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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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큰 눈이 그와 눈이 마 주치자마자 휘등그레졌다.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는 아이를 본 미리내가 의아해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안대를 내미는 궁녀의 행 동에 이해되있다.
보았구나. 내 눈을.
미리내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 었다.
물론 예화와 그의 몇몇 측근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비밀이 아무에게나 밝혀져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무서운 것을 보아 그런지 경직되어 있었다.
마구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것은 시끄럽지 않아 좋았지만, 그렇다고 서늘해진 미리내의 눈초리가 부드러
위지지는 않았다.
잘 지켜봐아겠군.
산야가 알았다면 당장에 제 머리채 를 쥐어뜯을 소리였다.
미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에 게 몇 마디를 더 건넸고, 산야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간신히 대답했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산아는 피처 럼 새빨간 미리내의 눈을 보고 두려 움에 떠는 아이였다.
하지만 얼마 뒤, 다시 산야와 눈이 마주친 미리내는 놀라고 말았다. 아까의 위축된 후궁은 이디 가고, 저리도 태평한 아이가 앉아 있지?
산야의 눈에는 졸음과 귀찮음이 가 득했다.
숨기지 못한 그 눈에 미리내는 저 도 모르게 입가를 움찔했다.
미리내의 눈은 새빨간 피가 그대로 비쳐 보인다 생각할 만큼 징그럽게 붉었다.
거기에 동공까지 가느다란 탓에 웬 만한 사람은 미리내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어린아이 중에 그 눈  마주한 이는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눈을 마주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무섭지 않은 걸까?
그의 반응에 산야가 또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앳된 얼굴에 묻어 있던 졸음이 간 신히 떨쳐졌다. 미리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밤이 늦었다. 아직 어 린아이니 졸릴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미리내는 아이를 안 아 들어 침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예화의 앞에서 따스하고 온화 한 이를 연기하고 있었기에, 그 행 동은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산아를 침상에 내려놓고 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산야의 발을 눈에 담은 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산아의 발은 정말로 작았다. 그의 손보다도 작은 발이었다.
그 발에는 화려한 비단신이 신겨져 있었다.
그 또한 평상시에 신는 그 신은 예쁘지만 발이 아팠다.
산야가 신고 있는 신은 새것처럼 보였기에 더 아파 보였다.
미리내는 저도 모르게 신을 벗겨내 한 곳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신을 내려놓는 그의 손 옆에 똑같 은 신을 든 손이 내려앉았다.
그가 정신을 자린 것은 산아가 불
편하다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을 때였다.
미리내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멍하 니 생각했다.
내가 월 한 거지?
나는 멍한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 다. 내 눈 밑이 퀭한지 나를 지나지 던 궁녀가 깜짝 놀라고는 다시 지나 갔다.
'결국 제대로 못 잤어.' 어젯밤 미리내가 자신의 궁으로 돌 아간 뒤, 나는 황제와 한 침상에 누 웠다. 물론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입 술을 깨물고 참았다.
내 잠버릇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거였고, 그게 몸이 바뀌었어도 달라 지지 않는다는 걸 어젯밤 긴 의자에 서 자다 떨어지며 체감했다.
자다가 황제 몸 위에 다리 올리는 건 죽어도 사양이다.
술도 마셨으니 금세 잠들겠지. 나 는 그것을 기다리며 열심히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나, 내게 돌 아온 것은 스르르 일어나는 황제의 기척이었다.
그녀는 일어난 후 미동이 없었다.
분명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눈 위로 느껴지는 따끔따끔함 에 그것을 확신하고는 최대한 눈이 떨리지 않게 조심했다.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나를 가만히 보던 황제가 내 이마를 쓸었다.
혹 부서질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
다.
“가없은 것.”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그 말에 나 는 우뚝 몸이 굳고 말았다.
아, 저 동정. 원작의 산아를 살게 하고 죽게 했 던 그 동정.
황제는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햇살 아래 병든 닭처 럼 졸고 있는 내가 그 결과.
“마마. 시원한 과즙입니다. 드셔 보 시겠어요?” 궁녀의 말에 나는 퍼뜩 선잠에서 깨어났다.
얼떨결에 그릇을 받아 드는 내 모 습에 궁녀가 작게 웃었다.
•이게 무엇이나?”
“자편 과즙입니다. 달콤하고 쌉쌀 하여 잠을 깨는 데에•••  그거 분명 내가 어제 먹고 쪽팔렸 던 과일 같은데.
이 세계는 왜 자꾸만 내게 시련을 들이대는가.
나는 과즙이 담긴 그릇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가져다준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 고, 마시고 이 궁녀의 얼굴에 죄다 뿜을 수도 없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 그  八을 궁녀에게 다시 내밀었다.

“마마?”
“꿀을 좀, 넣어주겠느나.” 아, 젠장. 수치스러워.
이 나이 먹고 음료에 꿀 타 달라 고 하는 건 어제 못지않게 부끄러웠 다. 두 번 말해서 더 그랬다.
내가 입맛이 어려져서 그래. 원래 는 아메리카노 샷 세 번 넣은 것도 생명수처럼 마셔 댔었는데•••  슬쩍 시선을 피한 내 앞에 궁녀가 멀뚱히 서 있었다.
