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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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궁녀가 흠칫했다.
나를 혼자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황족은 바깥에 나갈 때 꼭 많은 수의 시종들을 대동한다.
다만 황족을 제외한 후궁들은 보통 혼자 다닌다.
보통 모두 명문가의 자제이기 때문 에 그들은 이미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은 굳이 자신의 몸을 지 길 호위나 시종이 필요 없으며, 시 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황족의 특 권으로 암묵적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시피 특별 대 접을 받고 있지.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나가도 되느냐?” 나는 최대한 말간 얼굴로 궁녀에게 물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궁녀이니 직급 도 높을 거고, 그런 사람이니 내 출 입을 결정할 수 있겠지.
물론 내가 패악을 부린다면 얼마든 지 나갈 수 있겠다만, 굳이 데스노 트에 이름이 두 번 적히는 걸 경험 하고 싶지는 않0갔다.
내 말에 궁녀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는 무슨 황송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에게 일일이 허락받으실 일이 아닙니다. 마마. 나가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 격한 반응에 나는 움찔했다. 고 민하다가 그러십시오, 정도는 예상 했지만 이렇게 황송해할 줄은 몰랐 다.
아, 하긴 그런가. 명색이 여란 가 의 막내딸인데 감히 앞을 가로막는 건 안 된다는 건가.
내 말이 비꼬는 것처럼 들렸을 수 도 있겠다.
“나는 궁중 예법을 잘 모르니 언제 든지 가르쳐주거라. 가령, 나갈 때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한다거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께오 선 여란 가의 자제이시니 홀로 나가 서도 괜찮습니다.” 궁녀의 말이 나는 조금 난처했다.
여란 가의 이능은 염력이었고, 직 계에게는 꽤나 강한 힘이 부여되었
다.
실제로도 후궁들은 이미 자신 한 몸 지길 만큼 강했다.
시종을 안 두는 것도 그런 이유에 서였고.
그런데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단 말
이지••
사실대로 말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어차피 나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하 고, 굳이 그 말을 해서 궁녀들 사이 에 퍼진다면 괜히 표적만 될 것 같
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느
나?”
대신 나는 그렇게 물었고, 궁녀는 황제의 정원, 금서실과 사당, 그리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라고 대답했다.
모두 발도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이 다.
“산책을 나가신다면 피풍의를 가져 오겠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준비가 되었다.
아직 추운 바깥을 고려하여 털이 덧대진 망토 같은 것이 내 어깨에 걸쳐졌다.
두툼한 털을 두어 번 쓸어내리니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날 지켜 줄 힘도, 사람도 없이 무 작정 이 황궁 안을 활보하는 것.
사실 조금 무섭긴 했다. 얻어맞는 것도 그렇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죽임당할 수도 있으니까.
어린아이가 궁을 자유롭게 돌아다 니는 걸 보면 다들 누군지 알 것이 고, 후궁들도 딱 꼬집을 핑계 없이 죽이지는 않겠지만•••  나는 숨을 크게 쉬고는 궁의 문을 열었다.
이곳에 온 지 이틀 만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할 일이 있어.'
화서궁의 후원. 그중에서도 덤불이 두어 개 있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 리쬐며 사방이 나무로 막혀 있는 그곳에서 나는 덤불 중 하나에 몸 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여기 좋다.'
30분 전. 나는 나름대로 결의를 다지고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내가 생각했던 궁은 마당 딸린 주 택 정도였는데, 내 눈앞에는 베르사 유 궁전 정도의 크기의 정원이 보였
다.
'이게, 뭐•••
이게 평균적인 건지, 여란 가에서 압박을 넣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궁에 보통 이런 게•••••• 딸려 있
그런 내 반응을 잘못 해석한 궁녀 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  “아, 아니. 아니야.” 나는 황급히 뒤를 돌며 그녀의 말 을 부인했다.
아까 가장 앞에 서 있던 나이 많 은 궁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입만 달싹이고는 몸을 돌렸다.
뭐라고 더 해명하기도 에매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곧 새로운 장애물 이 찾아왔다.
높은 돌계단 밑이 보이질 않는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치마가 길었고, 신발 바닥에 미끄럼 방지 따위는 없었으며 심지어 계단은 난 간도 없었다.
'내려가다 죽는 거 아냐?' 나는 빠르게 내 이성과 타협했다. 아무리 유아 되행하기 싫다지만 여 기서 그냥 내려가다가 머리부터 떨 어졌다간 죽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뒤를 돌았고, 의아한 얼굴의 궁녀들과 눈이 마주 졌다.
그들은 왜 내가 내려가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 가 막혔던 나는 금세 이유를 찾았
다.
맞아. 내가 이능 없는 거 모르지.
'망했군.'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
나는 더 기대하지 않고 뒤를 돌고 는 조심스레 치마를 붙들었다. 그러 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 했다.
눈이 올 만한 계절은 아니라 계단 이 미끄럽진 않았지만, 흙이 밟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움찔 떨었다.
최대한 천천히, 조심히•••
마침내 계단에서 다 내려온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성공했어.
숨을 한 번 내쉰 나는 궁의 전경 을 한 번 쭉 훑었다.
매화가 핀 것이 조금씩 보이고, 목 련 나무처럼 보이는 나무에 겨울눈 이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랬으 나, 나는 내 시야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이 안 보여.
궁은 정말로 넓었다. 정말 말 그대 로 하나의 성 같았다.
내가 굳이 궁녀들도 뿌리치고 나온 것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서 였다.
