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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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라.” “아니 되십니다.” “비기라 했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비기라 하지 않아.”
“아니 되십니다.” 자동응답기 나? 벌써 몇 번째 똑같은 대답에 짜증 이 확 치밀었다.
동궁의 대문 앞.
나는 그 앞을 지키고 선 궁인들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어디 멀리 간다는 것도 아니고 정원에 가겠다는데.
“산화정에 가겠다고 하지 않느냐. 백목정처럼 나무가 무성해 나를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꽃들만 가득한 곳 이 무이 위험하다고.” “아니 되십니다.”
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정강이라도 걷어차고 싶다.
아나, 화내지 말아야지.
이 사람들도 다 명령받고 하는 건 데, 짜증 내지 말아야지•••
“허면 내 이 앞만 다녀오마. 나가고 싶어 그래.” “아니 되십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열 번 되는 것 이다.
슬금슬금 나가다 보면 다들 까먹겠1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었으나, 그들 은 강경했다.
“송구하옵니다, 공주 마마. 허나 아 니 됩니다.” 어이구, 말 길어졌다. 성은이 망극 하네.
입을 다물고 그들을 고깝게 바라보 던 나는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상전의 말을 무섭도록 잘 듣는 궁 인들은 비킬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 공주보다 황제가 더 무섭겠 지.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생각 할수록 이이가 없었다.
이번엔 짜증의 화살이 제대로 된 사람을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멀쩡히 잘 있던 날 왜 감금해?
물론 동궁은 아주 컸기에 감금이라 는 느낌은 잘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달랐 다.
방문을 내 손으로 열어젖힌 나는 내 뒤에 서 있던 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연. 폐하께 서신을 보내야겠어.” 폐하의 명이시라니 따질 사람은 명 확하네.
이번에는 빨랐다. 곧바로 탁자에 문 방사우가 준비되었다.
의자에 앉은 나는 붓을 잡기 전 심 호흡을 했다.
나는 지금 절대 밖에 못 나가서 화 난 어린애가 아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누군가를 가둔다 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다 온 나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합당한 이유라 도 들어야겠다.
'그리고 엄마 취소야.' 어제 내가 자다가 발로 자기라도 했니? 그럼 말로 하지 황제씩이나
돼서 째째하게.
[폐하. 산아입니다.
혹 소녀가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있었는지요?
갑작스레 이리 소녀를 감금하시니 불민한 여식은 폐하의 깊은 뜻을 해 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속히 노여움을 푸시고 부디 부족한 소녀에게 가르침을 주시어요.]
일필휘지로 씨 내려간 나는 붓을 놓고 내가 쓴 서신을 쭉 읽어 보았 다.
, 황제에게 하는 말로는 최고로 직설적이아.
평소에는 쓰지 않는 일인칭이 조금 수치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만족스레 서신을 봉한 나는 그걸 희사에게 건네주었다.
“폐하께 전해 드려라. 직접 드리지 못해 송구하다는 말도 함께.”
“예, 마마.”
희사가 나가고, 나는 다시 붓을 잡 았다. 서연이 의아하게 나를 보기에 대답해 주었다.
“다른 후궁 마마께도 서신을 쓸 생 각이네.” 사실 서신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 않지만, 나는 오늘만큼은 어린아이의 뻔뻔함을 흉내 낼 생각이었다.
보내는 목적과 받는 사람이 특정되 지 않으려면 경우의 수를 늘려야지.
•••이번 기회에 미리내랑 가람한 테 좋은 말도 좀 해 주고.' 그러자 서연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아까 옷을 가져오라는 내 말에 희사 가 한 눈빛과 비슷했다. 아, 설마? “그것도 아니 되는가?” “송구합니다.” 짜증스레 되물은 말에 사죄가 돌아 와 맥이 탁 풀렸다.
서연이 송구할 일은 아니지•••
한숨을 푹 쉬며 서연을 물렸다. 고 운만 남은 방 안에서 나는 몸을 쭉 늘였다.
•••대충 무슨 생각인지 알겠네.” 동궁을 나서지 못하게 하는 건 그 렇다 쳐도, 다른 이에게 서신도 못 보내게 한다니.
어제의 생각을 정정한다. 예화는 내 말을 아예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다.
내가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 각했지만, 해결하러 나설 거라는 것 은 알아챈 것이다.
이능이 없는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 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외출을 금지하고, 연락을 주 고받는 것도 금지한다.
이 양반이 이렇게 꼼꼼한 건 또 처 음이라 당황스럽네.
'기왕이면 다른 걸 믿어 줄 것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붓을 들 었다. 다른 후궁들에게 서신을 쓸 생 각이었다.
내 얌전한 생활 덕에 나와 그들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자주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금이 씩 나쁘지 도 않았다.
찾아가야 하는 것을 서신으로 바꾸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후궁들에게 모두 보낼 수는 없어 열댓 개 정도 만 작성했다.
