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16 0 0
                                    


“공주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잠결에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꿈틀대던 나는 특정 단어에 눈을 번쩍 떴다.
공, 공 뭐?
공주 마마?
이른 아침.
잠이 덜 깬 머릿속으로 그 단어를 되되던 차에 잠이 싹 달아났다.
'으아아악!' 뭐야. 진짜?
거짓말 아니고?
나 공주야 이제?
미리내랑 가람이 내 아빠고, 예화가 내 엄마야?!
아니, 그래. 미리내는 그렇다 치고, 예화랑 가람은 그냥 애 아니야?
나보다도 더 에 같은데 내 부모라 고'2
나는 침상을 발로 팡팡 차내다 고 개를 돌렸고, 보랏빛 눈을 가진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놀라 누구냐고 물을 뻔했지만, 그 아이도 똑같이 움직이는 것을 보 고 정체를 깨달았다.
거울 속의 나는 어렸다.
잘 오른 볼살과 뽀안 피부가 아기 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만큼 어렸다. 맞아. 난 어렸지.
가람보다, 예화보다.
심지어 고운보다도•••  나는 거울을 잘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주위의 태도와 앳된 목 소리 탓에 정신 연령이 낮아지는 기 분이 드는데, 거울까지 보면 정말 어 린아이가 될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랬다.
나는 불타오르던 의지가 파스스 식 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내가 좀 귀엽고 깜찍하고 사 랑스러워서 예쁠 수도 있지, 음•••
'그럼 이제 어마마마, 아바마마라고 불러야 해?' 겉으로는 귀비 마마, 황제 폐하, 하 며 예를 자렸지만 속으로는 이놈 저 놈 마음껏 까대던 사람들한테?
나는 침상에서 몇 번 더 뒹굴다가 몸에서 힘을 쭉 뺐다.
기분이 너무 생경했다.
내 부모라고•••  입을 웅얼거리다가 결국 끄응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만약 이 세계에 환생했다면 괜찮았을까?
어릴 적부터 이 삶에 적응해서, 다 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아마 그랬다면 엄마가 되어 주겠다 는 예화의 말이 눈물 나게 고마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난 스물다섯 살이야•••
내가 기억하는 그 삶은 이제 전생 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스물다섯 살의 생을 기억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는 어른이어 아 한다는 것이 억울하고, 사소한 것 들이 서러웠다.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들어 줄 사 람이 없다거나,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면 안타까워해 줄 사 람이 없다는 일 같은 것들이.
하지만 그게 언제 적 일인지.
이제 와서 전생의 나와 나이 자이 가 얼마 나지도 않는 사람이 '자! 나 는 이제부터 네 부모니까 얼마든지 기대고 어리광 피워도 돼!' 하는 말 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거리를 두던 예화랑 하루아침에 진해져서 이런 이아기들 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불에 얼굴을 몇 번 더 부비다가 고개를 돌렸다.
화장대에 세워 둔 거울이 보였다. 거울 안에 울상인 아이가 비겼다. 앳된 얼굴.
앙다문 입술.
잘못 끼운 퍼즐 조각 같은 무표정 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
여덟 살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산아'의 얼굴은 놀랄 만큼 나와 닮 아 있었다.
이 모습 그대로 큰다면 전생의 내 얼굴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전생의 얼굴을 본 적이 오래 되어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분 명 내 생각에는 그랬다.
꼭 여덟 살로 되돌아온 것 같잖아.
외모에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좋지만 하필이면 이렇게나 팔자 기 구한 아이와 얼굴이 똑같아서는.
거울 속의 아이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심란하다는 표정이었으나,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볼이 볼록 올라와
서 참•••••• 귀여워 보였다. '진짜 어리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 적은 얼마 없다고 생각했다.
혀 짧은 소리를 내거나 삼인칭을 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잘 웃 지도 않았으니까.
어린아이의 몸이란 웬만한 일을 해 도 귀여워 보인다는 것을 간과한 것 이다.
서늘하게 살기 어린 얼굴을 하면 무엇하나.
통통하게 잘 오른 볼살이 씰룩대고, 자그만 입술이 삐죽이는데.
내심 내 이미지가 냉랭한 후궁 마 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 믿음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혹시 몰라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무서운 표정들을 지어 보았으나, 죄 다 위엄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거울을 바 라보았고, 어린 여자아이가 보랏빛 눈을 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 는 것을 마주했다.
귀엽••• •• 긴 하구나.
내가 여덟 살 때에는 이렇게 좋은 관리를 받지 못했다.
그때는 빼빼 말랐었고, 살갖도 여러 번 다쳐 변색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거울 속의 아이는 아 낌없이 관리받은 티가 났다.
머리카락은 영양이 부족한 부분 없 이 매끄러웠고, 피부는 뽀얗고, 아이 다운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매번 갈라져 부르트던 입술도 거스 러미 하나 없었다.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채는 것은 볼 이었다.
표정이 조금이라도 변할 때마다 볼 살이 움직였다.
새하얗고 통통한 볼이 말랑말랑해 보여, 나는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볼 을 움켜잡았다.
