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 정말로 그렇게 눈이 떠졌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나는 그대 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몸이 개운했
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휙 밑으로 고개 를 내렸다.
다행히도 황제는 그 검은 머리칼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간호한답시고 밤을 새워 내 궁에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다니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장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못 듣던 소리였는 데. 오늘 새를 풀어 두었나?
어찌 되었든 나쁜 기분은 아니라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짹짹거리 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문에서 들려온 서연의 목소리에 대 답하니 문이 열렸다.
서연은 대야와 수건 등을 든 궁녀 대동하고 들어와서는 내 이마 에 곧장 손을 얹었다.
“열이 떨어지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 다.
그때까지도 내가 그녀를 가만히 바 라보고 있자 서연은 놀란 얼굴로 고 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함부로 손
•••아나. 괜찮아.”
그것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
다.
다만 정말로 걱정한 듯한 모습이 조금 신기했을 뿐이다.
나는 가만히 시중을 받아 옷을 입 었다.
어제 앓았던 후폭풍인지 옷이 평소 보다 두꺼웠다.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내게 옷을 다 입힌 서연이 엄중하 게 당부했다.
나는 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 다.
저번에는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 은 없다고 말해 두고, 시간이 얼마 나 지났다고 말을 바꾸는지.
내 눈빛을 받은 서연의 얼굴이 조 금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내게 당부했
다.
“아직 날이 너무 춥습니다.” “이만큼 껴입으면 괜찮아.” “안 괜찮아요!”
옆에 서 있던 희사가 톡 끼어들었 다.
평소에는 그녀의 수다스러움을 싫 이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알 미웠다.
동의를 구하듯 방을 둘러보니 모든 궁녀들이 내 눈빛을 피했다.
다 한통속이라는 의미였다.
이 인간들이.
•••오늘은 들어온 선물을 풀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의기소침해진 나를 달래듯 서연이 물어 왔다.
그에 잠시 관심을 가졌던 나는 이 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자피 나에게 올 선물이란 여란 가에서 보낸 것밖에 없을 텐데, 내 용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황제를 사로잡아라, 로 통용되는 것들이겠지. “두어라. 비려도 좋고.” “하지만 마마••• 내 말에 서연이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나는 왜 그러냐는 얼굴로 고개를 가웃했다.
“황제 폐하와 귀비 마마께서 하사 하신 것도 있습니다. 확인이라도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서연의 말투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대놓고 꺼리는 내 반응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것은 타당했다.
귀비와 황제는 나보다 직위가 높았 고,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을 보지도 않고 버렸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와 내 궁녀들에게는 불이익이 갈 것이
다.
그런데•••
“황제 폐하와 귀비 마마께서 선물 을 보내셨느냐?”
갑자기 보낼 게 뭐가 있지?
나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생각했 고, 별 의미 없이 서연에게 툭 물있
다.
“어떤 선물인 것이나?”
“저, 그게•••
서연이 또다시 말끝을 흐렸c\. 그
모습에 나는 뒷골이 싸했다.
머뭇거릴 만한 선물이라니. 누군가 의 목이라도 잘라 보낸 건가?
나는 이 세계에서 딱히 정 붙인 인간이 없었다.
누구의 목이 오든 그 사람과의 추 억으로 힘들어할 일도 당연히 없다 는 것이다.
여란 가의 직계들의 목이라면 심하 게 놀라는 척은 해야겠지만, 그 이 외에는 그저 시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평범하게 징그러운 선물인가.
나는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보낸 선물이 인간의 목이든 금두꺼비이든 나는 확인을 하러 가야만 했다.
“가자.
내 말에 궁녀들이 내 뒤를 따랐다.
나는 서연이 안내해 주는 대로 전 각 안의 한 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 어째서 서연이 선물을 설명하지 못했는지 알아챘
다.
그 방 안이 천장까지 물7닌들로 꽉 자여져 있었으니 말이다.
상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포 장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커다란 원숭이 인형 같 은 것이 그러했다.
나는 양손에 심벌즈를 들고 눈을 부릅뜬 원숭이 인형에게서 의도적으 로 시선을 떼며 물었다.
“이게•••••• 다 무엇이나?”
“황제 폐하와 귀비 마마께오서 보 내 주신 선물입니다.”
이 많은걸?
그때, 상자를 각자 하나씩 든 남자 들이 식량을 나르는 일개미처럼 복 도를 지나 걸어왔다.
그들은 가득 찬 방을 보더니 난처 하다는 얼굴로 서연을 보았다.
서연은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얼굴 을 하더니 그 옆 방을 열어 주었다. 그 방은 지금의 이 방의 과거가 그랬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는 장고 였다.
나는 남자들이 그 안에 상자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을 입을 떡 벌리고 지켜보았다.
설마 저게 다 인간 목은 아닐 거
“저게 무엇이나?”
“선비 마마께서 보내신 선물입니
다.”
가람이?
“그러니까 왜?” 나도 모르게 따져 묻듯 말하자 짐 을 옮기는 남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 있던 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짐을 옮기는 사람들을 감독하러 온 그는 꽤나 직책이 높아 보였다.
나는 그가 가람의 궁에서 왔다는 것과 직책이 높다는 것에서 조금 움 찔했다.
