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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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알려 주기가 어렵다고?
이게 알려 주기 싫다는 의미의 정 중한 표현이야, 아니면 정말 그릴 수 없다는 기아?
'적당히 장단에 맞추니 줘야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문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문이 열렸고, 내 궁 녀들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비번이었던 궁녀를 데려오 거라." 장단은 맞춰 줄 생각이다.
단, 상대가 누구인지 먼저 안 뒤 에.
난 아무리 재밌는 영화라도 당장 내일 보러 가지 않는 이상 스포일러 찾아보는 사람이라고.
'하는 짓 보면 한참 안 알려 줄 것 같아.'
상대가 누구인 줄 모르니 내가 짜
그- 0
내러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 가.
밤사이 서신이 바뀌었으니 누군가 동궁의 내 방을 드나들었다는 의미
다.
그걸 당연히 궁녀들은 알겠지.
궁녀 둘이 앞으로 나왔다. 무슨 문 제가 있나 싶었는지 긴장한 얼굴이 었다. 혼내려는 게 아닌데.
“어젯밤 어느 궁의 궁인이 다녀갔 느나?"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 었다. 그러자 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습니다.”
고민하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는 모 습에 조금 심사가 뒤틀렸다.
그럼 이 서신은 땅에서 솟아났어?
“진정 아무도 보지 못했단 말이 나?”
“어찌 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습니
까. 쥐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습 니다." 조금 불량하게 물었지만 대답은 똑 같았다.
저게 진심인가, 아니면 짜고 치는 건가.
“폐하나 귀비 마마께서 그리하셨으 면 내 밝히지 않을 테니 말하거라.”
“진정 아닙니다. 밤새 불편한 것이 있으셨습니까?”
궁녀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게 꾸며냈다기엔 너무 사실적이 어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뭐야. 진짜야?
•••밤새 마마의 침실을 오간 이 는 없었습니다.” 그에 고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수긍하려던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
다.
“너, 밤에 안 잤어?!”
고운이 내 말에 어깨를 파드득 떨 었다. 누가 봐도 잘못을 들켜 하는 반응이었다. “고위" 아, 이놈 자식아!
나는 가차 없이 고운의 등을 후려 졌다.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이건 한 대쯤 맞아도 쌌다.
처음에 버릇을 잘못 들였어. 첫 날 밤에 찾아오길래 종종 밤에 같이 놀 았더니, 이게 아직도 이어지던 모양

이다.
밤에 깨 있을 거면 나도 깨우든가, 처량 맞게 문 앞에서 보초 서고 있 있나!
고운은 밤에 잠을 안 자서 그런지 기도 작았다. 물론 나보단 컸지만. 한 대 맞아도 쌌지만 차마 두 대 때릴 엄두는 나지 않았던 나는 여류 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류, 앞으로 네가 책임지고 고운 이 밤에 자는지 관리해.”
지금까지 년 하고 있었어, 이 보호자 놈아.
여류도 느끼는 게 있었는지 겸허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으며 손에 쥔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후궁 중 순간이동의 이능을 가진 이가 있기는 했다. 황궁의 결계가 깨어진 상태이니 일 마든지 이능을 쓸 수 있겠지.
엄마의 이능이 언령이니 내 안전에 대해서는 잘 처리해 뒀을 거라 생각 해서 암살 걱정은 없지만•••  '진해지고 싶었던 건가?'
내게 병문안을 왔던 후궁이니 가능 성은 있었다. 하지만 꼭 본인이 아 닐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서신 배달을 부탁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잖아.'
결국 이 서신에 쓰여 있던 대로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상황이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
상대가 원했을 흥미진진한 추리 대 신 깊은 짜증만 느끼고 있는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서신을 팔랑팔 랑 흔들었다.
“허면 너희 중 이것을 쓴 자는 있 느냐?" 의아해하는 궁녀들 중 하나에게 서 신을 주자, 그녀가 서신을 크게 읽 있다.
그 목소리를 뒤의 궁녀들이 모두 들었고, 그들의 얼굴이 요상하게 바뀌었다.
“이것이 무엇이랍니까? 어찌 이런 무엄한 서신을•••
“소인은 아닙니다.” “소인도 아닙니다.”
그래. 다 아니겠지. 맞아도 아니라 고 하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돌려받 았다.
[안녕.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이름이나]
아차.
나도 모르게 편지가 격해졌다. 나 는 두 번째 줄을 먹질했다.
저게 내 진심이기는 했지만, 상대 가 나보다 연장자일 경우엔 아주 무 례한 대답이다.
엄마였으면 받고 울었어.
•••그냥 울리면 어떠나 싶긴 하 지만.'
기왕 장단에 맞춰 주기로 한 거 신명나게 춤이나 줘 보자. 나는 마  음을 가다듬고 다시 붓을 들었다.
[안녕.
서신 잘 받0갔어.
무작정 맞출 수는 없으니 단서를 좀 줄래?
나이나 성별, 신분 같은 것들로.
물론 이름을 그냥 말해 준다면 가 장 고마울 것 같아.
답신 기다릴게.]
마지막 온점을 찍은 나는 잠시 머 뭇댔다. 아무리 그래도 편지인데, 너무 딱 딱한가.
[지금은 아직 오전이야. 일어나서 서신을 보자마자 답장을 썼어.
오늘 뭘 할 계획은 없어. 휴가거
누가 휴가를 준 건 아니고, 나 혼
자 그렇게 정했어.
요즘 날이 좋아서 산책이나 해 볼 생각이야. 동궁의 정원이 예쁘거든.]
몇 줄을 더 적은 나는 붓을 내려 놓고 종이를 말렸다.
만족스러웠다. 마지막 말은 떡밥이 기도 하고.
