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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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게 연인이 된다
깨달음은 불시에 찾아온다.
그건 아주 큰 것도 있고, 홀려 넘 길 만큼 사소한 것도 있다  바람 좋은 어느 날, 오랜만의 휴식 으로 의자에 늘어져 있던 산아에게 찾아온 것은 후자였다.
그녀는 문득 떠오른 재미있는 생각 을 그냥 넘길까 하다가, 제 연인에 게 말을 걸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고운이 곧바로 그녀의 부름에 답했다. 산야는 그녀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
다.
“우리 노부부 같아.”
쨍그랑.
산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 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궁인이 서 있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그만 손이 미끄 러져서•••
들고 들어오던 도자기를 대차게 깨 먹은 궁녀가 두려움에 찬 얼굴로 고 개를 숙였다.
산야는 시선을 내려 깨진 도자기 파편을 바라보았다.
식기에 쓰는 도자기도 황궁의 것이 니만큼 몹시 비싼데, 궁녀가 들고 들어오던 것은 그도 아닌 장식용이 었다.
아마도 꽤 오래전의 어느 날, 미리 내가 선물로 주었던 것이라는 것을 산야는 떠올렸다.
선물한 당사자는 실용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주었지만, 산야에게는 박 물관 속 유물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 였다.
쓰기도 뭣하고, 무엇보다 섬세한 문양이 예삐 장식해 두었던 건데.
짧은 아쉬움을 느끼며 산야는 다시 고개를 들어 궁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열다섯이나 되었을 만한 아이였다. 그러니 비싼 걸 옮기자니 덜덜 떨 수도 있지.
“괜찮다. 깨진 조각에 다질 수도 있을 테니 진정한 다음 지우거라.”
미리내가 준 건데, 깨졌다는 걸 알 면 슬퍼하겠어.
산야는 여상히 그 화제를 마무리
짓고는 다시 고운에게 시선을 돌렸 다.
그 0 0 그L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산 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자기가 깨진 것에도, 그녀의 발 인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이 었다.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산 아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 우리 꼭 삼십 년은 같이 산 부부 같잖아.” 장난스러운 그 말에 처음으로 고운
이 표정을 바꿨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 며 물었다.
“어느 부분이 그러합니까?” “음, 일단 편하잖아. 너도, 나도." 산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고 운은 반문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기 다렸다.
“물론 불편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우리가 손끝만 닿아도 설레지는 않잖아?” 말들을 나열하던 산아는 괜히 제 말끝이 조금 쓸쓸하게 내려간 것 같 다는 생각을 했고, 괜히 제 발이 저  曰을 내저었다.
“불만이 있다는 건 아나. 난 이대 로 좋아.” 그건 정말이지 한 지의 거짓 없는 말이었다.
산아에게 고운의 존재는 몹시 컸 다.
단순히 친구나 연인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무언가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항상 그 자리 에 서 있을 절대적인 내 편.
그런 기묘한 신뢰 관계가 둘에게는 있었다.
이렇게까지 기대고, 또 이렇게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산야에게 고운 이 유일했고, 앞으로도 그릴 것이다. 말 그대로 반쪽 같은 사람. 그런 이를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다.
풋풋한 설렘이나 연에의 불안이 없 는 것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산 아는 흔들림 없는 잔잔한 관계가 마 음에 들었다.
'너도 그렇지, 고운?' 산아는 빙긋 웃으며 턱을 괴고 고 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 에도 이럴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더욱 입가의 웃음이 깊어졌다.
노부부 같은 사이면 뭐 어때.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연애를 해 보겠나.
•••그렇습니까."
그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고운이 답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 가갔고, 기꺼이 입을 맞췄다.
그녀는 제법 고지식했고, 입맞춤 시에 눈을 감는다는 정석을 충실히 따랐다.
그 탓에 산아가 착잡해진 청회색 눈동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산아는 황태자로서의 업무를 처리 하기 위해 상소들을 읽고 있었다.
누리는 권리가 많을수록 책임 또한 막중했다. 무엇보다 한 나라를 다스 리는 것이니 몹시 집중해야 하는 중 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산아의 손은 자꾸만 멈춰 있었다. 그를 반복하기를 몇 번, 산 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상소를 내 려놓았다.
•••고운. 할 말 있니?”
이름을 불린 고운은 놀란 기색도 없이 침묵했다.
