 있 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 가 들렸다.
“폐하!”
그 순간,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 다.
그 열린 문으로 장발의 남자가 뛰 어 들어왔다.
데자뷔가 일었다. 아까 낮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때는 들어온 사람이 아주 느긋하고 거만했고, 지금은 황급히 들어왔다는 것이지만.
'독-'까지 들었으니 눈치 빠른 궁 녀들은 독살이라고 이해하고 재빠르 게 궁의를 데려왔을 것이다.
그의 얼굴을 대충 스쳐 지나가듯 본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내 눈앞에 흩날 리는 백금발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황제의 앞이라는 것 도 잊고 획 고개를 들었다.
길게 늘어진 백금빛 머리카락을 본 탓이다.
백금발.
그건, 그건 이 상황에서 절대로 나 와서는 안 되는 색의 머리카락이었 다.
적발도 흑발도 녹발도 모두 되지만 백금발만은 안 됐다.
하지만 정말 애석하게도, 고개를 든 내 눈에 찬란한 백금발이 가득 담겼다.
길기도 얼마나 긴지, 허리를 넘는 길이의 그 머리칼은 이 붉은빛투성 이의 방에서도 색을 잃지 않은 재였
다.
“귀비 마마!” 오, 안 돼.
친절한 어느 궁녀 하나가 결국 확 인 사살을 했다.
내가 허망함에 입을 떡 벌렸을 때, 파르르 떨리던 새빨간 눈동자가 나 를 향했다.
동공이 세로로 삐죽이 길어진 눈과 딱 마주쳐 버린 나는 화급히 고개를 숙였다.
봤나? 눈치챘나?
나는 부디 내가 그의 눈을 바라보 았다는 것을 모르길 바랐다.
이미 충분한데 내 사인을 하나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눈이 마주쳤잖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속에는 방금 보았던 그 조각 같은 얼굴도, 언제나 완벽하고 고아 한 모습을 하던 그가 독살이라는 이 아기만 듣고 침의만 입은 채 이곳으 로 달려왔다는 것도 들어 있지 않0갔 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 직 내가 그의 눈을 보았다는 것에 있었다.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 파충류의 그것처럼 가느다랬던 동공.
그 눈은 무섭긴 했지만 그게 문제 가 아니었다.
그게- 귀비 미리내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라는 게 문제지!
“귀비 마마. 안대를 떨어트리셨습
니다.”
•••고맙구나.”
아까 들었던 궁녀의 목소리가 다시 그 들려왔다. 그 말에 미리내가 가 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서둘러 뛰어온 아까와는 다르 게 황제의 안전을 확인했는지 많이 진정되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칼을 갈고 있다는 게 너무 여실히 느껴졌다.
봤어. 눈 마주친 것 맞아.
아,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