예를 들어 궁에 자객이 든다거나, 갑자기 불이 난다거나 하는 경우에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은 불상사 말이다.
이건 비단 남주인 후궁들만의 이아 기가 아니었다.
황제는 총이1하는 후궁들 말고도 후 궁이 정말로 많았고, 그들의 인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몇 있었다.
굴러들어 온 돌인 꼬맹이 후궁이 총애를 잃으면 얼마든지 괴롭히겠 지.
모든 궁에 뒷문이, 개구멍이 없을 리가 없다.
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궁을 빠져나갈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런 것들은 앞쪽보다 는 뒤쪽에 많지.
원래는 좀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하려고 했는데, 어제 미리내와의 만 남 이후로 이 계획이 가장 1순위가 되었다.
나는 앞에 펼쳐진 정원을 흘끔 보 고는 내가 나온 건물의 뒤로 향했
다.
•••그게 30분 전의 일이었다.
후원은 정원보다 훨씬 더 수수했 고, 더 내 취향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앞의 궁이 가로막고 있어서 해가 잘 들지 않았다는 것이 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며 열심히 수색했고, 그러던 와중 이 장소를 발견했다.
출구를 찾겠다는 사람이 일광욕하 는 고양이처럼 누워 있는 이유를 대 자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 냥 지나치기엔 이 장소가 너무 매력 적이었다.
화서궁이 아무리 다른 궁보다 작다 고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방에 있으면 아무리 조용해도 이던 가에서 소음이 실려 왔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의 소리 없이 간간이 새소리나 실려 왔다.
사방이 막혀 있는데도 신기한 건 한 가운데에 햇살이 내리쬔다는 것 이었다.
신탁이 내려오는 것 같은 그 모습 은 신성해 보였지만, 그것보다도 따 뜻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홀린 듯 이 햇볕 한가운데의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좋다•••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온몸의 긴장 이 풀리는 기분이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신경 씨 얌전 히 앉던 것을 내팽개치고 몸을 아무 렇게나 늘였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 그런 건 가?
이곳이라고 하루 종일 해가 들지는 않겠지만, 누워서 하늘을 볼 수 있 는 장소는 혼치 않다.
나는 내친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입고 온 피풍의가 하안색이었던가.
그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으나 금세 무시했다.
따끈따끈한 햇살이 흰색 피풍의를 덮었다.
찬바람이 코끝에 솔솔 부는데 볕이 닿은 몸은 따뜻했다.
풀 냄새와 찡한 바람 냄새 속에 봄 냄새가 섞여 들었다.
이기지•••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갔다.
그 모습 0 보고 있던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소설 속에 빙의한 장점 중 하나는 사시사철 파란 하늘이라는 것이었 다.
멀리 봐도 하늘이 뿌옇지 않다는 건 경이로웠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딱 하나 문제라면 바닥에 서 올라오는 냉기였다.
몸을 비틀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
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엔 담요라도 하나 가져다 놓 아아겠다.' 땅바닥과 닿았던 부분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 낸 나는 찜찜한 얼굴을 했다.
입고 온 피풍의가 흰색이라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풀고 있었으니 그게 먼저 땅에 닿았을 거다.
그럼 옷에는 많이 안 묻었겠지?
피풍의를 벗어 터는 것이 가장 좋 겠지만, 겉옷을 벗기에는 너무 추웠 다.
대충 두어 번 더 털이낸 나는 그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리되지 않아 빽빽한 숲 같았던 곳을 지나니 정리된 후원이 다시 보 였다.
조경을 하지 않고 그저 땅만 다져 놓아 들꽃들이 피어난 곳이었다.
잠깐만, 보고 가는 거야•••  나는 풀잎 사이로 아주 작은 보랏 빛 꽃이 피어난 땅의 앞에 살짝 주 저앉았다.
물망초인가? 아니,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소리치는 것 같은 소 리였다.
조용한 후원에서 그 소리는 아주 잘 들렸고, 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차차 멀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급하지 않은 발걸음. 흙을 살짝 끄 는 듯한 소리.
순간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 분이 들었다.
누구지?
나는 숨을 죽인 채 그가 지나가기 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발걸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설마. 벌써부터 날 죽일 리가 없는
하얘진 머릿속에서 간신히 만들어 낸 문장은 그것이었다.
그래. 벌써 날 죽일 리가 없어. 이 렇게 허술할 리가 없잖아.
나는 흘끔 뒤를 바라보았다. 궁으 로 가로막혀 있었다.
우선 뛰어서, 사람들 0 1 0 갔=1- 고 0 로 간다면•••  살 수 있나?
저벅.
그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발걸 음이 멈춘 것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 옷자락, 붉은 머리칼.
익숙한 얼굴이지만 전혀 반갑지 않 았다.
가람의 능력은 불이었다.
오늘은 봄이라고 해도 아직 습한 여름이 오는 때까지 한참 먼 건조한 날이었고, 이런 후원에서 불이 나 어린 후궁 하나가 죽었다고 해도 이 상하지 않은 날이었다.
일어나아 해. 그래도 일어나서 도 망쳐야-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해를 등진 탓에 무표정인 그의 일 굴이 섬뜩할 만큼 무서웠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 청색 눈동 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창살에 목부터 꿰뚫린 짐승처 럼 그대로 굳어 덜덜 떨었다.
단번에 눈앞이 뿌예졌다.
차오른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죽이지 마세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간신 히 내뱉었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