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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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못 구했습니다.”
나는 지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번에는 묶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진 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연스레 미간이 구겨졌다. 그거 없 으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나는 곧 표정을 풀었다. 바 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퍽 진솔했
다.
'역시 무리였나.'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저런 태도로 열심히 안 한 것 같지도 않고.
달달 볶는다고 뭐가 더 나오지도
않을 거고•••
있으면 아주 좋겠지만, 워낙 기대를 하지 않은 터라 다른 방법도 생각해 두었으니.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그만 나가 보거라.” 너도 내 거짓말에 놀아나느라 수고 많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얹었다.
그러고는 움찔하는 지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관대한 처분에 감사하며 후다닥 나 갈 줄 알았는데, 그는 그대로 있었
다,
“저, 정말 노력했지만, 부득이하
“그래. 어쩔 수 없다 하지 않았어.
아무렴 못 구해 온 것으로 죽일 수
아 있나.” 농담을 던지며 웃었지만 그는 여전 히 딱딱한 얼굴이었다. 뭐야. 왜 저
래.
“나가라니까?”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해 주 자 그제야 삐걱삐걱 몸을 움직인다. '관절이 안 좋나•••
지수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간신 히 침상에 뉘였다.
여란 가의 하인 숙소는 그리 편안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지금 몸 뉘일 곳이 필요했다.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오늘 선고를 듣고 돌아온 지수는 정말이 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 다.
일주일 전, 자신을 풀이 줄 것만 같 았던 공주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 적이었다.
기윤 여란이 팔고 있는 약이 사실 사람을 백치로 만든다고?
그리고 그것이 서 대륙 상인과 결 탁한 일인데, 증좌를 찾아오라고?
'그게 뭔데?!' 증좌는커녕,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 는 줄도 몰랐던 지수는 기함했다. 만병통치약.
직관적인 이름이기는 하나 여란 가 에서 판매하고 있고, 효과를 본 이들 도 많아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약이었다.
얼마 전 그의 친우가 모아 둔 돈에 땅문서까지 팔아 그 값비싼 약을 사 는 것을 보고 혀를 쯧쯧 자면서도 내심 부러워했는데, 자신의 빈곤한 재정 상태에 감사해아 할 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물론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산야의 웃는 얼굴이 다시금 생각난 지수는 몸이 덜덜 떨렸다.
'아이가 영악하기는 하지만, 그럼에 도 아이이니 어렵지 않을 걸세.' 기윤이 그에게 산야를 세되하라는 의뢰를 맡기며 한 말이었다. 지수는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머리 통을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아이?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손바닥 위 에서 가지고 노는, 속에 구렁이가 들 있는지 여우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아이?
그래, 정말 그랬다. 지수는 공주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름 알음알음 도는 소문들을 잘 아는 지수조차 금시초문인 것을 공 주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지수는 살기 위해 발버둥 졌다.
여란 가의 가주가 숨기고 있는 비 밀이라면 필시 여란 가에 있을 터.
지수는 마침 기윤이 임시로 만들어 준 여란 가의 하인이라는 신분으로 여란 가에 머물고 있던 자였다.
하지만 아비고 딸이고 어찌 그리 닮았는지, 철저하고 속 모를 것은 기 윤도 뒤지지 않았다.
여종을 유혹하고, 혹 드나드는 자가 있나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같지 않 나 싶어 기윤의 집무실까지 숨어들 었지만, 역시나 발견되는 것은 없었 다.
죽었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발치에
목숨을 구걸이라도 해 보자 싶어 찾 아간 황궁인데.
'살다 질주를 할 주도 있지.
'
그만 나가 꼬거라.
돌아온 것이 이 말이라니.
지수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리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공 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년 곧 죽을 것이니 실수를 해서는 안 됐던 것이다. 지수는 허겁지겁 변명했지만, 돌아 온 대답 또한 참담했다.
'그래. 어필 주 없다 하지 않았어.
아무럼 못 구해 몬 것/으로 축일 주
'
있나.
그리 말하며 빙그레 웃는 얼굴이 야차 같았다.
공주가 이리 속 모를 이라는 것을 아는 서라국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그 이면을 보았고, 그녀가 내준 명마저 실패했다.
입막음도 할 겸, 벌도 내릴 겸 죽여 야지.
그런 생각이 천진한 공주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듯했다.
재차 내려진 축객령에 비척비척 황 궁을 나가며 지수는 생각했다. 죽일 거야.
분명 날 죽일 생각인 거다•••  오늘이 이 고뇌의 해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삶은 계속되고 고통은 이어졌다.
