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옷을 갈아입을 때 생각보다 이능 을 많이 썼어.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챙겨 올 수 없어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는 이능 을 쓰기로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예복 자체가 혼자 입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해서 그런가, 예상했 던 것보다 이능이 더 많이 소모되있 다.
'그냥 드레스 입었으면 편했을 텐
그럴 수 없다는 게 에석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곳의 파티에는 파트너가 필요했 다.
유리가 파트너가 되어 준다고 했지 만, 나는 거절했다.
꼭 연인이 아니라 친구와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서로의 신분 이 문제였다.
다행히도 고운이 내 호위 신분으로 서 대륙에 온 것이 아닌지라 그의 에스코트를 받을 수 있었다.
실바누스에서 늘 예복을 입고 있었 지만 연회에 걸맞은 옷이니만큼 고 운이 입고 있는 옷은 더 화려했다.
건조한 얼굴을 한 고운이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내게 내준 왼쪽 팔이 돌덩이 같았다.
그 얼굴을 보던 나는 풋 웃었다.
긴장했구나, 너? “긴장하셨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고운이 물 어 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너 아니고?
“아나. 괜찮아.”
뒤집어씌우기는. 여유롭게 웃는데 고운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게는 솔직하게 말씀하서도 괜찮 습니다.” 그 말에 웃는 얼굴에 조금 금이 갔다.
“정말 괜찮다니까. 고작 이런 걸로 긴장을 하니?”
마지막 말은 비꼰 거였는데, 그 말 에 고운이 조금 웃었다.
“그러시군요.”
그 웃음과 대답이 누가 봐도 봐주 겠다는 느긋한 어른의 것이라, 나는 조금 이이가 없었다.
“야, 너-
“서라국의 태자 전하 드십니다!” 망할. 타이밍 봐라.
나는 잠시 이를 갈고는 금세 화사 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연회장의 정 경이 눈에 들어왔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의 시선이 짜기라도 한 듯 내게 꽂혔 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연회장 안 으로 발을 내디뎠고, 그 즉시 수군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꽂히는 말은 없었지만 저 눈들을 보니 호의적인 말이 아닌 건 확실 하군.
'플린트 공작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다행히 얼마 둘러보지 않아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 여 있었는데, 그에 나는 조금 곤란해졌다.
어째 저 사람들이 날 험담하는 주 축 같은데. 그러던 중 나는 한 귀부인과 시선 을 마주쳤다.
고요히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시선 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그러더니 내게 다가왔다.
수군대던 소리가 멎었다. 온화한 인상의 귀부인이 부드럽게 입을 열 었다.
“안녕하세요, 산아 공주님.”
제법 부드러운 물음에 나는 마주 웃었다.
“안녕하세요, 플린트 공작 부인.”
“어머, 저를 아시는군요?”
“그럼요.”
가장 중심에 서 있었으니 가문 내 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머 리를 틀어 올렸으니 기혼자.
유리가 플린트 공작가의 자제들0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공 작 부인이겠지.
“그런데 부인, 틀리셨어요.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내 목소리에 공작 부인이 눈썹을 치켜떴다.
“제가 서라국의 유일한 황손인 것 은 맞지만, 공주가 아닌 태자랍니
다.”
•••어머, 그러시군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영 떨떠름했다.
“실바누스에서는 국왕 전하의 따님 을 공주님이라 부르는데, 서라국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에요.”
“서라국도 물론 그렇답니다. 하지 만 실바누스에서도 왕녀님과 왕세자 저하를 같은 선상에 두지는 않지 않 나요?” 왕의 자식들 중 하나인 공주와 나 라를 물려받을 태자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별 같잖은 걸로 시 비를 건다.
내 말에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다시 웃었다.
“의복이 참 아름답네요. 서라국의 의복인가요?”
“네, 그렇죠.”
“그런데 혹, 제국에서 오신 분이라 실바누스의 옷은 마음에 자지 않으 셨을까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소리인가.
“아뇨, 그것이 아니라-
“귀여우서라. 반지까지 가져와 놓 으시고는 수줍으신 건가요?”
그 말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 만 공작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 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더 아름다운 드레스를 선왕비 전하께 부탁드려 보셔요. 일 마든지 받아 주실 거랍니다.” 플린트 공작 일가가 내게 시비를 걸 거라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내가 아쉬운 쪽이니 웬만하 면 웃으면서 대하자고.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은 참••• '됐다. 글렀다.
어느 정도여야 봐주지,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의미심장한 내 말에도 공작 부인은 그저 웃었다.
“어머, 무엇이요?”
“그 말씀은 꼭 서라국의 태자인 제 가 실바누스의 왕비가 되고자 왔다 는 의미로 들리는데요.”
내 말에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의뭉스러운 웃음에 나는 재차 말 했다.
“제가 전하께 드린 화륜 님의 반지 는 단순히 연인이 주고받는 것 이상 의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제가 서 라국의 이상 현상 탓에 이곳에 온 것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하다 하다 반지 가져온 걸로도 꼬 투리를 잡나. 서라국에 사교계가 없 는 게 천만다행인 일이다.
“헌데 아륜 황가의 유일한 적장자 인 제가 국왕 전하와 결혼을 위해 이곳에 왔다 하시니, 부인의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군
요.”
