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오전. 흔들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나 는 눈을 비볐다.
이제 낮에 이유 없이 졸린 것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 으면 졸렸다.
“고운, 산책 갈래?”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 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방 안에는 나 혼자 있었다.
고운이 원체 조용히 있기는 했지 만, 어쩐지 오늘따라 너무 인기척이 없더라니.
기지개를 한 번 쭉 켠 나는 방을 나섰다. 시립해 있던 궁녀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운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내 말에 궁녀들이 곧바로 한 방을 말해 주었다.
동궁에는 긴 복도를 따라 방이 아 주 많았다.
그중 궁녀들이 말해 준 방 앞으로 간 나는 조금 열린 문으로 안을 엿 보았다.
그 안에는 고운과 여류가 있었다. 심각한 이야기인지 둘의 얼굴이 험 악했다. “너 그러다가 “고운 혼나?”
여류의 험악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자그맣게 문이 열린 방 안으로 빼꼼 고개를 집어넣었다.
난데없는 내 방문에 고운은 덤덤했 고 , 여己E 1- 노랐다.근
“마마. 그것이••
“별일이구나. 고운이 혼나기도 하 고
워낙 얌전한 아이라 몇 개월 동안 고운이 혼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 은데.
나는 여상히 말하며 괜히 방 안을 한 번 어슬렁거렸다.
여류는 차마 상전인 내 앞에서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나를 내보낼 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결국 여류가 한숨을 작게 내쉬며 고운에게 말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아나. 지금 이야기하거라.” 그에 나는 여류를 말렸다.
여류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절박하 게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슬쩍 방 을 나섰다.
이야기 잘해. 난 간다.
주먹까지 야무지게 꼭 쥐어 응원해 준 나는 다시 내 침실로 돌아왔다. “어머, 고운은요?”
“여류와 이야기 중이더구나. 두고
나왔다.” 정확하게는 혼나는 것 같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여류는 좀 경박하지만 그래도 진지 할 진지했다.
별거 아닌 걸로 괜히 애를 혼내지 는 않겠지.
알아도, 그래도.
그 쪼끄만 거 혼낼 데가 어디 있
다고 군기를 잡나.
괜히 혼자서 꽁해 있는데, 일마 지 나지 않아 목화 소리가 들렸다.
“마마. 고운입니다.” 뭐야. 빨리 끝났네.
나는 후다닥 문가로 걸어갔고, 문 이 열리며 고운이 보였다.
고운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나는 고운이 시무룩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이구, 혼나서 서러웠어.
나는 뭐 때문에 혼났는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서러워하는 애한테 자기 잘못 이야 기하게 하면 고운 울겠다.
어떻게 하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질 까.
고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나는 자그맣게 속삭였
다.
“우리 나갈래?”
“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황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어딜 보 아도 담벼락이 보였다.
평범한 초가집과 기와집이 보이는 광경이 신기했다.
나와 고운은 황궁 바깥에 있었다.
마침 장이 서는 날이었는지 거리가 시끌벅적했다.
예전에 한 번 여란 가를 찾아갈 때도 시장을 얼핏 보았었다.
그때는 아륜 기간이라 조금 더 화 려했지만, 지금도 그와 못지않게 떠 들썩했다.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웃고. 음식 냄새와 기름 냄새, 분 냄새가 섞였다.
한 발짝 떨어져 한참 구경하던 나 는 그 사이에 섞일 생각으로 한 발 짝 발을 내디뎠고, 그대로 손목이 잡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분명한 만류였다.
나는 뒤를 돌았고, 절박한 얼굴의 고운을 마주했다.
고운은 황궁을 나오는 내내 안절부 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결국 나를 만류한 모양이 다.
고운이 나를 이끌었고, 나는 얌전 히 그 아이를 따라가 주었다.
시장에서 벗어나 인적 드문 민가에 다다랐을 때, 고운이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거리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리 몰래 나오면 아니 됩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고운과 나는 황궁을 나섰다. 대신, 몰래.
“음 그런데 고운.”
“이제부터 궁에 들어가기 전까진 내게 하대하렴.”
“신분을 밝혀서는 안 되니까, 지금 부터는 내게 존대하지 마.”
단호한 내 말에 고운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작게 감탄했 다. 와.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거 처음 봤다.
•••제가 어찌.”
“어허.”
어디까지나 내 안위와 체신을 위한 일이거늘, 신하 된 도리로 어찌 따 르지 않겠다 말할 수가 있어.
우리는 잠시 동안 대치했고, 결국 고운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팔겠다.”
내가 기대했던 건 친구 사이의 친 근한 말투였는데, 돌아온 게 저런 거라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 0 으
그래도 말이라도 놓은 것이 어디나 고 생각하면서, 나는 머리를 긁적였
다.
왜 몰래 나왔나면, 음.
•••재밌잖아.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는 걸 한다는 즐거움은 아이들에게 꽤 크다.
숙제 다 하고 노는 것보다 학원 째고 몰래 놀러 가는 게 더 재미있 잖아?
고운도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나 만 들뜬 건가.
아마 고운이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좀 더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몰래 나왔다 해도 어 마마마께서 내 부재를 모르시겠니.”
고운이 월 걱정하는지 알았다. 나 는 태연하게 고운을 다독였다.
“네가 염려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 니 걱정 마렴.”
