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주인은 잠만 잤는데, 동궁은 사람 들로 북적였다.
내가 오래 잠든 만큼 많은 이들이 내 안부를 궁금해 했던 모양이다.
그 덕에 나는 궁금했던 것의 대부 분을 알 수 있었다. 궁녀들은 안전했고, 여류와 고운 도 마찬가지였다.
고운이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해 조금 곤란했지만, 그 외 의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예상치 못한 방문인 들도 있었다.
후궁들이 오다니.'
아주 가끔 인사만 하던 사이인 이들도 있었고, 내게 시비를 걸었 다가 사과를 해야 했던 이들도 있 었다.
그들은 모두 내 처소를 찾았고, 내 안부를 물었다.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 잠 시 고민했지만, 그렇다기엔 그들의 태도나 모습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 다.
정말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는 쉬라며 빨리 돌OH갔으니까.
그리고 그들 모두, 내게 빼놓지 않 고 해 준 말들이 있었다.
적적했던 궁을 찾아와 줘서 좋았 다고 무례한 방문에도 따뜻이 맞 아 주어 고맙다고.
미처 말을 못 했는데, 감사를 표 할 기회가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
라고.
그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감사받 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양심이 찔려 그렇게 말하자, 그들 이 웃었다.
' '그겠가又/도 가마의 다정입니다.
다시 떠올리니 또 민망했다. 하지 만 싫지 않았다.
당분간은, 아마 꽤 오랫동안 떠올 릴 때마다 심장이 간질거릴 기억이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시금 그 따뜻한 기억을 떠올린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내가 그 상냥하고 따뜻했던 병문안 을 끝낸 뒤 한 일은, 기윤이 구금되 어 있는 감옥을 찾은 것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축축하고 불쾌한 공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감옥은 내 생각보다 더럽고 눅눅했 다. 다들 말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 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안내하는 궁 인의 뒤를 따라 감옥 안으로 걸음 을 옮겼다.
내가 감옥에 있는 기윤을 찾아가겠 다고 말하자 당연히 모든 이들이 반 대했다.
그 더러운 곳을 왜 가나고 묻는 것부터 그 더러운 놈을 왜 만나나 고 묻는 것까지.
엄마는 그래도 아버지라서 그러나 고 울먹였고, 나는 가자 없이 엄마 에게 한숨을 내쉬어 주었다.
그리 거장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찝찝할 것 같았다.
내게 그토록 무력감을 안겨 주었 던 상대가 이잔1 아무렇지 않다.
그걸 알고 있지만 한 번쯤은 확 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의심이 있었 다.
“죄인은 공주 마마께 예를 표하
라.”
나는 천천히 멈춰 섰다. 반듯이 앉아 있던 기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죄인의 옷을 입고 옥에 갇혀 있었지만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기윤이 나를 보자 가만히 웃었다.
“부족한 아비를 보려 네가 왔구
나.”
무엄하다!”
내 곁에 있던 궁녀가 버럭 소리 쳤다. 나는 잠시 기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저자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물 러나 있거라.”
궁녀가 그런 내 말에 당황했다. 꼭 기윤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여 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있는 상황에 이 야기를 할 수는 없지.
나는 그걸 해명하는 대신 궁녀에 게 웃어 주었고, 그녀는 내게 예를 표하고 감옥을 나섰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아, 나는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어요?” 내 질문에 기윤은 그저 웃었다. “무엇을 말이나?” “반역을 시도하셨잖아요.” 떠보는 물음에 나는 순순히 답했
다. 이제 숨길 필요도 없었다. “너를 황제로 옹립하려 하였지." 내가 이 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 각하는 것처럼, 그 또한 그런 것 같았다. 가감 없는 간결한 진실에 나는 물었다.
“저는 이미 유일한 공주이고, 또 그만큼 총이1받으니 제 지위에 모 자람이 없다 생각하였는데요.” “허나 오래 가지 못할 직위이지.” 이어진 기윤의 말이 싸늘했다.
“폐하의 연치가 이립(而立)을 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든 지 원자를 생산하실 수 있지 않느 나.”
“그리된다면 폐하께서 아무리 너를 귀애하신다 하더라도, 네 입지가 지 금 같지는 않겠지.”
나 또한 잠시이지만 걱정했던 것.
기윤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 각지 못한 말이었다.
묻어 두었던 의심이 다시금 고개 들었다.
그는 왜 나를 살려 두었을까.
황궁을 저 혼자 모두 뒤엎을 수 있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다면, 나를 꼭두각시로 앉히는 대신 본 인이 황제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원작이 아주 많이 바뀌었으니까, 어쩌면 기윤 또한 바뀌었을까.