나는 아파오는 머리를 무시하며 날 카롭게 말을 맺었다.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수군대는 소 리가 다시 들렸다. 아까보다 더 적 의에 찬 듯 목소리가 컸다.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나와 눈 이 마주친 귀족 하나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무슨 이아기들을 그리 즐겁게 하시는지.”
중얼거린 그 말에 수군거림조차 줄 어들었다.
악사들이 눈치를 보았는지 낮게 르던 음악이 끊겼다. 연회장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국왕 전하 드십니다!”
대치는 길지 않았다. 유리가 연회 장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지 만, 싸늘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유리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나 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친히 열어 주신 파티에서 불화를 일으기 고 말았네요.”
공작 부인은 여전히 입을 딱 다물 고 있었다. 나는 덤덤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하,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운이 내 손을 한 번 꾹 잡아 왔
다. 만류가 아닌 격려였다.
그래. 네가 있지.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 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보 았다.
“저는 실바누스에 서라국의 사신으 로 온 것인데, 이곳은 타국에서 온 왕비 내정자를 위한 것 같군요.” 차갑게 말을 맺은 나는 서라국의 방식으로 유리에게 인사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그리고 잠시 뒤.
“죄송합니다••• 유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퍽 서러웠다.
내가 궁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 지 않아 유리는 나를 찾아왔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듯 죽상인 얼굴로.
그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나는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그게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니 제가 사과드리는 것이 맞지요.
그 말이 퍽 의젓했으나, 나는 마냥 유리를 감싸줄 수는 없었다.
“유리. 네가 실권을 잡기 어려운 건 이해에”
그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 은, 허울뿐인 왕가의 왕자. 네가 노력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래도 상황이 씩 좋지 않다.
“하지만 네 영역이 하나도 없는 것 은 곤란에”
시녀들은 내게 왕실의 어른이 드레 스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들이 간 크게 선왕이나 선왕비를 사칭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 또한 멍청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
메어리는 유능한 충신이지만, 한 사람만으로 나라를 굴릴 수는 없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잔소리 한번 해 봤어.” “아닙니다. 조언 감사드려요.”
“이런 상황이면 우리 아연 못 보낸 다.”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유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알고 계셨어요?”
“그럼 모르겠니? 그 서신을 내가 주었는데.”
태연한 내 대답에 유리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그걸 보시면-!”
“안 봤다, 이놈아. 예상한 건데 맞 았던 모양이구나.”
합.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제 입 으로 술술 불어 버린 유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언제 그렇게 되있
•••돌아간 뒤에도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매번 오갈 수는 없지만 서신은 비교적 간단하니, 계속해서 주고받다가 어느 날•••
유리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목소리 에서조차 설렘이 묻어나는 것 같았 다.
그러니까, 11년간 계속 서신을 주 고받았다 이기지?
매번 오갈 수는 없어도 가끔은 왔 다는 거고?
가난과 재채기와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더니.
사랑에 빠져 발그레한 낮이 예뻤 다.
동시에 아무도 나서지 않은 서 대 륙 원정에 함께하겠다던 서련이 떠 올랐다.
그렇게나 열정적인 사랑이라니. 다 른 세상의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우리 아연 눈에 눈물 홀리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날 줄 알아라.” 고약하게 을러댄 말에도 유리는 냉 큼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 왕의 눈 에 총기가 가득했다.
젊다, 젊어.
아, 맞아.
“그래서, 플린트 공작가 관련해서 말이야.”
“정말, 정말로 죄송•• “아, 글쎄 됐다니까. 얼른 가기나
휘이, 휘이.
산아가 새를 쫓듯 대충 손짓했다. 그래도 미안했던 유리는 다시 사과 하려고 했지만, 가차 없이 문이 닫 혔다.
텅 빈 복도에 선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야에게는 미안한 것들 뿐이었다.
'어서 시녀를 배정시켜 드려야 하 는데.'
그나마 괜찮은 시녀를 보낸 것이지 만, 산아는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드0 0 •亡1그녀가 그래야만 했던 것도, 시종 하나 없이 홀로 지내고 있다는 것도 미안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오랜만에 본 소중한 친구였다. 도 움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었는데. '속상해•••
한숨을 내쉬던 유리는 고개를 돌렸 고, 서느런 새벽하늘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마께서 많이 힘드실 텐데, 고운 이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유리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진 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마마께서는 강해 보이시지만 사 실 누구보다 여린 분이시죠. 이미 그러시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산아와 고운은 어릴 적부터 끈끈한 유대를 자랑했다. 이렇게 함께 온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그런 모양이 었다.
그게 다행이기도 했지만, 그걸 제 외하고도 유리는 고운이 반가웠다.
어릴 적, 서라국에서의 추억 속에 는 고운 또한 담겨 있다.
표정 변화도 적고 말수도 없어 무 뚝뚝해 보이지만, 사실 상냥한 친구 였다.
“어찌 제게 말을 높이십니까. 전 하.
활짝 웃으며 한 말에 고운이 무뚝 뚝하게 대답했다. 유리는 저도 모르 게 조금 움찔했다.
자신보다 기가 큰 탓에 고운은 자 신을 내려다보았다.
청회색 눈동자가 어던지 모르게 차 갑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제법 의것해졌지만 여전히 소심한 국왕 유리는 조금 쭈그러들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