그의 자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 다. 조금 더 다르게 말하자면 산야 가 상소를 내려놓을 만큼 그녀를 뚫 어지게 보고 있었다.
산야는 고개를 들어 고운과 눈을 맞췄다.
웃지 않으면 서늘한 인상의 둘이라 그저 응시하고 있을 뿐인데도 이던 가 살벌한 기류가 흘렀다.
그렇다고 이제 와 웃기도 뭐한 산 아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을 때, 그 녀는 고운 또한 미미하게 표정을 바 꿨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주 미묘한 자이지만 눈동자가 조 금 비껴갔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고우9”
•••아닙니다.”
어조는 덤덤했지만 이미 눈을 피한 것을 본 산아는 그걸 믿지 않0갔다.
“퍽이나 그렇겠다."
산아는 고운을 잘 알았다. 저건 분 명 할 말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심각해졌다. 고운은 웬만해서는 불만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아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산아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미로 고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운 또한 침묵을 이어 갔으나, 결 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고운 쪽이 있다.
하아, 하는 작은 숨소리가 났다.
고운의 가슴 부근이 작게 부풀었다 꺼졌다.
“제 모습에서 바뀐 것이 보이십니
까?”
산야는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도 그릴게,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지금 한숨 쉰 거야?' 그것도 저런 얼굴로? 고운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딱딱하 게 경직되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혹시 화났나 며 조심스레 물이볼 만한 얼굴이었
다.
그런 얼굴로, 나한테 한숨을•••
“제 모습 중에 바뀐 듯한 것이 있 는지 여쭈었습니다.” 잠시 정신을 빼놓았던 산야는 재자 한 고운의 말에 정신을 다잡았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우선은 그의 질문이 먼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아는 빠르게 그것을 이해했으며 다시 고장 나고
말았다.
두 번째로 되묻자 고운이 입을 다 물었다.
이번에는 산아가 다시 드 己己0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산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운을 보 았다. 그의 말은 어색하면서도 익숙 했다.
'나 뭐 바뀐 거 없어?'
전생, 지구에서 들었던 철 지
•• 유행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걸 네가 왜••••••?
산아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자 고운은 아주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 깔았다.
그 모습이 산아는 기묘하게도 불길 했다. 이대로 뒀다간 단단히 토라질 것 같다.
토라진다는 것에 고운을 대입하는 것조차 산아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지 만, 그녀는 우선 최선을 다했다.
산아가 눈에 힘을 주고 고운을 훑 이보았다.
어릴 적보다 많이 가라앉은 회색 머리카락. 여전히 예쁘지만 더 짙어 진 정회안.
평소와 같은 무채색 무복에 목
'달라진 게 없는데?' 무복의 옷것에 수라도 놓았을까 정 말 꼼꼼하게 보았지만, 산야는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어설프게 웃으며 다시 고운 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머리칼이 좀 더 차분하네. 향유를 발랐니?”
쥐어 짜낸 정답에 고운이 가만히 산야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 덕였다.
산야는 그 반응에 그저 웃었다.
틀렸네.' 고운은 산아의 대답에 몹시 상심했 다. 드러난 것은 없지만 분명하다.
분명 화장한 날씨이건만 산야의 속 에서는 천둥이 졌다. 그녀는 이 갑 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주저하던 잘나, 고운이 고 개를 숙였다.
“시간을 뺏어 송구합니다. 나가 있 겠습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소리 없이 방 을 나섰다.
홀로 남은 산야는 잠시 딱딱하게 굳어 있다 축 늘어졌다.
“뭐야•••
궁녀들이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핵 고개를 돌려 고운을 바 라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이었으나,   0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제 입술을 매만졌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한 입술이 촉촉했다. 그가 1- 긚 떼자 단홍빛 연지가 묻어났다.
난생처음 발라 본 것이라 입술이 답답했다. 입술뿐만이 아니라 피부 또한 그랬다.
'궁녀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 나.'
파격적인 제안인 터라 잠자코 따랐 는데, 산아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 으니 말이다.
고운은 에다는 궁녀들의 시선을 뒤 로하고 걸었다. 세수를 할 요량이었 다.
천천히 내딛는 걸음걸음에 향유를 발랐냐 물으며 어색하게 웃던 산야 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렘은커녕, 낯선 것을 바라보는
쓸모없는 짓이었군.'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 으나, 드러난 흰 귀의 끄트머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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