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을 본 나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야심한 밤에 왜 안 자고 저기 있나.
“무슨 일이•••••• 왜 그래?”
평소처럼 명령어가 섞인 반말을 쓰려던 나는 말을 편하게 바꾸었 다.
매번 사극 말투를 쓰는 것도 불 편했고, 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 데 뭐 어떠나 싶었다.
내 말을 들은 새벽은 입술을 지 그시 깨물더니 1- 휘적휘적 움 직였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영 안 되 는 모양이었다.
수어인가. 이 세계에도 수어가 있 었나?
아니, 저건 그냥 보디랭귀지 같은 데. 전에 외국에 나갔을 때 내 모 습과도 흡사한 것 같다.
“올라오겠다고?”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답일 것 같은 말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 말에 새벽의 입이 동그랗게 아, 하고 벌어졌다.
단박에 기쁨이 느껴지는 얼굴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올라와. 괜찮아.” 내 말을 들은 새벽이 꾸벅 고개 를 숙여 부복했다.
그러고는 앞쪽으로 걸어 내 시아 에서 사라졌다.
금방 올라오겠구나 싶어 몸을 돌 려 문으로 가려고 했을 때, 돌멩이 가 튀기는 소리와 함께 몸 위로 그림자가 휙 드리워졌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훅 돌리며 숨을 삼켰다.
그리고, 정말 눈부신 눈동자를 마 주졌다.
휘장처럼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아래에 보이는 청회안.
낮에 보았을 때에는 안개가 낀 듯이 탁하던 눈동자가 달빛 아래 에서는 요요하게 반짝였다.
내가 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 운 눈동자에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아까의 놀랐던 감정은 어느새 달 아난 채였다.
내 부름에 새벽이 흠칫했다. 그의 몸이 흔들리며 장에서 떨어지려 해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달려갔
다.
“조심해야지!”
책망하듯 소리를 높이자 새벽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아래에서 웅얼웅얼 나온 목소 리에 나느 1-正1-으 己 동그랗게 떴다.
목소리는 놀랍도록 청아했다. 여 린 미성이 마치 이슬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말 못 한다더니.
내 시선에 새벽이 슬그머니 고개 를 돌렸다. “저, 송구하나 잠시••• “아, 아. 그래.”
그의 목소리에 새벽을 놓아주고 뒷걸음질 지자 새벽이 장에서 뛰 어 내려 내 앞에 섰다.
아까는 내가 앉아 있어서 몰랐는 데, 새벽은 나보다 정확히 머리 하 나가 더 컸다.
그래 봤자 꼬맹이였지만 안타까 운 사실은 지금 내가 더 꼬맹이라 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있었구나.” 작게 중얼거리자 새벽이 머뭇거리 다 무릎을 꿇었다.
“상전을 거짓으로 우롱한 죄,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담담한 대답이 나는 당황스러웠 다.
이 어린애가 무슨 무릎을 이렇게 쉽게 꿇어.
나는 일어나란 말 대신 그의 팔 을 잡아 올렸다.
“괜찮아. 그리고 다시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마.” 덤덤한 모습이 괜히 마음이 쓰인 다. 아직 어린데.
내 손길에 엉거주춤 일어난 그가 작게 예, 하고 대답했다.
숨긴 것에 대해 씩 화가 나지는 않았다.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 본인도 불편할 텐데 아무런 이유 없이 벙어리라는 이야기를 할 이 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을 묻는 대신 더 궁금 했던 것을 내놓았다. “무슨 일이야, 이 밤에?” 내 말에 새벽이 머뭇거렸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수줍음이 많 은 아이인 것 같았다.
••이름을, 여쭤보시어.”
그렇게 말하는 새벽의 목소리에 옅게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이름은 새벽이 아니었니?”
“다른 이들이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그 대답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 저었다.
“알려 주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 겠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괜찮
내 말에 새벽이 얌전히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어깨가 미묘하게 축 처진 것을 보았다.
•••말해 주러 온 건가.
어린아이들의 세계는 복잡했다.
어떤 이유로 그것이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내게 이름을 꼭 알려 주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알아도 괜찮겠느, 큼. 괜 찮아?” 요새 잠깐 그 말투를 썼다고 입에 붙었나.
평범한 말투를 쓰기가 영 힘들었
다.
내 말에 새벽이 숙였던 고개를 들 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다 말고 흠칫 놀라 대답했다.
목소리를 깐 대답에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원래 과묵한 아이였나. 물으면 고 개를 끄덕거리는 게 승낙하는 습관 이었나 보다.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이따가 말해 줘야지.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렇게 생각하 고는 조용히 새벽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내 질문에 새벽이 한 번 숨을 들 이쉬었다.
그건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
다.
이윽고 아이의 입이 열렸다.
•••고운. 고운입니다.” 새벽, 고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배 시시 웃었다. 침울하던 아이가 처음 으로 웃었다.
느리게 번져 가는 미소와 볼에 옅 게 핀 홍조가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모습에 마주 웃었다. 귀여 위라.
새벽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 다. 어감도 더 부드러웠다.
