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4 0 0
                                    


'산에의 죽음에는 엄마 또한 관 여했다.
나를 그렇게나 사랑하는 엄마가 다른 아이에게는 그토록 무관심해 서, 그 아이가 죽도록 내버려 두있
다.
그것에서 오는 거부감일까, 아니 면 내게도 그럴 수 있다는 공포심 일까.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산야가 그들이 잘못하지 않았다 고 하기는 했었는데.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나는 쓰게 웃었다.
잘못이 없다니.
적어도 엄마가 '산야를 조금이라 도 안타깝게 여겼다면 그 아이가 열 두 살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 '산아는 마음씨 작한 아이이니 날 안심시기려 둘러 낸 말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핑계를 대듯 그 말 을 붙들고 있는 게 우스웠다.
나는 결국 '산야'와 엄마 중에는 엄마를 고를 것이다.
'산야'가 피해자이지만, 내가 더 사랑하는 것은 엄마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잘못 을 덮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마냥 원망할 수도 없고, 아무 일 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엄마를 대할 수도 없다.
생각을 이어 가려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토템 같은 어린아이가 이상한 소리 로 울고 있는, 넓은 만큼 섬뜩한 대 전
이런 곳에서 무언갈 오래 생각하 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조심스레 다시 앉히 고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울고 있던 아이는 잠시 기침을 하 더니 또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시간 되면 다시 올게.”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꼭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 나
아이를 달랬다.
함부로 만지는 것이 예법에 어긋난 다니 낮에는 못 오겠지만, 밤에도 '산야'에게 몸을 내어 주어야 하니 잘 못 오겠지만 그래도. “울지 마, 아가. 목 아프겠다.”
얘는 뭐가 그리 서러워서 이렇게 울까.
몇 번 더 아이를 도닥인 나는 조 용히 대전을 빠져나왔다.
화룡궁에서 동궁까지 걸어가는 시 간은 조금 길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고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고운, 너는 내가 큰 죄를 지으면 어떨 것 같아?” 난데없는 질문에도 고운은 진지 하게 고민해 주었다.
“하늘 아래 뉘가 마마를 심판한단 말입니까.”
돌아온 대답은 충성스러웠지만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 물론 그렇기는 한데•••
“그럼 내가 무슨 죄를 저질러도 너는 괜찮니?”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고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고운을 심란하게 바라 보다가,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면 안 돼, 고운.”
고운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다. 하지만 기쁘지 않 았다.
“내가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 않다 는 건, 네가 여전히 날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야.” 누군가는 상대가 어떻든 무조건 적으로 덮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 고 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마냥 수용해 주는 것이 늘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만큼 비판할 줄도 알아야 했다.
아니, 애초에 그건 맹목적인 애정 이전에 있어야 할 기본적인 도덕 이다.
“고운. 나는 네가 무언가를 잘못 하면 널 질책하고 혼낼 거야.
나도 너를 아끼지만, 오히려 그래 서 더욱.
“너는 네 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나는 그 곁을 지키며 함 께 벌을 받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 다.
내 말에서 내 고민의 해답을 찾은 탓이었다.
“나는,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게 내 사랑이거든.” 그래. 그랬다.
내가 엄마를 꺼렸던 건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서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내 어머니를 사랑한 다.
그저 그 죄를 함께 짊어지기가 무 서웠을 뿐이다.
그래도 내 엄마니까.
입장이 바뀌었어도 엄만 얼마든 지 날 위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러겠습니다."
제법 결연한 고운의 목소리가 들 렸다. 고운은 그 목소리와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나는 작게 웃어 주었다. “응. 고마워.” 너도, 나도 힘내 보자. '내일은 엄마를 보러 가야지.'
나는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동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동궁에 다 와 갈 때 즈음 누군가 동궁의 대문 앞에 서 있었 다.
나는 잠시 경계했지만, 이내 그 사람의 머리가 새하얗다는 것을 보았다.
'엄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내게 고 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엄마의 얼굴 이 역광 아래 보였다.
엄마는 나를 보고 금세 활짝 웃었 지만, 달빛 아래 빛나는 백발을 가 진 엄마의 모습이 낯설었다. 바뀐 외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 는데, 아직 아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웃으며 내게 한 발짝 다 가왔지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댔다.
그러자 나를 보고 활짝 웃었던 엄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들 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엄마가 몸 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눈이 마주친 나는 멍하니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어째서인지 아주 슬픈 일굴 을 했다.
