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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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각. 화룡궁.
황제가 머무는 궁은 그 어떤 궁보 다도 경비가 철저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에 상주했고, 방 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황제 의 침실은 미로를 해쳐 들어가듯 복 잡했다.
“아나. 이건 아니고•••  그 구중궁궐 안에 틀어박힌 황제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예화는 가느다란 세필을 잡고 공들 여 무언가를 쓰다가, 결국 앓는 소리 를 내며 종이를 구겼다.
관직을 명하거나 공을 치하하는 것 이 아닌, 지극히 사적인 내용의 편지 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썼던 어떤 글들보다 가장 열성적으로 편지를 작성했다.
값비싼 종이들이 구겨져 바닥을 굴 렀다. 예화는 붓을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머저리를 보았나.” 그녀를 가르친 수많은 선생들에게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은 황제, 예화 가 책상에 쾅 머리를 박았다.
그녀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 을 알았다.
다정을 학습받았으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는 황 제의 마음가짐이었다.
어린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려면 무 엇을 해야 하는지 예화는 배운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인 터라 서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고작 여덟 살인 아이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라고 종용할 수 없었다.
아이가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은 당 연했다.
선물을 퍼붓는 행동이 불편했을 수 도 있었다.
예화는 아이가 자신을 편하게 대해 주길 바랐다.
제 궁녀들이나 친구인 고운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미리내나 가람 정도로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누구보다도 예화 를 가장 꺼렸다.
다른 이들과 대화할 때는 웃으며 핀잔이라도 주던 것이 예화를 만나 자마자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 력했다.
거절당한 이유도 모른 채 배적당한 예화는 서러웠다.
그런 일들이 자꾸만 쌓였고, 결국 그것이 사달을 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산야가 그녀에게 마음 을 열 수 있을까?
예화가 호감이나 유감을 표하는 방 법은 언제나 무언가를 하사하는 것 이었다.
땅, 금은보화, 영약 같은 것들.
그녀는 자신의 방법으로 숫제 찬양 이라도 하듯이 아이에게 선물을 보 냈다.
하지만 맹세코 꿍꿍이가 있어서 그 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좋은 것을 보면 아이가 떠올 랐다.
이 비단으로 옷을 지어 주면 참 어 여쁠 덴데.
이 당과 가져다주면 잘 먹을 텐데.
이 꽃 그 아이 방에 장식하면 참 향이 좋을 텐데, 하고.
예화는 그 감정이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었기에 여러 가지 가설들을 대 입해 보았다.
첫 번째. 성에인가?
예를 들어, 산야와 동침을 한다고 가정 한다면 '미친 건가.'
예화는 단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웃 거나 무표정이 대부분인 그녀의 표 정 변화를 고려했을 때 매우  일이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 그러한 가정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해도 온몸에 소
름이 와드득 올라왔다.
산아가 올해로 여덟인데, 예화는 하 긴 해?
그럼 두 번째. 인류애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예화는 그것 또한 기각했다.
그녀는 일생에 걸쳐 백성들을 자애 롭게 사랑하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 고 배웠고, 그것을 최대한 실천했으 나 산아와 그들을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었다.
아마 그들 백을 데려온다 해도 산 아보다 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산아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예화가 곰곰이 고민했다.
'산야는 그러니까•••  “귀엽지.”
암. 그렇고말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문자답한 예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그 사실에 관해서는 한 지 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토실토실한 뽀안 볼이 귀엽고.
무심한 척하지만 단 것에 눈이 반 짝이는 것도 귀엽고. 귀찮다는 듯이 눈이 가늘어지는 것도 귀엽다.
예화의 무미건조한 인생에서 그토 록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처음이었다.
밤톨 같은 아이가 움직이는 것만 봐도 예화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산아는 감정이 극히 절제되어 있었 다.
마구 뛰어다니며 천방지축으로 사 고를 치지도 않았고, 울며불며 떼를 쓰지도 않았다.
예화는 산아가 무엇을 하든 사랑스 러웠으나 역시 산아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가장 좋았다.
무표정인 척 곪은 속을 감추는 아 이를 보며, 그 아이가 찬란하게 자랐 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 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단순히 사물을 아끼는 것과는 달랐 다.
애초에 예화는 무언가에 애착을 두 는 일이 없었지만, 무언가가 편리하 여 아껴도 그것이 망가졌을 때 씩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산아는 그럴 수 없을 것이 다.
단순히 그것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는 이유만으로 성립하나? '그 정도로 사랑스러우면 가능하지.' 예화는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마지막.
그녀는 산아를 자식으로서 아끼는 가?
예화는 그것이 가장 적합하다 생각 했으나 여전히 고개를 가우뚱 기울 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화가 지금껏 보 고 학습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무 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제 부모를 독대한 것이 손 에 꼽았고 다른 귀족 가문 또한 부 모자식 간의 사랑이 그다지 돈독하 지 않았다.
그저 부모는 아이를 기울 의무가 있고, 아이는 그런 부모와 가문을 위 해 일하는 것.
예화가 본 것은 그것이 다였고, 산 아와 그녀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卍다.
하지만 예화는 사랑에 관해 그 누 구보다도 많이 배웠다.
부모는 자식을 누구보다도 아낀다. 제가 굶더라도 자식 입에 먹을 것 들어가는 것이 기쁘고, 좋은 것이 있 으면 무엇이라도 자식을 주고 싶으 며 아이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예화는 황제로서 후계를 생산해아 했고, 누구에게서 후사를 보아야 가 장 유리할 것인지 늘 고민하곤 했다. 하여 그녀는 자식을 낳는다면 배운 대로 아이를 쟁기겠지만, 그건 진심 으로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아닌 의 무였다.
