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시끌하던 대전이 쥐 죽은 듯 싸해졌다.
모두의 경악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나는 머쓱하게 눈을 굴렸다.
가짜로 보이나?
“어, 어찌•••
아삭.
바들바들 떨던 대신이 내가 배를 한 입 베어 물자 화드득 놀랐다.
꾹꾹 씹어 삼킨 나는 인상을 미미 하게 찌푸렸다.
안 익었나, 맛이 없네.
“내 방금 시도한 것처럼, 폐하의 이능을 빌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지 않소?”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전하!”
심드렁한 말에 대신이 무섭게 반박 했다.
“지금껏 전례가 없었거늘, 어찌!”
“그만
대신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하 는 말을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끊있 다.
“오늘 강연은 이만 파하도록 하
오.”
“하오나 폐하!”
“짐이 두 번 말해야 하오?"
그 말이 어찌나 서늘하던지 흥분한 노대신조자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결국 대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엄마가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엄마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나는 당황했고, 그대로 경악한 엄마의 일 굴을 마주했다. 엄마는 내 어깨를 붙들고는 이리저 리 나를 살폈다. 이마에 손도 얹어 보고, 눈동자도 빤히 바라본다.
“왜, 왜요?” “괜찮니? 어던가 이상하지 않아?” 아니, 뭐가?
나는 한 손에 한 입 베어 문 배를 들고 어정쩡히 굳었다. “이게, 조금 떫긴 했는데••• 기어가듯 나온 목소리에 엄마가 한 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아. 거기가 어디라고 대뜸 다녀와!” 어디. 서 대륙?
“잠시 다녀왔을 뿐이에요. 정말 잠 깐이었고, 바로 돌아올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서 대륙에서 도착한 공문이라도 있 있나?
“내전 중이라 하던가요?”
조심스레 물은 말에 엄마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서라국인은 서 대륙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네가 그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난 디디고 왔는데?
하지만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엄마 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 생각은 접으렴, 아가. 절대로 허락해 줄 수 없다.”
우리 엄마는 별일 아닌 이유로 나 를 막을 사람도, 쓸데없는 일로 단 호할 사람도 아니었다.
도와 달라는 의미로 주위를 둘러보 았지만 모두 엄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여라도 몸이 아프면 꼭 나를 찾 아오거라. 알겠지?”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엄마의 눈빛 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신신당부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왜지•••
“어찌 그러십니까?”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드니 서연이 의아하다는 일 굴을 하고 있었다.
목욕 시중을 궁녀들이 들어 주는 덕에 이 시간은 내가 대부분 생각에 잠겨 있는 편이었다.
그게 입 밖으로 나온 적은 거의 없었고, 나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기로 했다.
“어째서 서 대륙에 가서는 안 되는 가?”
무슨 일이든 이유가 있을 텐데 마 냥 안 간다, 못 간다.
아까는 분위기가 씩 여의지 않아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대로 넘어가기 엔 찝찝했다.
그런 내 질문에 또다시 방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잠시지만 서 대륙에 갔다가 돌아왔 을 때 깔린 정적과 흡사한 것이었
다.
“그야, 그건•• 호기롭게 입을 연 희사는 다음 말 을 잇지 못했다.
입을 뻐끔거리던 희사는 결국 한숨 을 내쉬었다.
“설명드리기 어렵네요.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것이라••• 서라국에는 마젤란이 될 인재가 이 렇게나 없나.
서 대륙에서 온 신기한 물건들은 그리 좋아하면서 가 볼 생각은 엄두 도 못 낸다고?
“흔히들, 범을 만나면 오금이 저린 다 하지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의 나 를 위해 서연이 입을 열었다.
“그와 흡사합니다. 비단 황궁의 이 들뿐만 아니라 서라국인의 그 누구 도 서 대륙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 해요.”
“맞아요. 저는 어찌 마마께서 서 대륙에 가신다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두렵지 않으셔요?”
서연의 말 뒤로 희사가 말을 덧붙 였다.
그 말들이 퍽 진심인 것 같아 나 는 더 당황스러웠다.
“그곳이라고 서라국과 그리 다를 성싶으나. 똑같은 땅이고 똑같은 사 람들인데.” “어찌 같나요!”
“허면 무엇이 다르기에?”
“그야••• 희사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 기렸다.
내가 무어라 반박하려던 찰나 희사 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저 이유 없이 두렵습니다. 무사 히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땅이에요.”
서라국이 서 대륙의 나라들과 교류 가 많이 없기는 해도 아예 서로의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그 땅에서 버젓이 살다 온 사람들 도 봤으면서, 어떻게 그게 무서울 수가 있지?
기묘한 일이었다.
외눈박이 세상에 떨어진 두 눈을 가진 인간의 기분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가도 상관없 을 것 같은데.