“다가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렴.”
“정말이야.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게.” 그건 조금 의아한 말이었다.
잠시 어색해 머뭇거린 것을 이렇 게까지 받아들인다고?
“산아. 그렇지만 어서 들어가렴. 시간이 많이 늦었잖니.”
엄마는 정말로 내게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애타는 얼굴로 나를 얼렀다.
꼭 다른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 도.
나는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떠 올렸다.
얼마 전, 화룡궁에서 엄마와 함께 잠들었다가 동궁에서 깨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몽유병 탓에 내 궁으로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
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산야'가 깨어났었구나.
화룡궁에서 깨어났으니 엄마를 마주했을 것이다.
그 뒤 '산야는 동궁으로 돌아왔 고, 나를 그 아이로 착각한 엄마는 내가 그녀를 싫어했다는 듯 행동 한다. 엄마와 마주친 '산아'가 어떤 반
0
보였는지 알 수 있는 행동이 었다. 그걸 알자 숨이 덕 막히는 것 같 았다.
나는 애써 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
었다.
“엄마. 저 깨어 있어요.”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에 엄마의 눈 이 커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게 걸어왔고, 나는 엄마에게 안겼다.
나를 끌어안은 엄마의 손이 떨리 고 있었다.
“아가.”
그 목소리에는 안도와 걱정이 동 시에 담겨 있었다.
밤이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병 으로 보일 거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거겠
지.
“나 괜찮아요.”
아픈 건 내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내가 받을 걱정도 아니었다.
내게는 이렇게나 상냥한 엄마인 데.
분명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왜 엄 마는 '산야를 외면하고 나를 사랑 했을까.
나는 따뜻한 품에 가만히 안겨 있 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숙청당한 가문이 몇 있다고 들었 어요.”
다른 아이들을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실은 그때, 나는 조금 두려웠었다.
멸문의 목적으로 죄 없는 아이들까 지 모두 죽였을까 봐.
“원래 다 사형시켜야 하는데, 어 째서 살려 두셨어요?”
내 물음에 엄마는 잠시 침묵하더 니, 나를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나를 재우듯이 등을 토닥였
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대답했다. “네가 말한 대로, 멸문이라 함은 그 가문의 이름을 받은 모든 이들 을 죽이는 것이 맞단다.”
“그중에는 복중의 아기나, 아직 어 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지.”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문 몇 몇이 황제의 손에 멸문했다는 말 을 두려워했던 거고.
“자마 죽일 수가 없더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덤덤하게 나 온 그 말에 안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네 또래인 아이들이 많아서, 그 위로 네가 겹쳐 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 아이들의 죄 라고는 그저 그 가문에 태어난 것 뿐인데, 어찌 죽일 수 있겠니.”
그래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어 신분을 강등시기고 재물을 빼앗았 다며, 엄마는 조금 죄책감 이린 목 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정말 많이 변했다.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제 다른 아 이들마저 안타까워할 줄 안다.
그러니 혹시라도 '산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엄마는 그 아이 를 구할 것이다.
엄마는 '산야'에게 사과할 수 없 다.
'산아에게 죄를 지은 것은 오지 않을 미래의 엄마이고, 지금의 엄 마는 그러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앞으로 그런 아이가 생 기지 않게 할 수는 있었다.
당신은 변했고, 그런 일을 저지르 지 않을 것이며 혹여 그랬다고 해 도 그걸 뉘우칠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모르는 노래였지만 낮은음이 편안 했다.
몸이 일정하게 흔들리고, 닿은 온 기가 따뜻하다.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스르록 잠 들었다.
예화는 가만히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안고 있는 아이를 확인하자 산야 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 딸아이를 내려다보는 예화 의 눈빛이 서글펐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아이였다. 너무나 오래 힘들이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달빛 아래 거멓게 죽 은 눈동자로 뒷걸음질 졌을 때 예 화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행히 산아는 곁을 내어 주었고, 이런저런 것을 묻더니 그대로 잠 들었다.
꽤나 오랫동안 아이를 안고 걸었 지만 예화는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가 잠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었다.
예화는 딸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리 고 입을 맞췄다.
혹시라도 깨어날까 조심스러운 손 길이었다.
아가, 편히 잠들렴.
부디 모두 잊고, 편히 잠들거라.

17Dove le storie prendono vita. Scoprilo 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