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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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던져졌고, 화살은 내 손 을 떠났다.
고운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얼굴에 비스듬히 빛이 내리쬐었다. 그리고 나는 환해진 얼굴에 드러난 적나라한 감정을 볼 수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당혹스 러움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태연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던 일굴 들과 대조될 만큼 노골적이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입 밖으 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서도 나는 때때로 잠잠해졌다.
감정이 바뀌었지만 어릴 적부터 이 어져 온 유대가 사라지지는 않아서, 금세 사그라들 설렘이라고도 생각했 다.
그럴 리가 없었다는 것을 나는 이 제야 깨닫는다.
열정적이지 않아도, 헌신적이지 않 아도 괜찮아.
더 사랑하지 못할까 고민했다는 것 부터가 널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의 미라는 걸, 왜 나는 몰랐을까.
나는 너를 좋아해. 아주, 많이! 잔잔하던 수면에 돌을 던진 감정은 어느새 호수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한 발짝만 나와 주 면 된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고운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운의 표정이 느릿하게 바뀌었다. 당혹, 두려움, 부끄러움, 그리고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참함.
언뜻 스친 그 빛이 몹시도 참담해 서, 나는 눈을 휘등그레 떴다.
“전하께서 다정하신 분임을 압니 다. 허나 이런 문제에서까지 제게 다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발갛게 달아올랐던 고운의 얼굴이 어느새 딱딱해져 있었다.
“전하께서는 제 곁에만 머무르실 분이 아니니••
그 말에 쿵쾅대던 심장이 딱 멎었 다. 다른 의미로 열이 오를 것 같았
다.
얘가 원 소릴 하는 거야?
“우선 고운, 네가 나를 얼마나 좋 게 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가차 없이 고운의 말을 끊있 다.
지금껏 고운이 무슨 의견을 내세우 든 다 들어 주었지만, 이것만큼은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이를 측은 지심 탓에 받아줄 만큼 멍청하지 않 대체 이놈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누가 네 곁에만 머물 수 없어? 고운이 한 말만 들으면 내가 이미 후궁을 백 명쯤은 들인 것 같았다. 과묵한 성정에서 알아봤어야 했다. 이렇게나 혼자 땅굴을 팔 줄은 몰랐 지.
나는 이 몰이해를 어떻게 해결해아 할지 잠시 고민하다 이내 때려치웠
다.
“다 자지하고, 하나만 묻자.”
지금 내 상태가 이걸 고민하고 있 을 때가 아니다.
“날 사랑하니?”
단호하게 내리꽂힌 질문에 고운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장백하게 질렸
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차마 웃지도 못하는 낮으로, 대답을 토해 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다가와 주기를 기대했지만, 네가 한 발 다가오지도 못할 만큼 겁이 많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고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홍채의 줄무늬마저 보일 만큼 가까 운 거리였다.
그쯤 되니 나도 다시 떨리기 시작 해서, 조용하던 심장이 요란하게 제 존재를 알렸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바들 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고운의 뺨을 붙들었다.
“이게 내 대답이야.
가까이 당기자 고운의 눈이 휘둥그 레졌다.
청회색 눈동자가 황홀하게 예뻤다. “싫으면 언제든 밀어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고운에 게 입 맞췄다.
고운은 산아를 사랑했다.
언제일지 모를 까마득한 어릴 적부 터, 어쩌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랬다.
따뜻한 자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그 아이는 고운의 보호자였고 가족 이었으며, 기쁨이고 슬픔이었다. 알에서 깨어 처음으로 본 것을 어 미라고 인식하는 새처럼, 고운은 늘 산야에게 매여 있었다.
그에게 다정했던 이가 한둘이 아님 에도 어째서 그 아이였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운명적인 사람이었다.
고운은 당연히 산야를 위해 살았 다.
누군가의 강제가 아니었기에 그게 슬프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랑했다.
변함없이 사랑했으니 그 감정의 결 이 달라진 시점 또한 알 수 없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산야는 다 정했고, 아름다웠으며 고운은 그저 제 마음의 방향을 조금만 틀면 되는 일이었으니.
다만 문제라면, 산야가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 다.
산아가 듣는다면 슬퍼할 테지만, 고운은 기실 다른 이들에게 딱히 에 작을 두지 않았다.
그게 슬프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다.
하지만 산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 또한 산야를 사랑했다.
산야는 그 모든 것들이 있기에 완 전했다.
그 조각들 중 고운 또한 포함되어 있었지만, 산아는 고운만으로는 살 수 없었다.
고운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 기에 그의 사랑은 홀로 가꾸는 작은 정원이었다.
