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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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금서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원래 조용하기는 했지만 정말 쥐 죽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그렇게 물으면서도 농담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고운은 지금까지 한 번도 농담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너무 뜬금없어서 정말 농담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내 얼굴에 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네 이능은 맹독이 아니 잖아?” 나는 아연하게 되물었다.
이전에 고운에게 이능을 물었을 때 동물로 변하는 것이라 들았었다.
그리고 마호 가의 이능은 맹독이
다.
가문에 입적되었다면 그 가문의 이  1-을 가지는 것이 맞는데.
“그 또한 맞습니다.”
고운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중적 인 의미 같았다.
“동물로도 변할 수 있지만, 맹독의 이능 또한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어?”
“저 이외의 사례를 보지 못했으니 혼치 않은 경우일 것입니다.”
와, 이능을 두 개 가진 경우도 있 구나.
이능은 부모의 이능 중 더 힘이 강한 쪽을 물려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두 개를 모두 물려받았다
니.
신기했지만 이능이 없는 돌연변이 도 있는데, 뭔들 없겠나 싶었다. '내 호위 생각보다 능력자였잖아.
괜히 내가 다 뿌듯해진 나는 웃다 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림자가 됐어?”
그림자는 황궁에서 쓰이는 암대이 다.
그렇기에 이능이 필요가 없었고, 연고 없는 평민을 데려다 무술을 가 르쳐 쓰곤 했다.
곡창 지대를 가진 귀족이면 이름만 남은 가문도 아닌 것 같은데.
호적에 이름까지 올린 자식을 잘도 내어 줬네.
내 질문에 고운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저를 황궁으로 보내셨 습니다. 신분을 숨기라 말씀하시고
그 대답이 어던가 이상했다.
굳이 신분을 숨겨야 했던 이유가 있는 걸까?
'가법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꾹 움 켜쥐었다.
괜히 긴장되는 동시에, 고운에게 조금 고마웠다.
고운이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건 처 음이었다.
나는 책을 접고 고운을 바라보았
다.
“저는 두 가지 이능을 가지고 태어 났지만, 그 두 가지 모두 제대로 운 용할 수 없습니다.”
“힘의 분배가 잘못되어 맹독의 이 능은 너무 강하고, 동물로는 고작 작은 새로 변하는 것이 다이니까
이것 또한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 였다.
생각보다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며 놀리기에는 고운의 얼굴이 결연했 다.
“제 아버지께서는 제가 가문의 이  0제대로 다루기를 원하셨습니 다.”
결심한 듯 단단했던 얼굴이, 아비 지 이야기가 나오자 바뀌었다.
아이는 노골적으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눈앞에 있지도 않은 상대인데, 제 가 말을 꺼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설명을 이어 가려는 고운의 얼굴이 점점 새하얘졌다.
나는 고개를 떨구는 고운의 손을 붙들었다.
'손이 얼음장 같아.'
뒤떨어진 자식, 그 자식을 가르지 려던 부모.
뻔한 이야기였다.
그저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고운이 그 이름만으로 이렇게 떨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고, 그게 고운의 트 라우마로 남은 것 같았다.
“고운. 괜찮아.”
나 또한 듣기에 고통스러운 이야기 였다.
그걸 티 낼 수 없어 나는 아이를 토닥였다.
“여기는 황궁이고, 너랑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내가 얼마나 약한지 알잖아? 난 널 해칠 수 없어. 그럴 마음도 없 고
장난스레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그 제서야 고운이 조금 웃었다.
그래도 여전히 손이 차가워서, 나 는 아이의 손을 살살 주물렀다.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저번에 내가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잠시라도 뿌듯했던 게 미안해졌다.
나는 그냥 너를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너에게는 본 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 서운했다고 들렸을까.
내 말에 고운의 눈에 눈물이 맺혔
다.
나는 아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꽤나 묵직한, 하지만 여전히 작은 머리통이 어깨에 얹혀졌다. “많이 무서웠구나.”
안 좋은 과거가 있었을 거라 예상 은 했지만, 그래도 내심 네가 행복 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학대당했다는 암시를 들으니 마음 이 아팠다.
“고운. 년 그 사람을 무서워할 필 요가 없어.”
나는 아이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 다.
