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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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 다.
가령 몸이 너무 개운하다거나, 오 늘따라 감은 눈 위로 내리쬐는 햇살 이 유난히 반짝이거나 하는 것들.
이상하다. 왜 환하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이 번쩍 뜨 였다.
•••아침이야?”
중얼거린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엄청나게 푹 잔 것 같았다.
아니, 미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바 뀌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몸은 개운했고, 쨍한 햇살 은 방 안을 깊숙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간만에 내 머리채를 잡았다.
어제 엄마의 품에 안겨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꾸 잠이 솔솔 왔다.
평소 자던 시간보다 늦어지기도 했 고, 따뜻한 품과 적당히 토닥이는 손길이 너무 포근한 탓이었다. 애써 잠을 깨려 노력하던 나는 결 국 나 자신과 잠시 타협했다.
잠깐만 눈 감고 있자. 어차피 엄마 가 침대에 눕힐 때 살짝 깰 테니까.
하지만 깨긴 개뿔. 아주 푹 잤다. '답신 못 써 줬는데!'
나는 울상이 된 얼굴로 베개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곱게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안녕. 오늘 날씨 참 좋다. 어제 많이 바빴나 봐. 아니면 혹시 서신을 둔 곳이 바뀌었니?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원망하는 게 아니야.
전자는 걱정이고 후자는 물음이니 까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생각해 보니 네가 할 일이 많겠구 나 싶었어.
바쁜 와중에도 내게 꼬박꼬박 서신 을 보내 줘서 고마워.
내 서신에 꼭 답신해 주지 않아도 돼. 앞으로는 네가 편할 때에만 씨 줘도 괜찮아.]
거기까지 읽은 나는 서신에 머리를 푹 박았다.
'내가••• 미안하다•••
셀프 머리채를 한 번 더 잡은 나 는 서둘러 서신을 쓸 준비를 했다.
[미안해. 어제 서신을 쓰려다가 잠 들어 버렸어.]
그렇게 쓴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서신 쓰는 게 피곤하다는 의미로 보이려나?' 지위, 지워.
붓으로 두 줄을 죽죽 긋던 나는 그것도 성에 안 자 새 종이를 꺼냈 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한참을 고민했
다.
'뭐라고 쓰지•••
글자로만 내 의도를 전달해야 하는 건 어려웠다.
어떻게 말해도 내가 서신을 쓰는 게 귀찮았거나 시간이 없었다고 보 일 것 같았다.
결국 처음에 쓰고 지웠던 문장을 다시 쓴 나는 한참을 고민해서 답신 을 쌌다.
네 서신을 무시한 건 절대 고의가 아니었으며,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 이었고 나도 너와 서신을 나누는 걸 제법 좋아한다고. 그렇게 쓰고 나니 아침인데도 기운 이 쭉 빠졌다.
'산야는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아이였다. 싫은 소리 한 번 못 하고 조심스러워한다는 게 서신에서도 느 껴졌다.
말을 조심스럽게 한다는 건 본인 또한 잘 상처 입는다는 의미.
안 그래도 아픔이 많은 아이인데, 최대한 상냥하게 대해 주고 싶었다.
'아, 어렵네•••
아무렴 누군가를 쟁기는 일이 쉽겠 나만.
궁녀들이 들어와 세안과 환복을 돕 고, 아침까지 다 먹은 나는 다시 침 대에 널브러졌다. 어느새 고운이 들어와 침상의 한구 석에 서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고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 눈 밑이 어째 검은데.
'산야'와 같이 밤을 샌다는 걸 알 고 나서부터 왠지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따 낮잠 좀 재워야겠다.'
안 잔다고 하면 이불에 돌돌 말아 서 못 나오게 해야지.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엄마 품에서 잠들었는데.'
저번에도 내가 화룡궁에서 엄마와 함께 잠들었을 때, 깨어난 '산야'가 동궁으로 돌아왔었다.
“나 어제 폐하 품에서 잠들고 난 뒤에 무슨 일 없었니?”
나는 괜히 불안한 기분에 고운에게 물었다. 고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일어나서 소스라치게 놀란 다거나, 그런 거.”
그렇게 말을 덧붙이자 고운이 고개 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대로 잠드셔서 아침까지 일어나 지 않으셨습니다.”

잠들면 깨어나는 게 아니었나? '일어나는 시간을 선택할 수도 있 나.' 서신이 왔으니 한 번은 일어났다는 건데.
잠시 생각하던 나는 이내 그걸 머 릿속에서 지웠다.
어찌 됐든 마주치지 않았으니 됐
'서로에게 좋지 않은 만남이다.'
나는 그 생각을 홀려보내며 장밖으 로 시선을 던졌다.
작게 열어 둔 창으로 복사꽃 향이 홀러들어왔다.
황궁에 죄다 복숭아 나무만 심어 뒀는지 저만큼만 열어 두어도 방 안 에 향이 가득 찼다.
“마마. 희사입니다.”
그때 문밖에서 희사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들어오라고 대답하니 곧장 문이 열렸다.
“어머, 장을 열어 두셨네요.” 희사가 열린 장문을 보고 웃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좋구나.”
“방 안에서만 즐기시지 마시고 산 책이라도 다녀오셔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귀찮다는 의미로 몸을 반대로 휙 뒤집자 희사가 장을 더 활짝 열며 말했다.
“아기씨께서는 보통 이레 안에 사 라지십니다. 그리하면 저 꽃들도 모 두 져 버릴 거예요.” 이레라면 일주일이다.
생각보다 금방 지네. 무슨 벚꽃 같
다.
그러면 한 번 나가 볼까.