하지만 산아에게는 그렇지 않다. 예 화는 산야를 백성으로서, 그리고 후 궁으로서 아껴야 할 의무는 있지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을 의무는 없 었다.
역시 이건 사랑이다!
그녀는 지금껏 고민한 시간이 무색 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환하게 밝아진 얼굴은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예화가 틀어 올리지 않아 길게 홀 러내린 제 머리칼을 매만졌다. “여전히 흑발인데.” 잠시 고심하던 예화가 주위에 아무 도 없는 것을 살폈다.
황제의 권위와 위신은 중요했고, 지 금 그녀가 하려는 일을 누군가가 본 다면 그 권위와 위신은 바닥에 처박 힐 것이다.
다행히도 편지를 쓰느라 모두 물린 덕에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황제 의 침실은 뛰어다녀도 좋을 만큼 커 다랬다.
“그 그 ”
목을 두어 번 가다듬은 예화는 제 눈앞에 놓인 종이를 결연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렸
다.
“떠올라라.”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예화는 귓불이 조금 빨개졌지만 목 소리가 작았던 것으로 치부했다. “떠올라라!”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에이씨.
예화는 종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 으로 종이를 획 날려 버렸다.
팔랑팔랑 잘도 움직이는 종이를 한 번 째려본 그녀는 터덜터덜 일어나 종이를 주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산아에게 사과 편지를 써야지.' 직접 만나서 말한다면 더욱 좋겠지 만, 준비하지 않은 사과를 청산유수 로 말하기에 예화는 능력이 부족했 기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신의 선물을 씩 달가워하 지 않아 서운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나이를 먹은 만큼 무작정 서운하다 는 티를 낼 것이 아니라 좀 더 현명 하게 대처했어아 했다.
화선궁에서 화룡궁까지 터덜터덜 걸어오며 예화는 정신을 자렸고, 궁 에 도착하자마자 종이와 붓을 잡고 침실에 틀어박혔다. “어렵구나.”
입을 우물거린 예화가 다시금 한숨 을 내쉬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도, 이린아 이를 대하는 것도 처음이라 하나부 터 열까지 모두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부족 함을 핑계 삼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묵히 넘어갈 생각은 없었 다.
'어린아이에게도 잘못을 했다면 사
과하라.' 어렵게 구해 온 정상적인 육아 서
적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예화는 전 세계를 박박 뒤져 긁어 오라 한 육아 서적이 방 하나도 재 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기함을 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배 울 필요도 없이 좋은 부모가 된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곧 수긍했다.
태생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 느 01巨= 亡0 그릴지도 몰랐다. 안타까 운 것은 예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
예화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아 하 는지만을 배웠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다.
과하게 서툰 탓에 실수도, 잘못도 찾았다. 확실히 좋은 보호자는 아니 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 았고, 그것을 보완하려 노력할 줄 알 았다.
오늘도 그녀의 침실 한편에는 육아 서적들이 빠르게 장을 넘겨 가고 있 었다.
이튿날, 화선궁의 내 방.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 아 있었다.
궁녀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나의  치를 보았고, 나는 비단으로 감싸여 진 종이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 아 있었다.
“저, 마마•••
희사가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것이 시작 버튼이라도 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조심 스레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종이 대신 내 머리채를 잡았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마마!”
양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한껏 쥐어 잡자 궁녀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냥 놓을 수는 없었다. 꽉 잡은 머리채를 두어 번 흔들었다.
“마마!”
이를 으득 가는데, 서연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외졌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내  曰을 잡았다.
“차라리 소인을 벌하십시오. 어찌 이러십니까.”
•••••뭘 그렇게까지.
어쩐지 삘쭘해져 스르록 손을 놓자 서연이 서둘러 내 손을 꼭 붙들었다.
“마마•••
“우리 마마께오서 어찌, 그런 끔찍
하 01 으.  1- 근  궁녀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눈물을 글썽였다.
스트레스 풀겠다고 머리채 한 번 잡은 것뿐인데, 와악 소리라도 질렀 다간 무릎 꿇을 기세였다.
손목에 거칠거칠한 감촉이 느껴졌
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퍼렇게 질린 고운이 내 손목을 꼭 붙들고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 아이를 바라보자 곧 눈을 맞 춰 왔다.
여전히 눈을 덮는 머리카락 속의 눈동자가 울망했다.
곧 고운이 고개를 숙였다. 내 눈앞 에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어째 쥐어뜯으라고 대 준 것 같다.
그 반응들에 오히려 맥이 탁 풀렸 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무어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소란
을 떨어.” 내 말에 희사가 팩 고개를 들었다. 희사의 눈도 촉촉해져 있었다.
“대단한 일이지요! 폐하께 알렸다면 당장에 화선궁으로 버선발로 뛰어오 실 겁니다. 아, 아니. 이럴 것이 아니 라 어서 폐하께 “다신 안 하마.” 제발 그것만은.
절박한 내 얼굴에 희사가 움찔했다. 나는 놓치지 않고 희사를 초롱초롱 한 눈으로 바라보0갔고, 곧 그녀가 허 물어졌다. “귀여우셔••
“희사. 무엄하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희사의 목 소리 뒤로 서연의 핀잔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서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온기가 사라진 손을 아쉽게 내려다보았고, 내 손보다 조금 더 큰 투박한 손이 얹어졌다.
새하얀 손.
하지만 손바닥에 닿은 감촉은 이린 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었다.
아이의 손을 꼭 붙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희희낙락 고운의 앞머리를 자르고 있어야 마땅했을 내가 어째서 내 머 리채를 잡고 있나 하면,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황제의 칙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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