어쩌면 그의 방식대로 산야를 아 끼지 않았을까.
“폐하께서 아편에 대해 어찌 아셨 는지, 의아한 적이 없으셨나요?”
나는 그 생각을 잠시 미뤄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기윤을 찾은 목적 중 하나 였다.
“그 시종이 대필을 했다 한들, 어 찌 그 아이가 폐하를 만나 뵈었을 까요.'
“그 사실을 폐하께 말씀드린 것은 저입니다.”
나는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의 이 아이라면 몰랐을 사실 이지요.” 내 말에 기윤의 눈이 커졌다. “저는 당신의 딸이 아니에요.” 이건 내가 내게 주는 면죄부다.
혹시라도 기윤이 정말 딸을 사랑했 다면, 적어도 난 마지막에는 그를 속이지 않았다는 위안.
그리고 동시에 그건 벌이 될 것이 다.
그런 딸이 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고통스러울 테니.
그 말에 처음으로 기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늘 웃거나 무표정이었던 그가 그 만큼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은 처 음 보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차가웠다.
“그 아이는 끝내 내게 도움되는 일 하나 없구나.” 기윤이 분노를 갈무리할 수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그건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는 나를 아비로 생각하지 않겠 지.
“허니 너는 내가 죽더라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그의 안광이 번득였다. 창살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않0갔다면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졸랐을 것이
다.
“그래서, 내 광대놀음이 즐거웠느 나?”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었 중얼거리는 기윤은 광인 같았다. 그를 질린 듯 바라보자 기윤이 픽 웃었다.
“왜 네게 그리 말했느나고 묻고 싶은 것이나?”
“그 멍청한 것이라면 내가 한 그 말을 절대로 잊지 못할 테니 말이
다.”
“그러니, 저를 위해 억울히 죽은 아비의 복수를 다짐할 것 아니나.” 그 음절 한 마디마다 짙은 증오 가 묻어났다.
꼭 악귀 같은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불시에 손을 휘 둘렀다.
작은 손이 창살 사이로 쏙 들어갔 다 나왔다.
나는 얼얼한 주먹을 슬그머니 쓰다 듬었다.
•••때리 단단한 것 배'
내게 머리를 얻어맞은 기윤이 어 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 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뺨을 쳐 주 고 싶었는데, 창살을 사이에 두고 는 머리 한 대가 최대였다.
“뚫린 입이라고 뱉으면 다 말인 줄 아네. 금수만도 못한 것.”
태연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찌푸려졌다.
잠시라도 그를 인간적으로 생각 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만큼, 기윤은 추잡스러웠다. 마지막까지도 연기한 이유가, 제 복수를 위해서라고 기분이 나쁘지만, 그는 원작의 산 아를 아주 잘 알았다.
그 아이였다면, 정말로 그랬겠지. 적어도 황제에게 복수하지 않더 라도, 평생토록 죽은 제 아비를 가 없어하며 살았을 것이다.
저를 아껴 주는 황제를 미워하지 도 사랑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살 았겠지.
결국 제가 낳은 제 딸인데.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잘못 없는 어린 애인데.
그런데 고작 그런 이유로,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라고.
나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그 만두있다.
듣는다고 알아들을 작자도 아니 고, 굳이 시간을 들여 그를 바꿔 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옷을 털고 일어 났다.
옥에 갇혀 나를 올려다보는 기윤 의 모습이 작아 보였다.
“혹시라도 당신이 내게 두려움으 로 남을까 걱정했는데•• 고작 저것밖에 되지 못하는 인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기윤 의 본질이다.
“당신은 내 생각보다 작고 하찮았 군요.'
나는 덤덤하게 말을 시작했다. 내 게 다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은 무서웠지만, 그걸 오래 곱씹지도 않을 거예요.”
무섭도록 증오하지도 않고, 조금이 라도 가없지 않다.
내게 위협조차 되지 않는 기윤은 정말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저는 잘 살 거예요. 평범하게 사 랑하고 사랑받으면서요.” 당신의 그 가없은 아이가 살지
못한 만큼, 그 생을 받은 만큼.
말을 끝낸 나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가 보고 싶어.'
미리내도, 가람도, 내 궁녀들도, 그리고 고운도.
기윤 말고, 날 사랑하고 내가 사 랑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나는 그대로 감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일마 뒤. 죄인이 처형되있다는 이 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라가 넓은 만큼 사형수가 사형 당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 다.
나는 굳이 죽은 이의 이름을 묻 지 않았고, 그는 그대로 잊혀졌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