“어린 네 눈에는 아주 그고 강해 보였다는 걸 알아. 그런데 정말로,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황궁에 들어온 뒤에 만난 적이 있 어?”
고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픽 웃으며 고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그게 다 그 사람이 약해 서 널 못 찾는 거야.”
“혹시라도 널 찾으러 오면, 또 어 릴 때처럼 널 괴롭히려 하면 내가 막아 줄게.”
나 자체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내 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강하다.
미리내도, 가람도, 그리고 엄마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고운.
떨리던 아이의 몸이 자자 가라앉았 다. 괜찮나 싶어 고운을 때어 낸 나 는 피식 웃었다. 부끄러웠는지 고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의 새하안 얼굴보다 혈색이 올 라 보기 좋았다.
“더 이야기할래,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아?” 내 질문에 고민하던 고운이 이야기 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수도로 떠나기 전, 어머니께 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곧장 말하지는 못했다. 나 는 그 말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고, 이내 고운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신분도, 이름도 밝히지 말라고. 혹여 네 목소리라도 아버지께 들릴 수 있으니, 벙어리로 살라고.”
고운이 말을 하지 않고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은 이유였다. 모두가 그저 아이의 성격이 특이하 기 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어두운 이유였 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고운이 밤중 에 처음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게는 말을 했잖아.” 이름을 물어본 날, 고운은 내게 찾 아와 이름을 말해 주었다.
내 질문에 고운이 고개를 끄덕였
다.
“마마께는, 그저••
중얼거리는 고운의 얼굴이 화악 피 어났다.
“그래도 될 것 같았습니다.”
고운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 다. 이 상황과 그 웃음이 너무 천진했
다.
나는 그에 마주 웃어 주었다.
무슨 그런 이유가 있어, 이 동강아 지아.
“내가 깨어났을 때 그리 울더니, 역시 너 날 엄청나게 좋아하는구 나.”
기윤의 황실 침입 이후, 내가 오랫 동안 기절한 뒤 고운을 처음 보았을 때.
고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부 석처럼 서서 울기만 했다.
표정 한 번 일그러트리지 않고 뚝 뚝 눈물만 홀리는데, 그게 안타까우 면서도 귀여웠다. 놀리는 내 말에 고운의 표정이 조 금 오묘해졌다.
“그때에는, 제가 제 본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본분9” 그 얼굴이 조금 심각해서 나는 의 아하게 물었다. “마마를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졌다. “누구도 막지 못할 일이었어.”
기윤을 처지한 것 자체가 천운이었 다.
고운이 아무리 무력이 뛰어나다 해 도 어린아이의 몸에는 한계가 있다. 이능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아이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
다.
“네가 날 위해 다졌다면 나는 더 슬펐을 거야.”
고운은 내게 단순한 호위라기보다 는 친구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이제 엄마도 있으니 무력 위주인 그림자의 존재 의의가 거의 없기도 하고. 뭐 안 해 줘도 좋으니까, 쑥쑥 잘 크기만 하렴.
“난 정말 괜찮아. 응?”
달래는 말에도 고운은 여전히 울상 이었지만, 이내 내게 알겠다고 대답 했다.
고운은 산아에게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 의미 없이 굳어진 습관이었는 데, 눈이 마주친 산야가 생긋 웃었 다.
장난기로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
를 고운은 무엄하게도 살며시 피했 다.
방금 전, 고운은 제 과거를 산아에 게 털어놓았다.
우연히 족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 은 산야를 보고 무심코 꺼내 노으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 와중에 을 뻔하기도 했고, 볼썽 사납게 떨기도 했다.
무슨 생각으로 상전에게 궁금하지 도 않을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끼 내 놓았는지.
고운은 부끄러웠다.
서툰 고운은 그것을 그저 충동으로
보았지만, 기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산야는 그에게 단순히 모셔야 할 공주는 아니었다.
모두에게 떨어지던 다정과 애정이 었지만 그건 고운에게 유달리 더 각 별해서, 다른 이들마저 알아챌 정도 이니 당사자는 오죽할까.
고운은 제가 모시는 공주 마마를 좋아했다.
애틋하고 소중한 이였다.
그래서 그만큼, 그를 지기지 못했 을 때의 상실이 컸다. 자신에게서도, 다른 이에게서도 산 아가 안전하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고운은 강해지고 싶었다.
새벽 같던 고운의 청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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