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 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만으 로 완전한 것이었다.
그게 얄팍한 안도였다는 것을 깨닫
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바누스의 왕은 젊고 아름다웠다. 어두운 회색 머리칼과 흐린 청안을 가진 고운과 비교될 만큼 화사한 금 발을 가진 왕이었다.
산야는 그를 아주 반가워 했다. 자 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비해 실바 누스의 국왕은 한눈에 알아보고 기 뻐했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산아는 고 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눈앞에서 닫히던 문과 웃고 있던 산아의 모습에 고운은 가슴께가 아 렸다.
둘은 잘 어울렸다. 서로 호감을 가 지고 있었고, 신분 또한 알맞9갔다. 산야는 서라국의 황위를 이어야 하 는 계승권자이지만, 만약 그녀가 원 한다면 얼마든지 타국의 왕이라도 비로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서늘한 불안은 산아가 대화 내용이 비밀이라며 웃었을 때 더욱 일렁였 다.
고운은 산야를 잘 부탁한다며 웃는 유리에게 자마 그러겠노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치졸하고 속 좁은 질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고운은 제가 꾹꾹 묻어 두었던 욕망 하나와 마주했다.
그래. 욕심이 났다.
산아는 이미 그에게 충분히 다정하 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갖고 싶어 졌다.
그 곁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만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산야를 사랑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 얼마나 더 늘어날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니, 곁에 사랑할 것이 그 하나 뿐이라면 오롯이 마음을 쓰지 않을
까.
고운에게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살리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니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보며 웃음 짓는 산 아를 마주한 고운은, 자마 그릴 수 가 없었다.
내가 어찌 당신을 강제할 수 있을 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다. 제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 이이기에, 결국 고운은 산야 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번도 내보이지 못할 마 음이 아쉬워서, 서글퍼서.
딱 한 번. 서 대륙에 있는 기간까 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당혹스러운 산 야의 얼굴에 죄책감이 들면서도, 고  0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한낮의 단꿈처럼 금세 지나갈 나날 들이다.
산아도 지금 잠시 그의 행동을 이 상하게 여기지만, 금세 다시 돌아온 고운의 모습에 의심을 지을 것이다. 그 잠시간의 시간을 고운은 오래 곱씹었다.
언젠가 산야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 지고,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빛바래지 않을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그것에서 멈추었어야 했는데, 인간 의 욕심은 늘 끝이 없어서.
마지막 밤이라는 말이 그를 흔들었 다.
고운은 아슬아슬하게 지켜 왔던 선 을, 딱 한 발짝 넘었다.
그리고 곧장, 덜미를 잡혔다.
날 사랑하는구나, 하는 확신에 찬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운은 뒤통수 를 후려 맞은 듯 꿈에서 깨어났다.
화가 났는지, 놀란 건지 가늠할 수 없는 산아의 얼굴이 보였다.
고운은 죄지은 아이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속절없이 들켜 버린 마음에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입을 다 물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할 래?”
그런 그에게, 무덤덤하게 던져진 산아의 말은 비수였다.
비참함과 수치심에 낮이 화끈했다. 차마 그녀에게도 드러내지 못하고 품어온 연정이다. 동정받고 싶지 않 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니, 그  가당찮은.
자신의 얼굴이 엉망임을 거울에 비 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산아 또한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 을 것이다.
그녀는 한순간의 확신을 꺼내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운의 거짓들을 모두 관망하고 있 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주군은 몹시도 자비 로워서,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포용 했다. 고운은 그게 조금도 달갑지 않았 다. 마음 깊이 사랑했기에 상처도 깊었 다.
그는 가시 돋진 말을 삼기며 애써 말을 맺었다.
언제 꿈을 꾸었냐는 듯 한순간에 진창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만큼 비참했던 날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어진 일들을 그는 믿 을 수가 없었다.
“우선 고운, 네가 나를 얼마나 좋 게 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는 사랑하지도 않는 이를 측은지심 탓에 받아줄 만큼 멍청하지 않아.”
처음으로 듣는 산아의 싸늘한 목소
리. 몇 번의 문답, 그리고-
산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뺨이 조금 우악스럽게 잡히고, 이 내 옅은 향이 순식간에 진해진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진다. 고운은 몇 초 뒤에야 그녀가 제게 입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잠시 뒤, 얼굴이 새빨개진 산야가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너, 대답해야 해.
“반드시 내게 대답해야 해.
산아는 못을 박듯 또박또박 말하더 니,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 발 코니를 나섰다.
고운은 차마 따라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가련한 사내는 제 첫 입맞춤을 뺏겼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