어차피 꼭 보내야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니 상관은 없었다.
서신을 깔끔히 정리한 나는 모두 모아 탁탁 정리하며 빙긋 웃었다. 서연은 서신을 보내는 것도 안 된 다고 했지만, 뭐든 찾으면 방법은 나 오는 법이지.
부모가 엄하면 아이들은 순종적인 아이가 아닌 엄청난 거짓말쟁이가 된다.
내가 지금까지 참 작하게 살았지만, 얌전히 따라 줄 성격은 아니라서 말 이야.
“고운. 너만 있는 것도 폐하의 명이
얌전히 서 있던 고운이 눈을 휘둥 그레 떴다. 모르는 모양인데.
'여류가 없어.'
평소 같았다면 문 앞에서 다른 궁 녀들과 함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없 었다.
아마 예화가 치워 둔 거겠지. 다른 궁인들과 다르게 여류는 동궁 소속 이 아니니 마음대로 나갈 수 있으니
까.
고운을 남겨 둔 건 그래도 호위가 하나는 필요하니, 더 어린 고운을 둔 거겠지만•••
'서신 배달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나는 고운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야심한 밤. 나는 작은 마찰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잠시 놀랐다. 첫 번째로 고운이 장가를 밟고 있었고, 내가 침 상에 누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에 서신을 잔뜩 들고도 용케 균 형을 잡고 서 있던 고운이 얼빠진 소리를 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았
다.
평범한 내 방의 정경이었다.
문제라면 땅을 밟고 있는 내 두 발 이다.
'나 자고 있었는데.' 나는 후궁들에게 보내는 서신의 말 미에 답신은 오늘 밤 받으러 가겠다 고 적었고, 그 탓에 늦은 밤 깨어 있 어야 했다.
요즘에도 잠이 많은 것은 똑같은지 라 이른 시간 잠에 든 것까지는 좋 았지만, 나도 내가 왜 방 한복판에서 깨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몽유병이 더 심해졌나.' 방 안을 서성이다 고운이 올라오는 소리로 잠에서 깬 모양인데. 나도 꽤 얼떨떨했다.
고운이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그에게 손짓 했다.
고운이 소리 없이 장가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서신은 잘 받아 왔니?”
그가 내게 내민 서신은 생각보다 많았다.
내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궁에 갇 혀 심심하다는 시답잖은 내용이었고, 답장의 기한까지 정한 제법 무례한 부탁이었다.
그러니 기껏해야 서너 장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림잡아 열 장은 되는 것 같았다.
서신을 펼쳐 내가 원하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고운을 다독 였다.
“일어나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딱 맞춰 왔네. 수고했어. 이제 자러 가.”
어제와 오늘, 이틀을 모두 잠결에 움직였으니 증상을 말할 생각이었다. 그게 고운이 아닐 뿐.
어린아이의 평화로운 세계는 웬만 해서는 최대한 지켜지는 게 좋잖아. 굳이 고운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말에 고운은 금세 안심한 얼굴 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예화가 왜 그 렇게 대답했는지 조금 이해했다.
내가 고운을 보는 것과 그녀가 나 를 보는 것이 똑같겠구나.
방금 내가 생각한 것처럼, 나를 안 심시기고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싶 있겠지.
어리고 미숙하니까.
하지만 고운과 나의 다른 점은, 내 가 완전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
아끼고 사랑해서 그랬다는 걸 안다. 날 위해 한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사랑이 택하는 길 또한 언 제나 옳지는 않은 법이다.
'내일이면 답신이 오겠지.' 고운을 보내고, 홀로 남은 나는 한 숨을 내쉬고는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마마. 초은 입니다.]
사족 없는 간결한 서신. 초은은 여 면의 이름이다.
이거 받으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한 사람한테만 보내면 의심받을 것 같아 다 보냈다.
열 명이 넘는 인원에게, 조금씩 다 른 내용을 손으로 일일이 써서.
[집거령을 받으셨다니 안 되셨군요. 저도 동궁의 출입을 금지당해 만나 될 수 없으니 에석합니다.
마마께서 부탁하셨던 제 본가의 특 산품은 후에야 전해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식초를 왜 구해 달라 하시는지 이 해는 하지 못했습니다만, 향을 좋아 하시나 싶어 종이의 말미에 묻혀 보
냅니다.]
여면, 그러니까 초은의 본가인 여면 가는 넓은 평야를 가진 덕에 농작물 들이 풍부했지만, 그걸 그대로 팔기 보다는 제조해서 판매한 덕에 양조 장이 유명했다.
그 덕에 술도 잘 빚는다고 한다지 만, 그건 둘째치고.
나는 여백이 한참 남은 초은의 서 신을 촛불 위에 올렸다.
그러자 종이 군데군데가 갈색으로 변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타난 글자들을 읽은 나는 작게 감단했다.
오, 이게 진짜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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