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3 0 0
                                    

오늘 아침은 조금 기묘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이, 눈을 떴 을 때 기분이 묘했다.
바로 전날 무거운 이야기를 했지 만, '산아는 언제나처럼 서신으로 나의 하루를 물었다.
자기 전 답신을 써야겠다고 생각하 며 나는 그걸 다시 접어 두었고, 괜 히 눈을 비볐다.
'산아랑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가.
그동안 서신에 미친 사람처럼 살기 는 했다.
어찌 되었든 일단락이 되었으니 마 음이 놓여서 그런 걸까.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던 나는 문득 장가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뭔가 다른 것 같은데.
나는 꼭 무언가에 이끌리듯 창가로 걸어가 장을 열었고, 낯선 꽃향기가 혹 끼쳐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푸릇푸릇하던 정 경이 온통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있 있다.
향이 얼마나 강한지, 금세 방 안에 꽃향기가 가득 찼다.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잠이 덜 깬 머리로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밖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들 렸다.
나는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했고, 문이 열리며 세안을 도울 궁녀들이 들어왔다.
활짝 열린 장문을 본 희사가 활짝 웃었다.
“올해는 아륜이 조금 일찍 끝났지 요?” 그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륜이 끝난 뒤에 일제히 피는 복 사꽃, 그리고 어린아이.
그걸 알고야 있었지만, 이렇게 하 루아침에?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아륜의 기간은 한 달이 아니나?”
'산야'와 서신을 주고받느라 시간 이 많이 흐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 정도의 날짜가 지나지는 않 았다.
의아한 내 물음에 서연이 내 의복 을 갈아입혀 주며 대답했다.
“아륜은 복사꽃이 피는 날 끝나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 기간이 한 달 이기에 그리 알려진 것일 뿐, 유동 적이지요.”
“아기씨가 나타날 때만 꽃이 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럼요! 황궁에 피는 복사꽃은 서 라국의 명물인걸요.”
내 대답에 신난 목소리가 대답했
다. 희사가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초대 용께서 반려인 태조께 하신 약속이랍니다. 복사꽃을 유난히 좋 아하셨거든요.” 이것도 전설이 있었나.
나는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희사를 빤히 쳐다보0갔다.
“아륜이 끝나 서운해하던 반려를 위해, 이미 모두 진 복사꽃을 한 번 더 피워 주셨다 해요.”
복사꽃은 4월 즈음에 피고, 아륜은 여름에 시작한다.
여름에 피는 복사꽃이 신기하기는 하다만.
“그 광경을 황제께서 너무 좋아하 신 나머지 아직까지 축복이 이어지 고 있답니다.” 희사가 꿈꾸듯이 말을 이었다. “정말 낭만적이지요?” 낭만은 일어 죽을.
나는 순진한 희사의 상상을 차마 깨트리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
다.
사랑은 개뿔이 사랑이야.
평생 누군가의 눈치나 봐야 하는 도화 따위의 이능이나 줘 놓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용이 정말로 제 반려를 사랑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른 신수들과 다르게 모든 이능의 시작이 된 용이니, 사랑하는 사람에 게 얼마든지 센 이능을 줄 수 있었 을 텐데.
언령 같은 것 말이다.
“이번에는 아기씨께서 찾아오실까 요?”
그 생각은 희사의 설레는 목소리에 끊어졌다.
나는 그 밝은 얼굴을 바라보다 고 개를 내렸다.
짐작은 가지만, 혹시 모르니 확답 은 하지 않았다.
'이능이 약해졌으니, 이번엔 나타 난다고 했었지.'
그래도 기대했다가 좌절되면 슬프 니까.
나는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었 고, 다행히 아기씨의 유무는 금세 알 수 있게 되었다.
며칠 뒤, 아침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앉아 있는 내 귓가에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희사. 이 무슨 소란이나.
조용한 서연의 목소리가 늘 그랬듯 이 희사를 타일렀다.
“아이참, 마마님. 지금 그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에요!"
희사의 밝은 목소리가 득달같이 따 라붙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 갔다.
내 발소리를 듣고 궁녀들이 문을 열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걸었다.
무슨 얘기길래?
“아기씨가 오셨대요!”
나도 모르게 한 말에 문이 드르륵 열렸다.
서연이 날 보고 놀라는 와중에 회 사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산화정에 나타나셨대요. 구경 가 서요, 마마!”
나는 서연이 말리기도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보는구나, 그 어린애!
오랜만에 찾아간 산화정은 답지 않 게 북적였다.
평소에도 다른 정원들보다는 찾는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식물원에서 놀이공원이 된 정도랄까.
-1-正근口0 -있나 = 봐.
희사는 신나서 나를 안내했고, 그 뒤를 따라가자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 나를 알아본 궁인들이 놀라 비켜섰 다.
나는 내 방문을 알리려는 그들을 보고 내 입가에 검지를 대었다.