고운이 믿음 반 불신 반의 얼굴을 하길래,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너도 황궁 바깥은 거의 나와 본 적 없지 않아?”
궁인들은 대부분 황궁을 벗어나지 않으니 고운 또한 그럴 거라 생각했 다.
그리고 역시나, 고운이 고개를 끄 덕였다.
“이번이 두 번째다.” 아하. 두 번째••• 그대로 넘어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두 번째?
여란 가에 갈 때 고운도 동행했으 니, 이게 두 번째라면 그전에는 황 궁 밖을 나가지 않았다는 거다.
나아 엄마가 이등을 얻기 전에는 위험할까 봐 나가지 못하게 했다지 만 고운은 아니었을 텐데.
이놈들은 애 데리고 시장 한 번을 안 갔나.
“해 보고 싶었던 것 없었어?”
고운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잘 모르겠는지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에 나는 웃으며 고운의 손을 붙 들었다.
모르면 일단 해 보면 되지. 월 시 무룩해 해.
“일단 구경부터 해 보자. 시장이 제법 커 보여.”
나는 고운을 이끌고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운이 또 주저하기 전에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밥부 터 먹여야지.
아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이 있 있는데.
간판이나 물건을 보려니 사람이 너 무 많아서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어느새 내게서 떨어진 고운에 게 손짓했다.
“고운, 이리 와 봐. 이리!”
고요한 황궁에만 있다가 시끄러운 인파 속에 던져진 고운이 맥을 못 추고 휩쓸리고 있었다.
도와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고운은 금세 인파를 해지고 내게 다가왔다.
“어찌 부르십-
•••무슨 일이나.” 옳지, 잘했다.
고운의 머리를 한 번 재빨리 쓰다 듬은 나는 고운의 손을 꾹 잡고 고 개를 한껏 뺐다.
어린아이 둘이다 보니 확실히 어른 들 틈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 웠다.
우리는 이리저리 들리다가 어느 노점 앞에 떠밀렸다.
그냥 지나가려고 했지만 나는 달콤 한 냄새에 잠시 멈춰 섰다.
살구만 한 동글동글한 열매. 꼭 아 보가도 같은 색도 있고, 갈색도 있
다.
“이것이 무엇이오?”
“아니, 거 귀한 집 아씨처럼 보이 는데 신선과 한 번 안 자서보0갔나!”
그저 물어본 말에 상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우리 계림의 자랑이라오. 오직 계 림에서만 나서 신선한 신선과를 먹 기란 하늘의 별 따기지. 아마 그리 총에받으신다는 강회 마마께서도 맛 보신 적 없을 테제”
“오, 그러하오?”
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 치. 나도 먹어 본 적 없지. 신선한 신선과. 이거 캐치프레이즈 로 내걸면 잘 팔리겠는데.
내가 조용한 사이 상인은 몇 마디 를 더 떠들다가, 이럴 수 없다는 듯 과장되게 얼굴을 찌푸렸어.
“내 이대로 넘어갈 수 없지! 자, 어서 가져가시오.”
상인이 막무가내로 나와 고운에게 과일을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지 만 고운은 엉겁결에 받았다. “가, 감사합니다.”
받아 든 고운이 얼떨떨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순진한 고운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감사할 게 아닐 거야, 고운. 은자 하나만 주시오.” 그리고 역시나, 상인이 두꺼비처럼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바가지 씌우는 상인이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 이다.
은자 하나라니. 평민의 1년 생활비 정도 되는 가격이지 않나.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 다.
내가 챙겨 온 작은 주머니 안에는 은자가 가득했다.
이야, 사람 볼 줄 아네. 돈 잘 비 시겠다.
내가 감탄하는 사이 고운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口入- ”
“아나, 고운. 괜찮아.”
나는 선뜻 은자 하나를 내어 주있 다. 상인도 정말 줄지 몰랐는지 눈 을 휘등그레 떴다.
과일 장수가 무슨 대단한 범죄를 저지르려고 바가지를 씌우겠나.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한 번씩 좋은 일도 있어야지.
상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은자를 받 아들었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과일 잘 먹겠소. 많이 파시오.”
주먹까지 한 번 야무지게 쥐여 주 고 이동하려는데, 상인이 나를 붙들 었다.
“아씨. 내가 꼭 아씨만 한 딸이 있 어 하는 말인데, 그 주머니 간수 잘 하시오.”
딸 같은 손님한테 바가지 씌운 양 반이 할 말은 아닌 듯 싶긴 했다.
그래도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개 를 끄덕였다.
아무리 평범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궁에서 만든 옷이기에 완전히 평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당장 저 과일 장수 아저씨도 나를 귀한 집 아씨라고 말했으니까.
돈 많고, 집안 좋은 어린아이가 함 부로 나다니는 게 범죄의 타것이 잘 되기는 하지.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 인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음식점을 찾아 노상 특유의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으로 배를 채우 고 나왔을 때, 등 뒤에 서늘한 촉감 이 느껴졌다.
투박하고 두꺼운 손이 내 팔을 잡 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되었다.
나는 슬쩍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고운 또한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었 고, 고운도 당황했는지 그대로 얼어 있었다.
“섣불리 소리 지르지 말고, 얌전히 따라 걸으시오.” 음산하게 내리깐 말에 나는 작게 하품하며 생각했다.
예. 그럽시다, 뭐.