“허니 마마, 혹여라도 서 대륙에 가시겠다는 말씀은 마셔요.'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희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욕물을 드셨냐고 부산스러워진 궁녀들을 진정시킨 뒤, 나는 희사에 게 마저 이야기하라 손짓했다.
“당장 내일 범에게 물려간다 해도 서 대륙에는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
다.”
“물론! 저는 언제나 전하를 따를 것이지만요!”
서연의 경고에 희사가 화급히 덧붙 였다. 나는 그 필사적인 얼굴에 웃어 주 었다.
“그래. “약조하신 거지요?” 그럼, 그럼.
괜찮아. 년 안 데리고 갈게.
역시 서 대륙에 가야겠다.
그게 며칠간 고민한 내가 내린 결 론이었다.
다른 이들은 서 대륙을 이유 없이 두려워해 가지 못한다지만, 나는 그 렇지 않으니까.
유리가 아주 어릴 적이지만 떠나기 전 서 대륙에 오면 단단히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으니, 그리 어려운 여 정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엄마가 아무리 반대한다 해도 내 서 대륙 여정은 결국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 다.
“어휴, 이놈의 종이들은 태워도 대 위도 끝이 없네!”
“왜 태우느냐. 얼마나 오는지 세어 보지 않고.”
궁시령대던 희사가 여상한 내 대답 에 배신감 느낀다는 얼굴을 했다.
서 대륙에 다녀온 강연 이후 또다 시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상소의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태자 전하께서 서라국의 사절로 서 대륙에 다녀와야 한다, 였지.
'다들 이 생각 하고 있었던 것 맞 다니까.'
아무도 갈 엄두를 내지 못해 실천 하지 못했는데, 내가 버젓이 다녀왔 으니. 엄마와 대신들은 치열히 싸우고 있 었다.
엄마는 오늘 결판을 낼 작정인지 내게 아침 강연에 참여하지 말라고 까지 이야기했다.
엄마 또한 서라국인이라 서 대륙에 대한 공포가 있고, 그 탓에 나를 보 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이해한다.
'그래도 뾰족한 방법이 또 있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대강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본 궁녀들의 눈빛이 곧 장 내게 쏠렸다.
“화룡궁에 가야겠구나. “아니 됩니다!” 그래. 이럴 줄 알9갔지.
엄마가 내게만 나오지 말라고 했을 리가 없다. 당연히 내 궁녀들에게도 말해 두었겠지. 그에 나는 빙그레 웃고는 고운의 팔뚝을 잡았다.
[화룡궁으로.]
그 즉시 눈앞이 새하얘졌다가, 내 방이 아닌 풍경이 보였다.
한 발짝 내딛으려던 나는 순간 극 심한 현기증에 몸을 휘청였다.
단단한 팔이 나를 붙들었고, 나는 그대로 잠시 숨을 골랐다.
이능 다 썼다.
얼마 전 서 대륙을 다녀오며 엄마 에게 받은 이능을 거의 다 썼는데, 지금 동궁에서 화룡궁으로 고운과 이동하며 아주 조금 남았던 이능을 모두 소진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닥닥 긁어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몰래 서 대 륙에 갈까 봐 엄마가 더 이능을 내 어 주지 않은 걸 어쩌나. 어지러움은 일시적인 반응이었기에 나는 금세 괜찮아졌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고운이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괜찮아.”
웃으며 말했지만 고운의 얼굴은 여 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네가 맞구나?”
난데없는 말에 고운이 의아한 얼굴 을 했다.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웃었다.
고운은 어릴 적부터 내 감정 변화 에 기민했고, 그 탓에 내 의중을 유 달리 잘 알아차렸다.
꽤나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도 여전 히 그게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면서도 쓰게 한 숨을 내쉬었다.
두렵지 않을 뿐이지, 나도 서 대륙 에 가는 것이 씩 탐탁지는 않았다. 무거운 직책도 책임도 싫어하는 사 람인데. 왜 나라고 편안한 집을 떠나고 싶 겠어?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가야만 해.” 서라국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는 선 한 마음은 아니었다.
대신들은 내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감시했고,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
아기씨를 달래는 것으로 조금 특별 하게 봐주나 했지만, 그건 정말 한 순간이었다.
황실의 피를 잇지 못한 이.
죄인의 핏줄을 가진 태자.
그 말은 꼬리표처럼 나를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지금은 엄마의 후광에 기대어 있지 만, 언제까지나 엄마가 내 곁에 있 을 수는 없다.
내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또 태 자로 완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명 분이 필요했다.
옥좌를 물려받을 이답게 다른 사람 들보다 뛰어나다는 증거.
가령 모두가 두려워하는 서 대륙에 가서 작금의 큰 문제인 이능 고갈을 해결한다든가 하는 것 같은.
대전으로 걸어간 나는 환관을 재촉 해 문을 열게 했다.
“태자 전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