팔이 아팠던 내가 다시 그녀 를 바라보자 궁녀는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핫, 하고 놀라며 그릇을 받 아들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대답한 궁녀가 방을 나섰다.
나는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 더 자려고 했지만, 문밖에서 들려온 '어떡해! 어떡해! 너무-'를 듣고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잠이 깨고 말 았다.
꿀 넣어 달라는 게 그렇게 큰일인
가.
나는 괜스레 엄청난 일을 시켰다는 죄책감에 잠들지도 못하고 궁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하게도 상기된 얼굴 의 궁녀가 가져온 그릇을 받아들있 다.
기대가 서린 듯한 궁녀의 얼굴에 고맙다고 눈인사를 한 뒤 나는 그릇 에 입을 댔다.
얼음이 띄워진 과즙은 시원해 보였
다.
원래 시원한 물을 좋아하는데 눈치 보여서 얼음 달라고 못 하겠단 말이
지.
나는 기대를 가지고 한 모금 들이 겼고,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이번엔 혀가 아릴 만큼 달았다. “괜찮으신가요?”
궁녀가 내게 물어 온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일부러 괴롭히려는 거 아닐까.
결국 나는 그 혀가 아릴 만큼 단 과즙을 죄다 마셔야 했다.
기껏 가져온 걸 남길 수 없을 만 큼 내 앞에 선 궁녀의 눈이 너무 초롱초롱했던 탓이었다.
먹을 때는 끔찍했지만 그래도 달고 시원한 걸 먹으니 확실히 머리가 깨 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궁녀들을  물린 뒤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어제 미리내는 괴상하게도 말랑말 랑한 모습을 보였다. 좀 더 이울리 지 않게 설명하자면 푸딩 같은.
그게 황제 앞에서의 내숭이 과도했 던 것 같긴 하지만, 확실히 약 먹은 것 같은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리내가 그냥 넘 이가진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황제가 자꾸만 신경을 쓰는 후궁인 터라 성가신데, 그 와 중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는 여란 가의 자식이다.
내가 본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까 지 조사를 하겠지.
뭐, 그건 상관없을 테니 자지하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려던 나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정말로 상관이 없나?
원작의 산야는 여란 가에서 정말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무엇을 시켜도 생글생글 웃으며 싫 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건 기윤 여란이 저도 잊고 있었 던 막내딸을 불러 황궁으로 가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윤이 산아를 고작 그 시비 하나 붙여 보낸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이린 애가 연기를 얼마나 잘했는 지, 그는 산아를 자신밖에 모르는 멍청이 계집에로 알고 있었다.
시종들은 산아를 괴롭히는 데에 팔 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그건 산아 가 별 볼 일 없는 천덕꾸러기였을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자신이 황제의 후궁을 학대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을 테 니 누구에게 묻든 산아 여란을 극진 히 모셨다고 말할 것이다.
어쩜 이렇게 이 집구석은 도움될 만한 일이 없지.
나는 머리를 침상에 박으려다 말았 다.
머리를 박으면 아프기만 한 데다, 괜히 상처가 난다면 어디서 났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어제 씻을 때만 해도 내 등에 난 흉터를 보고 어디서 났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내가 살수로 기워지지 않 았다고 설명하기 위해 애써야 했으 니까.
이 몸에는 어릴 적의 학대로 흉터 자국이 많았다. 집안일로 튼 손부터 시작해서 깊게 남은 흉터까지 다양 했다.
기윤은 그녀를 후궁으로 보내야겠 다 생각했을 때부터 모든 시종들에 게 산아를 건드리지 말라 엄명을 내 리고는 흉터를 지우려 애썼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흉터를 지우 고 피부가 광이 나게 만들었지만, 등에 남아 있는 긴 흉터 하나는 끝 끝내 흔적이 남았다.
산아가 어릴 적 채찍을 맞았던 상 처였다.
그 상처가 낫기도 전에 산아는 일 을 해야 했고, 그러느라 상처는 계 속해서 덧난 나머지 가장 큰 흉터로 남았다. 그건 기윤 여란에게 참 애석한 일 이었다.
끔찍하게도 증오하는 사생아를 끌 어안고 무시무시한 황궁에 막내딸을 보내아 하는 아버지를 연기한 그이 니 말이다.
나는 양손을 펼쳐 보았다. 손은 고 생한 흔적 없이 보드라웠다.
온갖 궂은일로 트고 갈라져 색이 변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그렇게 돈을 들일 거면 애초부터 잘 좀 대해 줄 것이지.
어느새 삼천포로 빠진 생각에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찌 됐든 결론 은 한동안 미리내에게 사상 검증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왜 거기서 고개를 들었지.
씩은 얼굴로 세상의 멸망을 논하던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어 봤자 바뀌는 건 없고,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나가자 궁녀들이 여전히 시립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착잡해 졌다.
분명 내가 어제 EPA갔을 때도 딱 저 모습이었는데.
아무리 감시를 한다지만 좀 심한 것 아닌가.
사람은 좀 바꿔 줘야 쉬기도 하지.
24시간 내내 서 있으려면 힘들 텐
시길 것도 없으니 가서 쉬라고 말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백이면 백 도망가려는 줄 알 것이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가장 앞에 있는 궁녀에게 말했다.
“잠시 산책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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