침상 위에서 부들부들 떨던 지수는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가 어찌 살아왔는데.
우선 지수의 목숨이 끊기지 않았다.
공주가 말한 이레의 시간이 지났는 데도 말이다.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지수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그리고 며칠 뒤.
“구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는 데 무릎을 꿇고 있는 지수를 내려다 보며 나는 생각했다.
뭐지 이놈은?
기껏 선심 써서 보내 줬더니 왜 다 시 온 거야. 무릎은 왜 꿇고?
그게 의아했지만, 나는 우선 그가 내게 공손히 내민 것을 집어 들었다. [뜻대로 되어가고 있소. 그대가 말 한 대로라면 이제 곧 중독 증상에 빠진 이들이 나타나겠지.]
그가 내게 내민 것은 서신이었다.
기윤이 서 대륙의 사신과 주고받은 서신. 이것이라면 확실한 증좌가 되기는 한다.
서신을 보내는 수신인과 발신인이 모두 표기되어 있고, 약에 대한 서술 도 나와 있으니까.
이걸 진짜 어떻게 구했대?
서신을 주고받는다고는 해도, 분명 받자마자 다 태워 버릴 텐데.
나는 그걸 찬찬히 읽다가 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못한다면서?”
“이, 이제 정말 못 합니다. 죽어도 못 합니다.” 나는 바들바들 떠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픽 웃었다.
“위조했구나?”
서랍에서 기윤의 서신 하나를 꺼낸 나는 그 옆에 펼쳐 두었다.
이아, 솜씨 좋다. 감쪽같아.
필체가 같은 것은 물론이고, 단어의 끝 삐침을 조금 올리는 것 같은 사 소한 습관과 금박이 섞인 먹-긚0 1 것까지 아주 똑같았다.
서신 위조는 나도 생각해 본 방법 이었다.
기윤이 내게 쓴 서신이 몇 개 있고, 상소를 엄마에게 달라고 하면 되니 필체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똑같이 베껴 내는 것 이 문제였다.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이 모두 실패 했다.
그들은 달필이었지만 오히려 그 바 람에 누군가를 따라 해도 자신의 개 성이 묻어났다.
하는 수 없이 기윤의 눈밖에 좀 나 더라도 내가 고발하는 쪽으로 가려
고 했는데•••
'이렇게 나와 주면 나아 고맙지.' 훨씬 쉬운 길을 지수가 가져다 바 졌다.
어느새 그것만으로도 날 세되하려 했다는 건 잊혀지고, 머리라도 쓰다 듬이 주고 싶어졌다.
똑똑하기도 하지. 그래, 내가 증거 를 가져오라고 했지, 찾아오라고 하 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가짜든 뭐든 쓸모가 있는 걸 가져 왔으니 됐다.
“이리 할 수 있는 것을 왜 못 했을 개” 대단하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지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이 한여름에 왜 저렇게 떨고 있담•••  “이제 돌아가 푹 쉬거라.” 아픈 기색이 역력하길래 몹시 배려 하여 한 말이었는데, 지수가 결연하 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왜인지 모르게 비장한 분위기에 괜 히 긴장했을 때, 지수가 벌떡 일어나 더니 양팔을 올렸다.
“그, 그게 아니오! 팔을 거두시오!” 지금 팔 올리고 있는 건 본인이면 서 누구한테 저러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자 여류 가 한 발짝 나서 있었다.
얼굴이 평소의 여류답지 않게 무섭 게 굳어 있었다.
아, 제압하려고 했구나.
지수는 저번처럼 또 호랑이 가죽인 양 바닥에 깔릴까 두려운지, 후다닥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 대륙과 동 대륙의 의미가 똑같
다면 이거•••
'충성 맹세 아나?'
“신 지수, 이제 공주 마마께서 저의 죄를 사하여 주셨으니•••  꼭 사이비 교주에게 하는 말 같았 다. 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 은혜를 받들어, 마마께 충성하 겠습니다!” 갑자기?
'얜 뭐 하는 놈이야.' 대체 무슨 맥락으로 다시 돌아왔고, 나한테 충성 맹세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왜 이러느냐.”
“마마께서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신! 평생 이 자세로 있겠습니다!” 왜 이래, 진짜.
한 삼 일쯤 놔둘까, 싶었던 나는 마 음을 고쳐먹있다.
그래도 받아 놔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거라.” 내 말에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절 박한 눈동자에 두려움이 고여 있었
다.
엄마가 협박이라도 했나?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뭐, 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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