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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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나는 황망한 눈으로 내 눈앞에 있 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리내의 일 처리는 빨랐다. 서신을 보낸 지 한 시간도 재 되지 않아 답 신이 왔고, 그 답신에는 이튿날부터 그를 내게 보내겠다는 말이 적혀 있 었다.
내가 쓴 설명이 잘못되었나?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어제 내가 쓴 서신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어제 화서궁에서 잡일꾼들을 보았 는데, 그중 가장 핍박받고 신분이 낮 은 자를 내게 달라고.
혹시 헷갈릴까 이름이 두 글자라는 것까지 슬그머니 적어 보냈다.
그래. 분명히 그 모든 정황들은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마께서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이 여류••••••! 크혹. 정말 죽어도 여 한이 없습니다!” 왜 네가 거기서 나와•••  '설마 죽인 건가?'
불길한 예감이 뱀처럼 등허리를 타 고 올랐다.
나는 감격한 얼굴로 무언가를 주절 대는 여류를 질린 듯 바라보다 새벽 에게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들을 죄다 처지하는 건 불가 능하더라도, 심부름꾼의 생사 정도는 알아 올 수 있겠지.
“새벽.”
내 부름에 작게 묵례한 고운이 수 접을 꺼내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 갔 다.
가만히 그것을 기다리다 내민 수첩 을 집어 드니 그 수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없앨까요.' 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흐트러진 회색 고수머리 사이로 지 금껏 제대로 보지 못했던 눈이 보였
다.
차갑고 축축하게 가라앉은 청회안. 무기질적인 그 시선이 여류를 향했 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  을 뻗어 고운의 눈을 가렸다.
그래. 나도 우스꽝스럽다는 거 아니 까 다들 나만 보지 마.
슬그머니 내리자 고운이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의아하다는 듯한 모습에 나는 빠르 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간 눈동자가 허락을 구하듯 반짝 였지만, 절대 허락해 줄 수 없었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없앤다니.
  어떻게 없앤다는 거야, 대체.
내 대답에 고운이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고운의 어깨가 축 처 진 것을 보았다.
더 정확히는 어깨는 축 늘어트린 채 여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 다.
너무나 노골적인 시선인 터라 시간 이 얼마 지나니 방 안에 있는 사람 들이 슬금슬금 고운을 쳐다보기 시 작했다.
희사를 포함한 다른 궁녀들은 물론 이고, 상기된 얼굴로 재잘재잘 떠들 던 여류까지.
“어이구, 한 대 지겠구만.” 해맑던 얼굴에 미소를 지운 그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익숙한 느낌에 나는 이를 악물 며 웃었다.
아, 정말 싫다. 이렇게 단번에 분위 기가 바뀌는 듯한 느낌.
나는 곧바로 희사에게 시선을 돌렸 지만, 그녀는 내 시선이 닿자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가웃했을 뿐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서연이 보고 싶다. “새벽. 잠깐만.”
결국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고운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자 다행히도 고운은 얌전히 고 개를 숙였다.
고운은 다행히도 금방 해결되었지 만, 여류도 그릴지는••  나는 아파 오는 머리를 붙들지 않 으려 애쓰며 여류에게 시선을 돌렸 다.
내 호위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려던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잠시 벙찌고 말았다.
저건 대체 어떤 얼굴이지.
아들을 며느리에게 뺏긴 극성 시어 머니의 얼굴?
나만 바라보던 내 자식이 친구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걸 들은 얼굴?
“너, 너!"
여류가 사색이 된 얼굴로 고운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 상스러운 모습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여 류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것 이 더 빨랐다.
“왜 저렇게 온순해졌이! 나한텐 만 날 손톱 세운 고양이마냥 틱틱대더 내"
그 말에 고운이 입을 달싹였다.
순간 저도 모르게 무어라 말할 뻔 한 것 같았다.
나는 여류의 저 말로 인해 그를 극 도로 미친 또라이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정말 억울하고 멍청한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
다.
여류는 이내 눈물까지 글썽이며 제 머리카락을 두어 번 헤집다가 불쑥 고개를 들어 말했다.
“으으, 마마. 어찌 이리 다 가지셨 습니까? 귀엽고 사랑스러우신 데다 그 무서운 귀비 마마의 총에까지 받 으시는 것은 하나도 부럽지 아니하 나 저놈 총에는 저 주시면 아니 되 겠습니까?” 누가 누구의 총애를 받아?
아니, 그보다 네가 고운 총에 받아 서 어디에 쓰게?
“그게 무슨-” 내가 난처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그렇게 말했을 때, 문가에서 들어 가도 되겠냐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연!'
얼굴이 표정 관리를 할 새도 없이 환하게 피어났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궁녀 중 하 나가 문을 열었고, 서연이 걸어 들어 왔다.


서연은 내 눈빛에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여전히 나를 붙들고 징징대는 여류를 보고는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연, 주화, 해륜. 너희는 오늘부로 화영궁으로 가거라. 일손이 부족하다 하더구나.” 나는 이어진 서연의 말에 눈을 깜 빡였다.
당연히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줄 알 았는데,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이동이었다.
이름이 불려진 궁녀들이 방 안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남아 있는 인원들을 죽 둘러보며 확인한 서연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 로 말했다.
“이제 말해도 된단다, 새벽.”
•••그렇습니까?” 이어진 고운의 말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답게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늘 새벽에 날 찾아왔을 때 들 있던 청아한 목소리와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그래. 다 좋은데 나도 상황을 받아 들일 시간을 좀 줘.
그래서 고운과 여류는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방금 나간 궁녀들은 뭐야. 나 그전 까지 죽을 뻔한 상황이었어?
“왜 왔어.”