“복숭아 나무가 어느 곳에 제일 많 느나?”
나는 곧장 궁을 나섰고, 지금 이곳 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금서실에.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나는 한 숨을 깊게 내쉬었다.
복사꽃 보러 나갔는데 왜 여기 와 있나 하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희사가 추천한 산화 정으로 향했었다.
산화정이 워낙 꽃들이 많은 정원이 라 그런지, 아이가 처음 발견된 곳 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유독 복숭아 나무가 많았다.
그걸 모두가 알고 있었는지 산화정 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고, 내가 그 안으로 발을 들이자 시선이 쏠렸다. 그 예쁜 광경을 더 보고 싶었지만, 그걸 포기할 만큼 나는 그 자리가 불편했다.
결국 나는 산화정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사람들을 따돌리려 한참 을 빙글빙글 돌았고, 결국 발걸음이 향한 곳은 금서실이었다.
조용하고, 그래도 몇 번 왔다고 익 숙하고, 누군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
그래도 한숨은 나왔다. 꽃구경하러 나와서 웬 책이야. '아나. 그래도 여기 재미있어.'
어째 놀 팔자는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애써 나를 다독이며 책장을 뒤 졌다.
금서실이라 그런지 야사(野史)도 제법 있었다.
황제의 행보를 신랄하게 기록한 입 담 좋은 한 신하의 회고록 정도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나는 한 책 의 표지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미리내?”
나는 곧바로 그 책을 뽑아 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 두 단어가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일 기]
믿을 수 없을 만큼 삐뚤빼뚤한 글 씨였다.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하다가, 그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보면 죽여 버릴 거야.]
참 섬뜩한 말이건만,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글씨체 탓에 하찮게만 보였다.
미리내의 글씨체와 하늘과 땅 차이 였다. 하지만 나는 미리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알았다.
그러니까 아마 이건, 미리내가 어 릴 적 작성한 일기 아닐까?
'대박•••
이런 게 어떻게 있어? 이걸 미리 내가 용납을 했어?
그래서 금서실인 건가. 하여튼 놀 라웠다.
아, 볼까.
그렇지만 개인 정보이고, 어릴 때 쓴 거니까 혹역사일 텐데.
잠시 끙끙대던 나는 결국 호기롭게 일기장을 펼쳤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던
가. ••••••솔직히 궁금했다.
[제윤은 못생겼어.] [성격도 더러워.]
[세계최강쫌생이멍청이말미잘멍게 해삼]
세상에나.
첫 장부터 강렬하다.
[심심해서 놀아 달랬더니 이거나 쓰라면서 던져 줬어.]
[용인 이 몸을 이따위로 다루다니, 배은망덕한 놈!]
[이능 뺏을 거야. 괜히 줬어.]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을뿐더러, 퍽 단호한 글씨체였다. '어릴 때엔 조금 순했나 싶더니.' 그럴 리가. 성질은 여전했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책장을 넘겼 다.
서라국의 모든 가문의 성은 초대 가주의 이름이다.
제윤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미리내 가 축복을 내려 준 제윤 가의 가주 인 듯한데.
첫 번째 천룡이 나타났던 시기. 그 게 벌써 얼마 전이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꽤나 오 래전의 일이었을 텐데, 이때의 미리 내는 어렸구나.
[바리는 예뻐. 그렇지만 제윤을 좋 아해. 그게 하나 있는 흠이야.]
황제와도 친했구나. 그리고 그 황 제가 제윤을 좋아했다고•••
아, 맞아. 천룡이랬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능력이 생 기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백지 몇 장을 넘겼고, 작게 쓰여진 글씨가 보였다.
[둘이 결혼했다. 햇살처럼 웃는다.
행복해 보여.] [진짜 사랑하나 배]
[사랑.]
한 페이지에는 딱 그 한 단어만 적혀 있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그 부 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짧은 단어가 괜히 쓸쓸해서, 나 는 어깨를 토닥이듯 그 단어를 가만 히 쓸어 주었다.
그리고 장을 넘기자 흰 종이 가득 검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도 사랑!!!! 나도!!!!! 나도 운명

어이구.
앞쪽의 정취가 그리웠다.
그 뒤는 미리내의 깨발랄한 하소연 이 주를 이뤘다.
나는 그 일기를 끝까지 꼼꼼히 읽 고는 다시 고이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 두었다.
사실 처음엔 이걸 다 읽고 은근히 미리내를 놀릴 생각이었는데, 다 읽 고 나니 기분이 신기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조금 엿본 느낌이 탈까.
미리내는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八  러운 줄 알았는데.
부모님 어린 시절 앨범 본 기분이
아.'
재미있었다. 이런 게 있을 줄은 몰 랐는데.
나는 신이 나 서가를 뒤졌고, 꽤 두툼한 책 한 권을 찾아냈다. '귀족들의 족보다.'
차르록 펼쳐 보자 각 귀족 가문의 일원들과 그 가문의 이능이 기재되 어 있었다.
익숙한 이름도 있었고,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다.
제법 흥미롭게 쭉 읽어 내려가던 나는 한 부분에서 멈췄다.
“와, 고운. 이거 봐. 너랑 이름이 똑같아.”
마호 가문. 맹독의 이능을 가졌으 며, 동쪽의 곡창 지대를 다스린다.
그 집안의 사 남의 이름이 고운이 었다. 흔한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신기 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고운 과 눈이 마주쳤다.
고운은 깜짝 놀란 듯 입만 뻐끔대 고 있었다.
“왜. 너이기라도 해?”
나는 그에 놀릴 요량으로 픽 웃으 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날 고운과 똑같은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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