그들이 얌전히 따라 준 덕에 나는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보드라운 풀 위에 놓여 있는 아기를 볼 수
있었다. 두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 였다.
드 근 1-0 대로 아이는 엉엉 울고 있었 다.
코앞에 있는 탓에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걸 드 0 나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울음소리가 이상에'
칭얼대는 갓난아이 울음소리 같기 도 했고, 성인이 악에 받쳐 오열하 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여태껏 들어 보지 못했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울음소리였 다.
그래서 그런지, 풍년을 가져다준다 던 아이는 내게 그리 진근하게 다가 오지는 않았다.
아기씨가 나타난 뒤, 황실의 최우 선 목표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다. 저 아이가 눈물을 그치고 웃어 준 뒤 사라져야 다음 해에 풍년이 드니
까.
그러니 아이를 달래아 했지만, 나 는 도통 저 아이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던 찰나 누군가가 앞 으로 나섰다.
화려한 곤룡포가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
다.
엄마가 와 있었어?
엄마 또한 나를 마주하고 놀랐지 만, 그녀는 내게 다가오지 않고 아 이를 안아 들었다.
“제(祭)를 올리시러 가시는 것입니
다.”
내가 황제의 행렬을 멍하니 지켜보 고 있자 서연이 조용히 덧붙였다. “울고 계신 아기씨를 달래는 제이 지요.”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아기를 달래느라 제사를 지낸다고?
뭐야, 이게. 기괴해. “아이를 어찌 그리 달래느나.”
내 물음에 궁녀들이 의아하다는 일 굴을 했다.
“안아서 토닥여아 하지 않아?”
천진해 보였는지 궁녀들의 얼굴에 귀엽다는 웃음이 스쳐 갔다. 서연만이 애써 단호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기씨의 신체에 함부로  는 것은 예법에 어긋납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저 애가 아무리 소름 끼치게 울어 도 아기가 우는데, 그런 애를 앉혀 두고 제사를 지낸다고?
안아서 토닥이든가, 그것도 아니면 꿀이라도 한 숟가락 떠먹여 줄 것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든, 절을 하  어린 저 애가 알아.
“하지만, 아기이지 않느냐.” 내 혼란스러움을 이해한 듯 궁녀들 의 표정이 차차 바뀌었다.
그들이 웃으며 나를 달랬다.
“걱정 마시어요. 아기씨께서 인간 의 태를 쓰고 오셨으나 용께서 보내 신 사자(使者)이신걸요. 한낱 미물 의 방식을 따르지 아니하니 괜찮습 니다.” 그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멀어졌다고 해도 아이의 을음소리 는 여전히 들렸다.
아이는 그치지 않고 계속 울었다.
토템 정도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인간 같이 생겼다.
•••고작 그것으로 울음을 그친다 고?”
“언제나 아기씨께서 정성에 감복하 시어 울음을 그치셨답니다. 걱정 마 서요.” 중얼거린 말에 다정한 대답이 돌아 왔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니 할 말 은 없지만••••
“돌아가실까요, 마마?” 내 표정이 안 좋은 걸 보았는지 희사가 조심스레 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룡궁을 나가는 내 뒤로 울음소리 가 점점 멀어졌다.
새카만 천장에 신기한 모양으로 빛 이 들어온다.
나는 손을 쭉 펴고 그 빛을 두어 번 쥐어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
다.
'자야 하는데.' 자겠다고 누운 뒤로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 질 않았다.
낮에 그런 걸 봐서 그래.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
다.
아직도 그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리 는 것 같았다.
꼭 동상 옮기듯 아이를 안던 엄마 와, 안겨 가면서도 계속 울던 아이 의 모습도.
밤은 '산아'의 시간이다.
그 애가 낮에 의식이 있는지 모르 겠지만, 밤을 기다렸을 텐데.
내가 잠들어야 '산아'가 깨어나는 데, 좀처럼 잘 수가 없었다.
몇 번 더 뒤척이던 나는 결국 몸 을 일으켰다.
'자꾸 그게 마음에 걸려.
이대로 있으면 몇 시간을 누워 있 든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그냥 해결해 버리는 게 낫지.
성큼성큼 문가로 걸어가 문을 열어 젖히자 문 앞에 서 있던 한 사람이 그대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놀라지도 않았나. 어깨 한 번 움찔 도 안 하네.
'좀 놀라야 할 텐데.'
나는 상대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툭 말을 내뱉었다.
“깨어 있었네, 고운.” 너 일어나 있을 줄 알았다.
눈을 도르록 굴리던 고운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내 눈치를 보았다. 불침번을 돌아가면서 서기는 하지 만, 고운은 자라나는 어린이인지라 불침번에 포함되지 않9갔다.
무엇보다 내가 저번에 여류에게까 지 말해 뒀었는데. 이놈 밤에 재우 라고.
'왜 나와 있는지 알기는 하지만.' 나는 작게 혀를 내찼다.
지금은 그걸 혼낼 타이밍이 아니었
다.
“나랑 어디 좀 가자."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