제 주인에게 왜 불만이 있나고 따 져 물으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그는 말 간 얼굴에 한껏 미소를 띠었다.
방금 전의 차가움이 의심될 만큼 해사한 미소였다.
그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오자 나 는 한 발 뒷걸음질 졌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그는 한껏 반갑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초비 마마!”
그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산 아가 얘랑 접점이 있었던가?
산야 여란은 황궁에 오기 전 내내 여란 가의 저택에만 갇혀 살았다. 밖으로 내돌리기엔 산아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기윤 여란을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건 훗날 산아를 황궁에 넣기에 좋은 이유였지만, 그 당시에는 가주 의 지부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가람의 수족인 누군가와는 마주칠 리 없는 것이 맞 았다.
여란 가에서 넣은 세작인가?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가 그제야 인사를 깨달은 듯 아, 하며 말했다.
“마마를 뵙습니다. 저는 재이 수안 이라고 합니다. 부족하나마 선비 마 마의 부관을 맡고 있지요.”
그 말에 나는 간신히 정리해 둔 생각을 흐트러트려아 했다.
가람의 부관이라고?
그의 부관은 원작에서도 가끔 등장 했다.
가람의 독백에서였다. 이리했는데 부관에게 혼났다. 저리해서 부관에 게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대부正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그로서 알 수 있듯이 가람 과 그의 부관은 꽤나 막역한 사이였
다.
그런데 세작이라니?
물론 원작이 아예 바뀌지 않을 수 는 없다.
그 반증으로 산야가 바뀌었고, 미 리내가 바뀌었다.
하지만 미리내의 성격 변화가 가람 의 부관이 세작이 된 것과 무슨 관 련이 있단 말인가?
“제 상관께서 마마의 병환이 중하 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재이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시더라도 꽤나 괜찮은 선물이니, 한 번 보아 주시기만 하시어도 영광일 것입니 다.”
•••그래. 감사하다 전해 드리거
라. 내 몸이 아직 낫지 않아 찾아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것도.” 그렇게 대답하니 재이가 기특하다 는 듯이 웃었다.
나는 천진하게 마주 웃으며 생각했
다.
'절대 안 열어 봐야지.' 여란 가에서 보낸 선물이 분명했 다.
가람이 내게 저렇게 많은 선물을 보낼 리가 없지 않나.
황제와 미리내는 무슨 속셈인지 모 르겠지만, 이 선물들은 좀 더 투명 했다.
여란 가에서 산야에게 좋은 걸 보 낼 리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목이 간질거 려 작게 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감기는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목이 부어 아프지는 않았지만 간질 간질하니 자꾸 기침이 나오려 했다.
슬슬 들어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 궁녀들 을 본 나는 움찔 놀랐다.
그녀들의 일굴이 아수라라도 본 것 처럼 변해 있기 때문이었다.
“기침! 기침하셨어!”
“이, 어떡해. 아직 많이 아프신가? 괜히 나오시라고 해서!”
“저, 송구합니다. 마마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들어가서야 할 것 같 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호들갑을 떠는 궁녀 들에게 번쩍 들려졌다.
놀란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내게 재 이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얼른 들어가십시오.” 왜, 왜 이래. 다들. 기침 한 번 했 을 뿐인데.
나는 당황해하는 사이에 어느새 내 방 앞에 서 있었다.
궁녀들이 문을 열자 뜨거운 공기가 훅 끼쳐 왔다.
••••너무 더운데.”
“아프면 원래 따뜻한 곳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맞아요. 찬바람 들면 고뿔이 더 심해지십니다.” 그래도 이 사우나는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방 안의 곳곳에 놓인 화로가 지옥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침실에 들어온 건지, 죽어서 화당 지옥에 온 것인지 알 수가 없 는 모습이다.
나는 난감한 얼굴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무 의자가 삐걱 소리를 내자 궁 녀들의 얼굴이 또 다급해졌다. “안 돼요!”
“저 위험한 의자를 누가 가져다 놓 았지?”
“여기, 침상에 앉으세요!” “저기 진정 좀••• 내가 당황하는 사이, 누군가 화로 를 들고 낑낑대며 방으로 걸어 들어 왔다.
앳된 얼굴의 어린 시비였다.
고생깨나 했는지 얼굴과 옷에 검댕 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얼굴을 찌푸렸 다.
어린 애를 고생시켜 가면서 따뜻하 게 있을 생각은 없는데.
“저 애, 이제 그만 “아, 저 에요?” 내 말을 끊으며 희사가 씨익 웃었
다.
그 얼굴이 생각보다 사악해 보여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지?
“마마를 괴롭혔으니 그 벌은 마마 를 돕는 것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어 요? ••••뭐, 그래도 한참 모자라지 만 그 장난기 가득한 말에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얼굴을 제대로 보니 여란 가에서 따라온 시비가 맞았다.
'그런 거였군.' 나는 궁녀들을 말리려는 생각을 싹 접으며 그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시비는 화로가 무거운지 구슬땀을 홀리며 옮기고 있었다.
이마를 닦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는 얼굴이 환해졌다.
“아가씨!”
아. 역시 인간은 양심이 없는 것들 이 너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