뒤죽박죽 엉킨 내 머릿속의 생각들 을 단번에 잘라낸 것은 고운의 일어 붙은 목소리였다.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에 여류가 눈 을 동그랗게 떴다.
“너, 너 왜 말을 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뿐이지, 말 을 못 한다 한 적은 없어.” “이놈아! 그게 그거지!” “그래서 왜 온 거야." 잔뜩 서운하다는 얼굴을 하던 여류 가 불퉁히 대답했다.
“허, 마마께서 부르셔서 왔거든?”
•••그럴 리가.”
“진짜야!” 그 말에 장화 신은 고양이 눈동자 를 한 고운이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 는 이유 모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
다.
그게. 내가 부른 게 맞긴 한데.
“고운, 잠시만.” 우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운 의 안위였다.
저렇게까지 격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 정말 사이가 좋지 않은가, 싶다 가도 또 그저 틱틱대는 것으로 보이 기도 하니, 확실한 진상 규명이 필요 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당사자가 있는 자 리에서 쩌렁쩌렁 말할 수는 없는 노  八이라, 나는 고운의 귀를 조심스레 잡아당겨 속닥였다.
•••여류가 너를 학대했느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꽤나 노골 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려 말하기도 어려운 사항 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에 고운이 어깨를 움칠 떨었
다.
그 반응에 나는 그것이 사실인가 싶었지만, 고운은 이내 고개를 작게 내저으며 아니라 대답했다.
“정말?”
•••예. 마마.”
“정말이지?”
“예. 그저•• • 그는 장난이 심할 뿐 입니다.” 고운이 귓가가 잔뜩 새빨개진 채 대답했다.
손끝을 움찔거리는 게 귓가에 자꾸 바람이 와 닿으니 간지러운 모양이 었다.
나는 픽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집 고 있던 고운의 귀를 놓아 주었다. 고운의 어조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아까의 모습들 을 보 아 믿지 못할 사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림자 둘이 붙어 있으면 서도 아직 하나가 죽지 않았지 않나.
물론 고운은 여류를 조금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여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조 금 부드러위졌을 때, 가만히 그 모습 을 보고 있던 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여류. 마마께 인사는 올렸느냐?” “예, 마마님! 물론•••
의기양양하게 시작한 여류의 말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웃고 있는 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 쉬었다.
들어오자마자 눈밭의 강아지처럼 날뛰었으니, 제대로 된 인사를 한 기 억이 있을 리가. “그대는 그림자인가?” 나는 자비를 베풀었다.
고운을 학대한 것도 아니고, 말하는 것을 보니 머릿속이 꽃밭인 바보 같 으니.
“네! 저는 그림자입니다! 새벽과 같 지요!”
해맑게 그 말을 내뱉은 여류는 지 금껏 말하고 싶어 혼났다며 해해 웃 었다.
나는 모든 그림자들이 저런 것인지, 여류가 유난히 해맑은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네게 서신을 보냈던 자가 저자는 아닌 것 같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운에게 중 얼거렸다.
저렇게까지 바보 같은 인간이 아무 리 농담이라도 그렇게 섬뜩한 내용 을 씨 보낼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 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고운이 입 술을 달싹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모양은 아닌 듯했다.
내 경악스러운 시선이 기어이 여류 를 향하자 그가 쑥스럽다는 듯 배시 시 웃었다.
“제가 좀 수줍음도 많이 타고 말주 변도 없는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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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차갑다 하는 오해를 많 이 삽니다.”
아니. 그건 수줍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노을이 제 가 마마께 간다는 말을 듣고 아주 혹독하게 교육시겼습니다. 이휴, 아 주 살가죽을 발라 놓을 기세로•••
“여류.”
•••뼈와 살을,”
“어, 그, 혹독하게! 아주 혹독하게 교육시켰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마마!”
방금 그 말을 하면서도 서연에게 두 번이나 지적받은 것은 그의 머릿 속에 티끌만큼도 남지 않은 모양이 다.
것 참 잘도 염려를 놓을 수 있겠군. 나는 재자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고의는 아 닌 듯한데,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그럼 고운을-”
“저, 마마.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고운은 누구랍니까•••
아. 나 말 좀 하자. 끝까지 듣고 물 이보란 말이야.
말이 끊긴 나는 입을 다문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내 말을 누군가가 끊어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대로 엄하게 처벌할 생각은 없 었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서늘한 시선에 여류가 아차, 하는 얼굴로 칼을 꺼냈다.
칼을.
“송구합니다. 마마. 어느 곳이면 되 겠습니까?” 여류가 내뱉은 말을 들은 나는 잠 시 그 말을 해석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말을 해석하고 놀라기 전에 서연이 깜짝 놀라 칼을 빼앗았다.
“마마의 앞에 무슨 흉측한 것을 들 이대는 게야!”
“아, 그••• •• 그래서 작은 도를 꺼냈 습니다만, 이것도 안 됩니까?” “당연한 말을! 자네, 자꾸 이런 식 으로 나오면 다시 돌려보내겠네!” “마, 마마님! 부디 그것만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고운이 약속을 하면 새 끼손가락을 잘라야 하는 줄 알았다 고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네놈이 주범이었구나.
서연은 애틋한 눈으로 산아를 바라 보았다.
아이는 입술을 앙다문 채 눈앞의 남자를 째려보고 있었다.
볼록하게 부푼 볼이나 세모꼴이 된 눈 같은 것들이 사랑스러웠다. '헌데•••
'그림자의 존재에 대해 일러 드린 적이 없었거늘  그녀의 작은 주인은 가끔 이러한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철이 일찍 든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모습 들이었다.
가령 만사에 침작하다든가,
일러 주지도 않은, 극비에 부쳐진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들 말 이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