남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서 뭐 좋은 일이 있겠다만, 그래 도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고운.” 잠시 그러던 나는 옅게 웃으며 아 이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금세 잠들기는 그른 것 같 고
이 아이도 잘 것 같지는 않으니 잠시 대화 상대나 되어 달라고 할
까.
“지금 자러 갈 거야?"
내 물음에 고운이 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다 흠칫 놀랐다. 결국 웃 음을 터트린 나는 아이에게 소
밀었다.
“그럼 잠깐 놀다 가."
••마마, 폐하께서-
햇살이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졸려. 누가 커튼 좀 쳐 줘••그때 눈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는 찌푸렸던 미간을 사르르 피며 다시 잠에 빠져들려 했다.
“잘 자는구나.”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
다.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나.” 목소리는 재차 들려와 내가 부정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찬물을 맞은 듯이 잠에서 깨어난 나는 소스라치듯 일어나 앉았고, 나 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녀와 마주쳤다. 또다시, 어쩌면 이렇게 변할 것도 없이 황제였다.
“괘, 괜찮으나?!”
내가 벌떡 일어나자 황제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엉거주춤 뻗어진 팔을 얼떨떨하게 보던 나는 주춤주춤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황제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은 죄 였다.
황제에게 하는 일 중에 죄가 아닌 게 어디 있겠나마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일어나서 무릎 을 꿇으며 내가 잘못한 것을 조목조 목 나열해아겠지만, 나는 지금 조금 배짱을 부리는 중이었다.
황제는 이래도 날 죽이거나 처벌하 지 않을 거라는 것이 확실했으니까.
“아니다. 나야말로 놀라게 해서 미 안하구나. 괜히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나?” 그리고 역시나, 그녀는 스스럼없는 말투로 내게 물어 왔다.
짐이라는 1인칭을 쓰지 않은 것에 서 아이를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 참 쓸데없네.
나는 슬쩍 장가를 바라보았고, 햇 살이 쨍하니 비쳐 오는 광경을 목격 했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서연이 조 용히 속삭였다.
“방금 정오가 지났습니다.”
나는 그 말에 입을 떡 벌렸다.
벌써 12시가 넘었다고. 오늘 왜 이 렇게까지 늦게••• 어젯밤에 확실히 늦게 자기는 했 다.
고운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 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잘 쳐 줬 고, 그게 귀여워 나는 이런저런 이 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없는 동화 같은 것들 소설을 보는 게 취미였던 나는 아 주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때마다
반짝이는 고운의 눈은 나에게 하여 금 손주들에게 쌈짓돈을 꺼내 주는 할머니의 마음을 느끼게 했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정말 조금. 아주 조금 늦게 잤을 뿐인데•••
생각해 보면 잠들기 전에 푸르게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본 것도 같긴 하다.
하지만 날 깨우는 담당인 희사는 나를 늘 같은 시간에 깨웠는데.
그런 마음을 담아 희사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가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주무시면서 입을 오물거리시 는 게 너무 귀여우셔서 그만.”
“희사!”
웅얼웅얼 꺼내 놓은 희사의 말에 서연이 대경하여 소리를 졌다.
당연했다. 상전에게 귀엽다는 말을 하는 게 무례가 아닐 리가 없으니
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는 깜짝 놀라 황제에게 사죄했다.
나는 황제가 간 뒤 서연에게 희사 를 혼내지 말라고 넌지시 말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귀엽다고 한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 도 않고, 나에게는 씩 혼날 만한 일 도 아닌데.
황제는 서연의 사과를 가법게 용서 하고는 희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이 기묘하게 반짝이고 있이 나는 흠칫했다.
설마 벌을 주려고?
•••많이 귀여웠느냐?” 황제를 말리려던 나는 이어진 그녀 의 말에 벙 찐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희사는 황 제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 빛냈
다.
“그럼요! 마마께서 주무실 때 이렇게 꼼지락꼼지락하고, 입도 가 끔 짭짭거리시고. 그러다 한 번 우 응, 하고 고개를 푹 숙이시면서 양 손으로 얼굴을 고양이처럼 덮으시는
• 하아. 정말.”
“그, 그래?"
“네! 게다가 마마께서 이불을 잘 차내고 주무시거든요. 그래서 가끔 침의가 올라가서 배가 뿅, 하고 보 여요. 얼마나 귀여우신데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당장이라도 불 타 사라지고 싶었다.
희사를 도우려던 마음도 싹 날아갔 다.
제발 내 사생활이자 혹역사를 당당 하게 떠벌리지 마.
슬쩍 황제를 올려다보니 그녀는 당
혹과 충격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
다.
그 얼굴에 나는 두 배로 수치스러 워졌다.
“이불을 차 내고 잔다니, 그러다 고뿔에 또 걸리면 어찌하느냐.”
“헉, 그렇네요. 마마께서 귀여우시 긴 해도 아프시면 곤란해요!” 취소한다. 열 배는 부끄럽다. 나는 점점 치닫는 그들의 대화에서 이마를 치고 기절하고 싶었다.
그때, 내가 앉아 있는 침상의 앞 에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