헉.
마, 말랑말랑해.
안 그래도 보드라운 아기 피부에 궁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가꾸는 덕에 피부는 트러블 하나 없이 부드 러웠다. 보들보들하면서도 주욱 당기면 쫀 쫀했다.
뭐야. 이런 게 내 몸에 붙어 있었 어?
왜 난 볼을 만져 볼 생각을 오늘에 서아 한 거지?
거울에서 자연스레 시선이 멀어졌
다.
나는 홀린 듯이 뺨을 주물거렸다.
슬라임을 만지며 기분이 좋다는 사 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 런 촉감이라면 확실히 그럴 것 같았 다.
주물거리고, 톡톡 두드리고, 살살 문지르며 뺨의 부드러움을 만끽하던 찰나.
“기침하실 시간이에요, 마마- 이
머?” 희사가 들어왔다. 노크 하나 없이, 발랄한 그녀의 성정답게.
흐물흐물해져 볼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희사와 눈이 마주치고는 딱 굳 고 말았다.
잠시 정적이 지나갔다.
평소에는 그 정도의 무례는 아무렇 지 않게 넘어갔지만, 지금 이 순간만 큼은 평소 희사를 크게 혼내지 않은 과거의 나를 좀 죽이고 싶었다.
나는 스르록 볼에서 손을 뗐다. “소, 소근육 발달이야.” 희사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선수를 졌다.
그녀는 어던가 요상한 얼굴을 했지 만, 나는 당당했다.
정말.
진짜로.
희사가 일찍이 들어온 뒤 아침 산 책이라도 하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 었다.
며칠 뒤로 훌쩍 다가온 아륜에 입 을 예복들을 고쳐야 했기 때문이다.
내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다른 방 으로 이동하며 희사가 새삼 단성을 내질렀다.
“역시 동궁은 훨씬 크고 웅장하네
요.” 그래. 정말 적응 안 되게도 말이
아••
화려한 것을 따지자면 후궁전이었 던 화선궁과 화서궁이 더 화려했지 만, 동궁은 그 특유의 고전적인 멋이 있었다.
무엇보다 화선궁에 있었던 커다란 못이 없는 것이 좋았다. 나는 만류 탓에 시퍼런 물을 무서워했는데, 아 무리 그래도 그 커다란 못을 메우라 는 말은 하지 못해 화선궁에서는 슬 슬 그 못을 피해 다녔다.
'물론 그건 아직도 내 거지만.' 화서궁에서 화선궁으로 이사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거처를 옮겼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내게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황궁 안에서 세 개의 궁을 가진 전대미문한 사람이 되었 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궁녀들의 옷 입히기는 피할 수 없었다.
색색의 비단들이 바닥을 수놓았다. 장신구가 가득 든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갖가지 매듭들과 수가 놓인 원단까지 합쳐져 그 방 안이 마치 의상실 같았다.
아니,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상의원 (尙衣院)인가.
“갑자기 마마께서 공주 마마가 되 실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이야. 아륜이 일마 남지 않아 이 바쁜 시기에.”
일 거리가 늘어난 궁녀들이 투정했 으나 그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감 출 수 없었다.
궁인들의 급은 그들이 모시는 상전 에 따라 달라지는 터라 꽤나 좋은 듯했다.
본래 내가 입으려던 복식도 충분히 화려했으나, 공주의 복식은 일개 후 궁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는 재료들의 질이 한 단계씩, 혹 은 그보다 더 뛰었고 장식은 더 화 려해졌다.
금지되었던 금색과 자주색이 허용 되어 궁녀들은 희희낙락거리며 내게 무슨 색이 어울릴지 대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금실로 수 가 놓인 자줏빛 비단이 보였고, 저곳 으로 시선을 돌리면 금강석과 진주 가 박한 뒤꽂이가 보였다.
그렇다고 정면을 보자니 어른 기만 한 거울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 었다.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저렇게 큰 거울을 구했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딜 봐도 휘황찬란한 광경이었지 만 썩 놀랍지 않았다. 습관처럼 또 하품이나 했다.
“졸리십니까, 마마?” 서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 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월.
그럼에도 내가 눈을 비비자 희사가 눈을 다람쥐처럼 깜빡이다 내게 물 었다.
“그럼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해  릴까요?” 희사는 떠돌이 생활을 오래 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야사를 많이 알 고 있었다.
재미있겠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 이어진 희사의 말에 정말로 잠이 싹 달아났다.
“아까 마마를 깨워 드리려 들어갔 있는데, 마마께서 볼을-”
“희사.”
목소리를 깔았으나 어린 강아지가 아르릉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꿩 대신 닭이라고 희사를 째 려보았으나, 희사는 도리어 씨익 웃 었다.
“이렇게 말랑말랑-
“희사!” 말하지 말란 말이야!
주먹을 쥐고 희사를 난타하니 희사 가 장난스레 히힛 웃었다.
“마마도 참. 제가 아플까 봐 톡톡 두드리시는 거예요?”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느1 웃는 희사의 앞에서 나는 짜게 식었
다.
진심으로 때린 거였다.