'이제 누가 찾아와서 동궁의 정원 을 산책하자고 하면, 그 사람이 이 서신을 쓴 거지.'
여전히 상대를 찾아내는 걸 포기하 지 못한 나는 남몰래 웃었다. 그리 고 서신을 곱게 접어 베개 옆에 놓
아두었다.
“오늘은 뭐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배에 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일어나서 밥도 안 먹고 화를 냈더니.
일단 밥부터 먹고, 후식도 먹고.
피곤하니까•
'낮잠 자야지.'
먹고 자는 게 휴가의 정석 아니겠 습니까.
그날 하루는 아주 계획대로 흘러갔 다.
나는 아침을 먹고 낮잠을 잤고, 두 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났다.
너무 자면 밤에 잠이 안 올 수 있 고, 머리가 아프니 부러 정한 규칙 이었다.
내 궁녀들은 곤히 자는 나를 깨우 는 걸 깨진 도자기 위를 걷는 것처 럼 여겼지만, 내 설명에 잠자코 따 라 주었다.
그렇게 일어난 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을 삼십 분 정도 가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고운과 정원을 산책했다.
고운에게 왜 깨어 있었냐고 물었지 만, 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절대 말할 수 없다며 입을 국 다 물면서도 내 명령에 불복하는 것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기에, 나는 한 발 물러나고 말았다.
그래. 네가 뭐 나쁜 짓을 하겠니. 할 일 없어서 내 방 흔들의자에나 앉아 있겠지.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 금세 밤이 찾아왔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침상 에 누웠다.
내일 아침이 되어야 서신이 온다. 이제 답장이 조금 궁금했다. 서신을 기다리게 된 게 조금 진 것 같았지만, 궁금증이 이겼다.
낮잠을 잔 것이 무색하게 나는 금 세 잠에 빠져들었고, 조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일어나 머리맡부터 더듬은 나는 잘 접힌 종이를 쥐었다.
역시나, 서신의 내용이 바뀌어 있 었다.
[안녕.
네 마음대로 휴가라고 정했다면, 년 늘 휴가인 걸까?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정한 적이 많이 없어서 그 말이 좋아 보여.
동궁의 정원이 예쁘구나. 알려 줘 서 고마우니. 여건이 된다면 꼭 가 볼 게.
나는 이상한 의자에 앉아 봤어. 마 구 흔들려서 넘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안 그렇더라.
내가 허락 없이 앉아 화났다면 미 안해. 고장 나지 않았으니 용서해 줄래?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다음번에 도 앉아 봐도 괜찮을까?
나에 대해 맞추는 건 역시 어려울 거라 생각했어.
나이, 성별, 신분을 알려 줄게.
나이는 열두 살이야. 성별은 여자. 그리고 고귀한 신분이야.]
오늘도 나는 요상한 표정을 했다.
어제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열두 살. 여자. 고귀한 신분.
'황족이면 황족이고, 귀족이면 귀 족이지.
고귀한 신분은 또 뭐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위의 내용 도 무언가 이상했다.
[네 마음대로 휴가라고 정했다면, 년 늘 휴가인 걸까?]
'시비 거나?' 내가 마음 편히 쉬는 게 지금 일 마 만인데.
하지만 마냥 기분 나빠 하기엔 밑 의 내용은 선망이었다.
정말 신기해서 물은 건가?
'고작 저게?'
그 와중에 내 흔들의자에도 앉아 본 모양이다. 감상평을 세세하게도 써 두었다.
이미 앉았으면서 이제야 허락을 구하는 것도 웃기고.
그러니까, 이 애 참•••  '정중하게 말썽쟁이야.'
그 두 단어가 공존한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정말 그 했다.
공주의 방에 몰래 서신을 두고 가는 아이라니.
나는 황궁에 들어와 살면서 내 또 래의 귀족 아이를 마주친 적이 별로 없었다.
귀족들이 제 아이를 데리고 입궁하 는 경우가 많지 않기도 했고, 동궁 에 함부로 들이올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륜의 연회에 아이들이 몇 있기 는 했지.'
나 또한 또래 친구가 필요하니 자 자 소개를 시켜 주고 배동으로 들일 아이를 내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 대륙 인간들이 쳐들어와 연회고 뭐고 난리가 났었지.
아마 그때 나를 보고 친해지고 싶 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아이고•••
골치가 아팠다. 나랑 친해지고 싶 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런 방법을 쓰다니 어지간히 말썽쟁이다. 황궁에, 그것도 공주의 방에 함부 로 들어오면 큰일 나요, 아가. '만나 봐야겠네.' 잘 타일러서 이런 서신은 보내지 말라고 해야지.
나는 곧바로 궁녀들을 불러 화룡궁 으로 갈 채비를 했다.
그들이 나를 말리지 않아 몰랐는 데, 화룡궁에 도착하고 보니 엄마가 대전에 있었다.
아침 강연 중이었던 듯 대전 안에 대신들이 가득했다. 그대로 돌아가 려던 나는 멈칫했다.
'어차피 배동을 뽑겠다는 것도 대 신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잖아.'
굳이 일을 두 번씩이나 할 필요가 있나?
그런데 대신들 앞에서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숨을 후, 하고 깊게 내쉬었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하 겠어.
“고하거라.”
문 앞의 환관에게 그리 말하자 환 관이 문을 열었다.
“공주 마마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모두가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성큼성큼 걸어갔고, 예를 표한 뒤 놀란 듯 보 이는 엄마와 눈을 맞췄다.
나는 어리다. 어리고 사랑받아 비 릇없는 공주다.
스스로 최면을 걸듯 중일거린 뒤, 나는 크게 외졌다.
“소녀, 친우가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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