희사의 말에 궁녀들 사이에서는 활 기가 돌기 시작했다.
화가 났다는 뜻으로 입술을 꾹 다 물었으나 볼이 퐁 하고 부풀려졌다.
재밌나. 재밌나고.
어른스럽게 봐주자고 생각했을 때, 궁녀들이 내게 어떤 색이 좋나고 물 어 왔다.
금색과 자주색 중 하나는 넣고 싶 어 하는 눈치이기에 자주색이 좋다 고 답했다.
흑발에 자안을 가진 내게 금색 옷 은 영 아니었다.
궁녀들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옷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이 대강 정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심하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머리 모양과 장신구들도 정해야 했
다.
“어떤 것이 좋을까요?”
“떨새나, 보요도 예쁠 텐데•••••• 움 직일 때마다 찰랑이면 우리 마마 불 편해하시려나?”
역시나 장신구 이야기가 나왔다. 나 는 딴청을 피우는 척 이야기를 경청 했다.
혹시 가체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웠 던 탓이었다.
혼례식 때에 어마어마한 무게의 가 체를 머리에 얹은 전적이 있었던 나 는 가체에만큼은 학을 뗐다.
자라리 머리에 파인애플을 쓰고 말
지.
“아차, 내 정신 좀 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유선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 나 무언가를 가져왔다.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였다.
나는 그 상자에서 가체가 나오면 곧바로 뜯어말릴 심산으로 시선을 집중했으나, 다행히 그 상자에서 나 온 것은 가체가 아니었다.
“이것, 이것이요!”
열쇠를 몇 겹이나 풀고 나서도 보 드라운 비단에 꽁꽁 감싸져 있는 그 것은 용 비녀였다.
서라국 황족의 상징. 본래 비녀는 혼인한 성인만이 사용했지만, 이 용 비녀는 제외였다.
말 그대로 황족만이 쓸 수 있는 장 신구인 것이다.
심지어 용의 입에 물려져 있는 여 의주는 미리내의 것보다 컸다.
“폐하께서 가장 좋은 것을 내주셨 어요. 이것 보세요. 폐하의 것을 제 외하고 가장 큰 여의주 조각을 세공 한 것이래요!” 그것을 본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 숨이었다.
“봉작식도 치르지 못해 이만저만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구나.”
“어머, 어찌 그런 이야길 하셔요!
급히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마마께서 는 동궁도 군호도 받으셨는걸요!”
안심했다는 듯한 서연의 말에 희사 가 득달같이 반박했다.
나는 그 말에 애매한 얼굴을 했다.
처소가 동궁으로 바뀌었고, 의복의 색도 바뀌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황 제가 내게 내린 군호였다.
강회 공주.
서라국은 유난히 꽃을 좋아했다. 황 제궁을 포함한 웬만한 궁들의 이름 에는 꽃 화자가 들어갔고, 황제의 묘 호나 총에받는 후궁의 접지에도 화
(花) 자가 들어갔다.
아이를 너무나 총애한 나머지 제 자식으로 입양한 황제가 제 수양딸 에게 내리는 이름이라기엔 독특했다.
이유를 묻는 내게 예화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편안렬k 강이/ 가끌 의를姦7「h. 마음 이/ 드느냐?'
어째서 '화를 넣지 않았냐는 내 물 음에 예화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여쁘지 않아도 괜찮으니, 편안하 고 가쁘게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
람O/었단다.
그렇게 말하는 예화는 조금 슬퍼 보였다.
산아. 검은 산.
그 이름은 전생에서의 내 이름이기 도 했다.
어감은 예뻤지만 뜻은 씩 그렇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아무 한자나 가져다 지은 듯한 이름이었지만 별다른 감 상은 없었다.
익숙한 이름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 그대로 살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공들여 이름을 지 어 준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비녀를 돋보이게 지장해 드려야겠 구나. 이제 아무도 마마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못할 거야.” 상넘에 빠져 있던 나는 궁녀들의 수다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생경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난 그저 공주 되겠다고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내가 공주라는 사실이 도장 꽝꽝 찍혀 코팅까지 되 고 있었다.
여란 가의 막내딸 신분으로 황궁에
들어온 내가 정통 황족으로 인정받 게 되다니.
종종 불임인 종친들이 아이를 입양 해 가문의 대를 잇는 경우는 있었지 만, 황제가 후계자를 입양하는 일은 전대미문이었다.
돈과 권력이면 못 할 것도 없다더 니.
제 딸을 황태자로 만들고 싶은 기 윤과 뭐가 됐든 날 제 딸로 만들고 싶어 한 예화의 시너지는 엄청났다.
“정말 왜지••

한숨만 푹푹 내쉬던 내 머릿속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지금까지는 수많은 후궁 중 하나였 기에 나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 다.
그저 황제에게 사랑받는 이린 여자 아이.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공주였고, 황태자 로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동궁을 자 지한 만큼 후계자의 위지에 있었다.
이에 따라온 매우 합리적인 생각은 그것이 합리적인 만큼 불길했다.
•••이제 일 해야 하려나?'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